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부자간의 공기놀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거느리고 나온 총사령관은 이여송이다. 그 아우 이여매하고 같이 나왔는데, 이들의 선대는 조선사람으로 이 역시 장군인 이성량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집안은 조선계의 군벌 가문인 것이다. 그런 그가 평양서부터 왜군을 내리 몰아 물리쳤으니, 이제 승전고를 울리며 저희 나라로 돌아가야 하겠는데, 이 자가 병력을 거느린 채 서울 서북쪽 홍제원서 벽제관에 걸친 벌판에 진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엉뚱한 생각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나와 정부의 높은 분들을 고루 만나보고 나서 그러더란다.
“왜 한음 이덕형이로 임금을 삼지 그랬소?”
어찌 보면 선조대왕의 그릇이 크지 못하다는 얘기도 되지만, 남의 나라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 이 정도로 밖에 조선을 알지 못하는 그인지라,
“나도 조선의 핏줄이요, 이가 성이다. 본국에 돌아갈 것없이 여기 눌러앉아 임금 노릇해서 안될 것이 없지.”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앉은 생각은 이것이다. 사실 그가 자기 뜻을 펴려고 했다면, 당시 조선에서는 그것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하루는 진지안의 사령부 장막 안에 앉아 쉬는데, 밖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웬 조그만 소년 하나가 나귀를 타고 진지 안을 무인지경같이 누비고 다니는데, 어찌나 빠른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여송은 자기의 무예만 믿고 곧장 무장을 갖추고 천리준총 좋은 말에 높이 올랐다. 그리고는 먼지가 이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자기 수하의 여러 장수들이 앞뒤로 달려 들었으나, 소년은 참기름쟁이 모양 용하게도 그 사이를 뚫고 흙먼지를 일구며 달린다. 본시 진지란 격식 맞춰 배치하는 법이어서, 이곳을 침범당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초립동이 나귀 등에서 대장군이 직접 따라 붙는 것을 보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주 돌아보면서 고삐를 채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고놈이 탄 것은 조그만 당나귀인데 이여송이 채찍질해 몰아도 따라 잡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다른 군인은 다 지쳐 떨어지고 단둘이 벌판을 가로질러 어떤 험한 바위산 기슭에 당도하였는데, 훤하게 트인 잔디밭 곁의 오막살이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이여송도 숨을 헐떡이며 그 앞에서 내렸다. 말발굽 소리와 말의 코 푸는 소리를 들었는지 오막살이의 방문이 열리며 하얀 할아버지가 내다본다.
“어서 들어오시오.”
이여송이 코를 벌름거리고 숨을 헐떡이며 자기가 수모당한 것을 얘기했더니 노인은 차분히 말한다.
“그랬어요? 고놈이 또 까불었구먼! 아들 셋 중에 그놈이 막내인데, 툭하면 나아가 일을 저질러서 골치거리라, 내 오래 전부터 없애 버리려던 참이니 오늘 장군 손을 빌어서 처치합시다. 고놈이 그래도 아비 말은 거역치 않아 녀석더러 물 좀 떠오라고 그럴 터이니 방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리치시오. 그러면 나도 한시를 잊겠소이다.”
이여송이 칼을 뽑아 추켜들어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아버지가 소리쳤다.
“얘! 거 물 한 그릇 떠온!”
“네!”
문이 열리며 소년이 들어서기에 분명히 내리쳤는데, 칼 쥔 손에는 반응이 없고, 소년은 찰랑찰랑 담긴 물그릇을 고스란히 든 채 칼등 위에 동그마니 올라서 있지 않은가? 등골이 싸늘해진 이여송은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른께서 무슨 일로 저를 예까지 부르셨습니까?”
노인은 대답않고 소년더러 일렀다.
“형들 다 데리고 동산으로 나오너라. 장군께 우리 공기 노는거나 보여드리자.”
잔디로 덮인 펀더기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 뒷간채만큼씩이나한 바위를 제각기 손으로 들어서 높이 던지고, 그것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 되던지며 노는데, 바위 날아가는 소리가 귓뿌리에서 윙윙 한다.
“그만들 쉬어라. 장군! 애들 노는 건 저 정도인데, 이것을 가지고 노는 놈은 아직 없구려! 내가 한번 던져 볼까?”
그러면서 연자매만한 산같은 바위를 이리궁굴 저리궁굴 굴려보다 앙 하고 용을 쓰며 추켜 던졌는데 하늘 파총으로 날아올라 흰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가 가물가물... 다시는 내려져 올 기색이 없다. 개구락지 모양 넙죽 엎드려 벌벌 떠는 이여송을 내려다 보며 노인은 차분히 타일렀다.
“외람된 생각 말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거라. 이 나라의 주인은 하늘에 매었어. 자, 그럼 어서...”
이여송이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 부자와 오막살이는 흔적도 없고, 때마침 서쪽하늘을 물들인 노을을 받아 북한산의 백운, 만경, 인수 세 봉우리의 모습은 의젓하고 우람하기만 하였다. 얘기꾼은 여기서 잇달아 덧붙인다. 공기를 놀아서 이여송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세 아들은 삼각산의 신령들이고, 공기돌을 치뜨려 놀라게한 하얀 노인은 백두산의 신령이라고 말이다. 워낙 터무니 없는 얘기라 정말로 믿을 이는 없겠지만, 역사적 사실로도 이여송은 서울을 점령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 해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개성 하면 지척같이 드나들던 곳인데, 그곳 선죽교에 가면 정몽주가 흘렸다는 핏자국이 있어, 물을 떠다 끼얹으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저만치 끝에 얹힌 석재의 아랫면에도 역시 그런 무늬가 있다. 양주동 박사가 학생 때, 거길 갔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선생님, 여기 이것도 핏자국이라고 해야 할까요?” 했더니 인솔한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글에 쓴 것이 있다.
“붉은 무늬를 꼭 핏자국이 아니라고 해서 좋을 것이 무어냐?”
위의 얘기도 그렇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존심을 키워줄 만한 전설쯤은 있어야 하고, 또 그래야 이 땅에서 살 맛이 나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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