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 김시습(1435~1493)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작품인 '금오신화'의 김시습은 강릉의 구족으로써, 세종17년(1435) 서울 반궁 북쪽에서 충순위 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8개월만에 한자를 보고 그 뜻을 알앗다고 하며, 5세가 될대까지는 '소학', '대학', '중용', '논어'등 사서를 배웠고, 한시를 지어 신동의 칭호를 얻었다고 했으니,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던가를 잘 알 수있다. 깁시습이 신동이란 소문을 들으신 세종대왕께서 지사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에 김시습을 불러 들여 그 허실을 시험해 모라고 하였다고 하며, 친히 김시습을 불러 보시고 삼각 산시를 짓게 하시고, 칭찬 끝에 명주 50필을 하사하시면서 직접 가지고 나가라 하여 그 의량을 보고자 하셨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시습이 '상유양양서'에다 언급해 놓았고, 그가 평생토록 세종대왕을 추모해마지 낳았다는 것을 볼 때 사실이었다고 보아야하겠다.
김시습은 13세 되는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당대의 석학인 김반, 윤상 등에게 사사하다가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 본향인 강릉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마치고 17세 되는 해에 상경하여 경저를 지키고 있다가, 단종와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베푼 증광시란 과거에 응시했으나, 문명을 천하에 덜쳤던 그 로서도 낙방했다고 하니, 과거운은 없었던거 같다. 그리하여 더 수학하기 위하여 삼각산 중흥사에 올라가 독서하고 있던중, 21세가 되는 해에 수양 대군이 단종왕을 폐위시키고 위를 찬탈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는 대성 통곡하여, 읽고 있던 유서를 불사르고, 입고 있던 유복을 찢어버리고, 광인으로 자처하고 승복을 입고 방랑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김시습의 일생이 방랑으로 끝나고,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로 처신한 동기는 어떠한 이유보다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수없다.
20세부터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고 59세로 일생을 마칠대가지 삼천리 강산을 두루 다니면서 독서, 저술, 독경, 참선, 작시, 음주, 금기, 제매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상과 같은 생애를 보내다가 30년대에 경주에 있는 금오산에 들어가 은거 하면서 중국인 소설인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금오신화'를 썼으나 세상에 공포하지 않고, 석실에다 감추고 놓고서는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 것을 보면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지엇음을 짐작할수 있다. 옛사람으로서 '금오신화'를 본사람이 김안로와 이황밖에 없었고, 임진란 이후에는 전혀 본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임진란 때 왜병이 가지고 가서 우리나라 효종째 일본에서 간행하였고, 1927년 이르러 육당 최남선이 '계명'지 제19호에다 일본판을 전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금오신화'는 5편으로 되어 있는 단편 소설집으로서 한문으로 씌어져 있다. 첫 번째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등이 그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 대하여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을 전라도로 설정하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작가가 경주 금오산으로 들어가지 이전에, 이미 호남의 유람에서 남원을 찾아 광한루도 올랐고, 또 만복사도 찾아보았던 인사을 이 작품의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주인공으로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늦게까지 장가를 들지 못하공있는 양생이란 노총각을 등장시켰다. 양씨 성은 남원의 대성이다. 이와같이 작자는 현실적인 배경과 인물을 설정하고, 플롯으로서 양생이 2년 전의 왜구에 죽은 최처자의 환신을 만나 사랑을 속삭이다는 인괴교환 설화를 결구해 놓았다. 양생이 만복사의 부처님 앞에가서 아름다운 짝을 점지해 달라고 발원하는 것은 불교적인 발상이다. 불보살에 대한 영원을 믿고 있는 작자로는 당연한 발원이라 하겠다. 그런데 양생이 저포놀이를 부처님과 하여 그 승부에 따라 가우를 얻고자 한 저포놀이는 작자가 좋아햇던 놀이의 하나이다. 여주인공 최씨가 난리를 만나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자살했다고 하는 왜구는,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까지 남쪽지방을 수 없이 약탈했던 일본의 해적들로서, 신라의 문무왕은 죽어도 동해 용이 되어 신라르 왜구로부터 보호하겠다고 하였을 정도로 우리나라를 괴롭혔다. 여주인공 최씨가 왜구를 만나 수절하려고 자살햇다고 한 것도, 플롯에다 현실성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용의 주도한 구상이다.
이 작품의 결미는 최씨가 양생과 3일간의 사랑을 속상이고는, 미로소 자기 신분을 밝혀 2년전 왜구로 해서 수절하려고 자살했음을 고백하며, 이별연을 베풀어 주고는 사라졌다가 이튿날 보련사에서 양생을 다시 만나 부모들이 차려주는 침식을 같이하고는 저승으로 돌아갔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와같은 결미는 다른 인괴교환 설화와도 같으나, 양생이 절에가서 명복을 비는 재를 올린 지 셋째 날 밤에 그 여인이 꿈에 나타나 "당신도 정성으로 타국에가서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유명을 달리했으나 감사하지 않을수 없으며, 당신도 다시 정업을 닦아 윤회를 벗어나소서."하며 일러주는 말을 보면, 이작품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가지고 긑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불교적인 영험사상을 발단으로 하고, 또 불교적인 윤회사상으로 결미해놓은 불교적인 종교 소설의 주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설정은 작자가 지니고 있었던 불교 사상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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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원부에 양시 성을 가진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는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고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살고 있엇다. 그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때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여 꽃이 활짝 피어서 마치 백옥나무에 은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서생은 언제나 달밤이면 그 나무 밑을 거닐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곤했다. 읊기를 마치니 별안간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좋은 배필을 얻고자 할진댄 그 무엇 근심할것이 있으리." 서생은 그소리를 듣고서 속으로 기뻐했다. 이튿날이 바로 3월 24일 이었다. 이 고을에는 이날이 되면 만복사에 가서 등불을 켜고 복을 비는 풍습이 있엇는데, 청춘남녀들이 많이 몰려가서 각기 소원을 비는것이었다. 해가 저물어 저녁 불공이 끝나자 사람들이 드문 틈을 타서 서생은 소매속에 저포를 품고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는 저포를 던지기 전에 소원을 말씀드렸다.
"제가 오늘 부처님을 보시고 저포놀이를 할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불공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지시거든 아름다운 배필을 구하셔서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빌기를 마치고 나서 저포를 던지니 뜻대로 서생이 이겼다. 그는 곧 부처님 앞에 꿇어 앉아서 말씀을 드렸다.
"인연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속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불좌 밑에 숨어서 약속한 배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후에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나는데, 나이는 열 대여섯 가량이 되어 보였다. 머리를 두 가닥으로 갈라서 쪽지고 개끗한 차림을 했는데, 얼굴과 태도가 흡사 하늘나라의 선녀와 같았으니 바라볼수록 엄전했다. 그녀는 고운 손으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불을 켜고, 향로에 향은 꽂은 후 세 번절하고는 꿇어앉아 한숨을 짓고 탄식하며 말했다.
"인생인 박명한들 어찌 나 같을수 있을까?"
아가씨는 품 속에서 축원문을 꺼내더니 불탁위에 얹어 놓았다. 그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있엇다.
"OO고을 OO마을에사는소녀 OO는 삼가 부처님께 사룁니다. 지난번 변방의 방비가 부너져 왜구가 침범해와, 싸움은 눈앞에서 치열했고 봉화는 한해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왜적이 집을 불사르고 백성을 사로잡아 갔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도망해 가니 친척과 노복들은 사방을 흩어졌습니다. 저는 가냘픈 몸으로 멀리는 피난가지 못해 깊숙한 골방으로 숨어들어 끝내 굳건히 정절을 지키고 벗어난 행실을 저지르지 않고서 난리의 화를 면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여자로서의 수절함을 그르치지 않았다고 하여 한적한 곳으로 옮겨 잠시 초야에서 살게 해주셨는데 그것도 어느덧3년이나 외었슴니다. 저는 달 밝은 가을밤과 꽃피는 봄철을 상심으로 헛되이 지내고 뜬구름과 흐르는 물을 더불어 쓸쓸히 날을 보냈습니다. 그윽한 골짜기에 외로이 살면서 한평생의 박명을 한탄했고 꽃다운 밤을 혼자 보내면서 제홀로 살아감을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바뀌니 이제 혼잭마저 사라져 없어졌고,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반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마저 끓어질 듯 합니다. 자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제발 소녀를 불쌍히 여기시어 각별히 돌봐 주십시오, 사람의 한평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마련되어 있으며 선악의 응보는 피할수 없사오므로, 타고난 생명에 인연이 있을 것이오나 일찍이 배필을 정해 주시어 즐거움을 얻게 해 주심을 간절히 빌어 마지 않습니다."
여인은 축원을 마치고 나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때 서생은 불좌 밑에서 여인의 보습을 보고는 바음을 걷잡을수 없엇으므로 뛰쳐나가서 말을 건넸다.
"조금전에 부처님께 글월을 올리셨지뇨. 무슨 일 때문이십니까?"
그는 여인이 올린 글월의 사연을 읽어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헐렀다.
"아가씨는 어떤 분이십니까? 어째서 여기에 홀로 오셨습니까?" 여인은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무슨 의심나는 일이 있으십니까? 당신께서는 다만 아름다운 배필만 얻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꼭 서명을 물으셔야 합니까? 그렇게 당황해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때 만복사는 이미 허물어져서 승려들은 한편 구석징 방에 살고 있엇으며, 법당앞에는 다만 행랑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고 행랑이 끝난 곳에 좁다란 판자방 하나가 있었다. 서생이 슬그머니 여인을 유인해서 그것으로 들어가니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따랐다. 그들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밤은 깊어서 달이 동산에 떠올라 달 그림자가 창살에 비치었다.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입을 열어 물었다.
"누구냐? 시녀가 온 것이냐 아니냐?" "예, 접니다. 요즘 아가씨께서는 출타하시더라도 중문 밖을 더나가지 않으셨고 보행을 하시더라도 서너 걸음 이상 하시지 않으셨는데,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시더니 어찌 이곳가지 오셔서 이런 일이 있게 하셨습니까?" 여인은 말했다. "오늘일은 아마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한 분의 고운 님을 만나 백년 해로를 하기로 했다. 부처님꼐 알리지 않은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 하겠으나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기이한 이연이라 하겠다. 너는 집에가서 앉을 자리와 주과물을 가져오너라."
시녀는 분부에 따라 돌아갔다. 미구에 뜰에 술자리가 베풀어졌는데, 밤은 이미 사경이 되려고 했다. 시녀는 안석과 술상을 품위있게 펼쳐놓는데, 기구들이 모두 말쑥하며 무늬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술에서 나는 내가 강렬하게 풍겼다. 정녕 인간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서생은 비록 의심이 나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여인의 말씨와 웃음 소리가 맑고 고우며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했으므로 틀림없이 귀한 집 처녀가 담을 넘어온 것이려니 생각하고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여인은 술잔을 건네면서 시녀에게 노래를 불러 술을 권하게 하고는 서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는 옛 가곡을 그대로만 부릅니다. 제가 새로운 가사를 하나 지어서 술은 권해도 괜찮겠습니까?" 서생은 기뻐하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에 여인은 만강홍 곡조로 맞추어 가사를 지어 시녀에세 부르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여인은 수심에 잠겨 안색이 달라지면서 말했다.
"일찍이 봉래산에서는 약속을 어겼습니다마는, 오늘 이곳에서 옛 낭군을 다시 뵙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준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낭군께서 저를 멀리하여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끝내 낭군의 시중을 들까 하오며, 만일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영원히 멀리 떠나겠습니다."
서생은 이말을 들으니 한편 반가왔으나 또한 놀라면서 말했다.
"어찌 당신의 분부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대도 여인의 태도는 심상하지 않았으므로 서생은 그녀의 행동르 자새히 살펴보았다. 이때 달은 이미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었고 먼 마을에는 닭 울음 소리가 들여 왔으며 절 종소리가 처음으로 울려 오자 날이 바야흐로 새려 하였다. 여인은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자리를 거두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하자 곧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수 없었다. 여인은 서생에 말했다.
"인연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함께 저희 집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서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니 개들이 울타리 밑에서 짖고 있고 사람들은 길을 나다녔다. 그러나 길가는 사람들은 서생이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 물었다.
"서생은 어디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오." 서생은 대답했다. "마침 만복사에게 술에 취해 누워있다가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날이 새자 여인은 서생을 인도하여 깊은 숲을 해치고 가는데 이슬이 흠뻑 내려서 길을 찾을수 없었다. 서생은 여인에게 물었다.
"어찌 거처하는 곳이 이렇습니까?" 여인은 대답하였다. "홀로 사는 여인의 거처는 본디 이렇습니다."
여인은 다시 시경의 옛 시 한수를 외면서 농담을 걸었다. 두사람은 읊고 한바탕 웃고 나서 마침내 함께 개녕동으로 갔다. 다북쑥이 들을 덮고 가시나무가 공중에 늘어선 속에 집한채가 있는데 자그마한 것이 매우 화려했다. 여인의 인도에 따라 들어가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정돈되어 있는데 벌여놓은 품이 어젯밤과 같았다. 서생은 그곳에서 3일을 머물렀다. 즐거움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시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활한 태도가 없었고, 좌우에 진열된 그릇은 깨끗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서생에겐 그것들이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리란 생각도 들었으나 여인의 은근히 정에 끌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흘후 여인은 서생에게 말했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의 세상의 3년과 같습니다. 도련님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옛날의 살림살이를 돌보셔야 합니다."
드디어 이별의 잔치는 시작되었다. 서생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어쩌면 이별이 이렇게 빠릅니까?" 여인은 대답했다. "작별하더라도 다시 만나 평생의 소원을 다 풀수 있을 것입니다. 도련님이 누추한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것은 반드시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이웃 친척들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생은 말했다. "예, 좋겠습니다."
여인은 곧 시녀를 시키어 이웃 친척들에게 알렸다. 이날 모인 사람은 정, 오씨, 김씨, 류씨 등 여인인데, 모두 번영한 귀족집 따님으로서, 이 여인과 한 마을에 사는 친척들로서 성숙한 처녀들이었다. 성품이 온순하고 인자하며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고 또한 자질이 총명하며 문장에 능했다. 그들은 칠언 절구 네 수씩을 지어 서생을 전별해 주었다. 장씨는 태도와 인품이 갖추어진 여인인데, 곱게 쪽찐 머리채가 귀밑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내쉬어 즉흥시를 읊었다. 오씨는 쪽찐 머리에 요염하고도 엄전한 태도로 붓에 먹을 찍더니 앞에 읊은 시가 너무 음탕하다고 책망하면서 말했다.
"오늘의 모임에는 여러 말 할 것없이 다만 이 자리의 광경만 읊어야 할텐데, 어째서 마음의 회포를 털어놓아 우리말의 절조를 잃어야 할 것이며, 우리들의 소식을 인간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그녀는 낭량한 복소리로 시를 지어 읊었다.
류씨는 엷게 한 화장과 하얀옷이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법도가 있어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더니 방그레 웃으면서 시를 종이에 적었다. 여인은 류씨가 읊은 마지막 싯구의 사연에 감동되어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나도 또한 자획은 대강 분별할줄 아는데 나만 홀로 소감이 없겠습니까?" 그녀는 곧 시를 읊었다.
서생도 또한 글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그들의 시법이 깨끗하고 운치가 높으며 음운이 맑음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함을 마지 않았다. 그는 즉석에서 재빨리 시 한 장을 적어 회답했다. 잔치가 끝나자 다들 작별하게 되었다. 여인은 주발 하나를 내어 서생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일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모련사에서 음식을 대접받게 되어 있습니다. 낭군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저와 함께 절로 가셔서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 주십시오." 서생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튿날 서생은 여인이 시킨대로 주발을 쥐고 서서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과연 어떤 귀족 집안에서 딸의 대상을 치르기 위해 수레와 말을 길에 늘어 세우고서 보련사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대 길가에 한 서생이 주발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자, 종자가 주인게 말했다.
"우리집 아가씨 장례 때 무덤속에 묻었던 물건을 벌써 어떤 사람이 훔쳐서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은 말했다. "뭣?" "저서생이 가지고 있는 주발이 그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말을 서생에게로 다가 세워 물어 보았다. 서생은 그 전날 여인과 약속한 일을 그대로 일러주었다. 여인의 부모는 놀라고 의아해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슬하에 딸 하나가 있었네. 그런데 그 달이 왜구들의 난리때 싸움판에서 죽었어. 미처 정식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해서 미루어 오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네. 오늘이 벌써 대상날이라 절에서 재를 베풀어 명복이나 빌어 줄까 해서 가는 길일세. 자네가 약속을 지키려거든 내 딸을 기다라고 있다가 같이오게. 그리고 조금도 놀라지 말게."
말을 마치자 귀인은 먼저 보련사로 떠나갔다. 서생이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약속한 시각이 되자 과연 한 여인이 시비를 데리고 갸우뚱하면서 오는데 바로 그 여인이엇다. 그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절간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부처님게 예배를 드리더니 휜 휘장안으로 들어가는데 친척들과 승려들은 모두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다만 서생의 눈에 보일 뿐이었다. 여인이 서생에게 말했다.
"진지나 드십시오."
서생은 여인이 한 말을 그녀의 부모님께 아뢰었다. 부모는 그말을 시험해 보기 위해 밥을 같이 먹게 했더니 다만 수저 놀리는 소리만이 들린뿐이었으나, 인간이 벅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여인의 부모는 이에 경탄을 마지 않더니 서생에게 권하여 휘장 옆에서 함께 자게 했다. 그들의 얘기 소리가 밤중에 분명히 들려왔으나 사람들이 가만히 엿들으려 하면 갑자기 중지되곤 했다. 여인은 말했다.
"제 행동이 법도를 넘은 것은 저도 알고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시경와 서경을 읽었으므로 예의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시경의 건상장, 상서장에서 이른내용이 다 부끄러운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오나 다북쑥 우거진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 들판에 버림받은 몸이 되고 보니 사랑의 정서가 한번 일어나자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절로 가서 복을 빌고 부처님앞에서 향불을 피우면서 한평생의 박명을 스스로 탄식했더니 뜻밖에도 3세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검소하고 부지런한 아낙으로 도련님을 받들어 평생을 모시고자 했습니다만 애닯게도 업보는 비낄수 없어 저승으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즐거움을 채 다하지도 못했는데 슬픈 이별이 닥쳐왔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면, 구름과 비는 양대에서 떠나야 하고 저희들의 복을 빌러 온 이들과도 다 이곳에서 헤어져야 합니다. 이제 한번 가면 훗날을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정말 슬프고 화급하여 무어라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이윽고 영혼은 떠났다. 여인은 전송을 받을 때는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더니 문밖에 이르러서는 다만 은근히 소리만 들여왔다. 남은 소리는 점점사라지면서 목메어 우는 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게 되자 이것이 사실임을 알고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서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임을 알고는 더욱 슬픔을 느끼어 여인의 부모와 함게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여인의 부모는 서생에게 말햇다.
"은주발은 그대의 소용에 맡기겠네. 그리고 내 여식에게는 토지 몇백 이랑에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그것을 신표로 가지고 내 딸을 잊지 말아주게."
이튿날 서생은 고기와 술을 가지고 개녕동 옛 자취를 찾아갔다. 과연 시체를 임시로 안치한 무덤이 있었다. 서생은 제물을 차려 놓고 슬피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을 불사르고는 정식 장레를 지내었다. 그리고 제문을 지어 조상했다.
"오오 님이시여! 당신은 어릴때에 천품이 온순했고 커서는 얼굴이 깨끗했소. 모습은 서시와 같았고 시부는 숙진을 능가하였소. 스스로 규문밖에 나가지 않았고 언제나 가정의 교훈을 고이 받아왔었소. 난리를 당하고도 오히려 정조를 지켰으나 끝내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황량한 다북쑥에 몸을 의탁한채 홀로 살면서 피는꽃 밝은 달에 마음만 슬퍼했소. 봄날에 애끓는 두견새의 울음을 슬퍼했고 서리 내리는 가을엔 비단 부채의 무용함을 탄식했었소. 지난 하룻밤 당신과 만나 정을 바꾸었더니 유명은 비록 서로 달랐으나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하였소. 장차 백년을 같이 해로하려 했는데 어찌 하룻저녁에 이별이 있을줄 알았겠소. 님이시여! 당신은 응당 달나라에서 난새를 타는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를 내리는 낭자가 되리니, 당은 어둠침침해서 돌아볼수가 없을 것이요, 하늘은 아득해서 바라보기가 어렵겠소. 나는 집에 들어가도 그저 멍멍히 지냈고,밖에 나가도 아득하여 갈데 없는 몸이 되었소. 영혼 모신 휘장을 대하면 얼굴을 가리어 울게 되고, 좋은술을 따를 때엔 마음이 더욱 슬퍼지오. 요조한 그 모습은 눈에 삼삼하고 명랑한 음성은 들리는 듯하오. 슬프외다. 총명한 당신의 성품, 정밀한 당신의 기상. 몸은 미록 흩어졌을지라도 영혼만은 남아 있을 것이니 응당 내려와서 뜰에 오르시고 어쩌면 나타나서 곁에 있겠는지요. 비록 저승과 이승은 다를지라도 당신은 이 글월에 느낌이 있을 것이외다."
장례를 지낸후 서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토지와 가옥을 다 팔아 절간으로 가서 연달아 사흘 저녁을 재를 올렸더니, 여인이 공중에 나타나 서생을 부르며 말했다.
"저는 낭군의 은덕을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막혀있지만 낭군의 은덕에 깊이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낭군게서도 이제 다시 착한 업을 닦으시어 조와 함게 속세의 누를 벗어나게 하십시오. 서생은 그후 다시는 장가가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아갔다 하는데,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아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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