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양주동편" 양주동(1903~1977)
시인, 국어 국문 학자. 호는 무애. 경기도 개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문학 박사. 일찍이 향가의 해독에 큰 공격을 세운 바 있으며, '국보'라는 별명과 함께 변설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지적이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수필이 많으며 문장은 건축감이 있어 선명한 인상을 준다.
면학의 서
독서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 전비들의 무수한 언급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의 인생 삼락에 모름지기 '독서, 면학'의 제 4일락을 추가할 것이다. 진부한 인문이나 만인 주지의 평범한 일화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으로 나의 실감 하나를 피력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운운이 대성현의 글의 모두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은 그 밑의 정자인가의 약간 현학적인 주석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하였으나 논의의 허두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의 진리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 소박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와 같은 명리와 허화의 와중을 될 수 있는 한 초탈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에 고요히 침잠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 백년,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 수복의 구차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안두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의 청등이 희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 어느 문생이 내 저서에 제자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으로 서증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이다. 세상에는 실제적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을 위한 독서를 주장 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함이다. 선천적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한 이야기야말로 다생의 숙인으로 다복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에게나, 다 공통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 경건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에서 발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하였다.
그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 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 있는 고전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를 호흡한 신서를 더 읽으라, 각인에게는 각양의 견해와 각자의 권설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
후자는 말한다.
"생동하는 세대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인 교양에 일보라도 낙오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로 규정할 것은 못 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의 좋다고나 할까?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이 그 통폐요, '안광이 지배를 철함'이 후자의 지론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 '다'와 '정'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하나마 '박이정' 석 자를 표어로 삼아야 하겠다. '박'과 '정은 차라리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의 기념을 궁극적으로 초극하여야 할 것이다. 소인의 다음 시구는 면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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