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을 아는 대감
청풍 김씨에 호는 잠곡, 육이라 하는 명재상이 있었다. 선조 13년에 나 신동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자란 그는 소년시절에 임진왜란을 겪고 25세에 소과에 급제,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여 대과 초시까지 치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며부터 국사가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는, 가평땅 잠곡 청덕동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다. 몸소 밭 갈고 나무장사, 숯장사에 안하는 일 없이 어렵게 지내는 중에,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귀빈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선조대왕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이 찾아든 것이다. 명재상이요, 문장가인 상촌 신흠의 아들로 그가 부마로 뽑혔을 때는 모두 장래의 영의정감 하나 버렸다고 개탄하였다. 왕의 사위는 의빈이라 하여 벼슬을 못하는 규정이 있던 때문이다. 과거를 해도 의당 장원급제할 것을 못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선조대왕이 꼭 할 장원을 못했으니 장원은 네 손으로 뽑으라고 시관을 시켜주기까지 하였다는 당대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국사는 날로 글러만 가고 마음을 잡을 길 없자, 바람도 쏘일 겸 뜻 맞는 친구를 찾아 회포나 풀어 보자고 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마침 동네 소를 빌어다 밭을 갈고 있는 중이라 일을 중간에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님과 만나지 않을 수도 없어 주인이 쟁기질하며 가는대로 손님은 밭두둑을 따라 오고 가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한 뙈기를 다 갈고 났을 때는 밭두둑에 빤질빤질하게 길이 났더라는 얘기다. 소를 떼어서 아이를 불러 돌려보내고 나서야 둘이는 손을 잡고 집이라고 돌아왔는데, 이게 글자 그대로 게딱지 같은 초가삼간이라, 방이 아래웃칸, 부엌이 하나, 아랫칸은 안방, 웃칸은 사랑으로 쓰는 그런 집이다.
“잠깐 앉아 계십시오.”
한참 만에 주인이 들어오는데, 돼지고기 한 덩이를 삶아 건져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도마에 얹어 식칼 곁들어 들여놓고 막걸리가 한 방구리, 거기에 쫑구라기가 하나. 그런 것을 주섬주섬...
“산중이라 뭐 별 것이 있어야죠.”
둘이는 고기를 일변 썰어 소금에 찍어 안주삼아 술을 나누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동양위는 놀랐다. 이런 뛰어난 경륜과 포부를 가진 분이 당대에 또 누가 있으랴? 그렇기로 살림이 이렇게 규모 없을 수가... 그러는데 아랫칸에서 계속 신음소리가 들려와 둘의 얘기는 잠시 중단이 되었다.
“대감! 내 잠깐 다녀와야겠소이다.”
그리고 안방으로 내려 갔는데 잠깐 있더니,
“응애! 응애!”
이런 일이 세상에 있나? 그런 줄도 모르고... 동양위는 그만 가슴이 성큼하였다. 한참 만에야 주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들어선다.
“대감이 오시자 집에서 아들을 낳소이다그랴! 내 삼갈라 뉘어놓고 동네 할멈 하나 불러 첫국밥 지으라고 일러 놨으니, 우리 그것 같이 들고 주무십시다.”
손님은 겹치고 겹친 감격에 주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잠곡! 이거 우연한 인연이 아니니 우리 사돈 맺읍시다. 집에 난지 얼마 안되는 딸년이 하나 있어요. 고것하고 댁의 아기하고...”
주인도 지기상합하는 이 좋은 친구의 제의에 쾌히 응하며 술을 채웠다.
“자! 그럼 우리 사돈끼리...”
당시 잠곡은 37세로 딸만 둘 있고 아들은 하나 낳았다가 실패하여 이번 아기가 맏아들인 셈이었다. 이렇게 시골에 처박혀 지내는 사이, 44세 되던 해 인조반정으로 세상은 바로 섰다. 그래 즉시 상경한 그는 이듬해 과거에 장원하고 벼슬길이 트이어, 내외요직을 두루 거쳐 70세에 우의정, 72세에 영의정까지 올라, 효종 9년 79세로 천수를 다하기까지 정성을 다해 국사에 진췌하였다.
국민의 실생활을 중시해 각종 현물로 바치던 세공을 무명과 돈으로 통일한 대동법을 창안해 실시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며, 민생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실학의 실마리를 풀어, 학문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러한 그가 회갑 때의 얘기가 하나 있다.
벼슬은 아직 승지 지위에 있었고, 번화한 것을 몹시 싫어해, 익구성만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허하게 살고자 노력하던 그의 처신인지라 검소하게 차린다 했지만, 역시 덕망 있는 분의 경사라, 평소에 그를 숭앙하는 많은 하객이 모여들고, 사방에서 봉물이 들어왔다. 그런데 난처한 사람이 하나 있다. 맏며느님 신씨의 친정에서는 부조는커녕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 않는다. 그래 잔치 치르는 북새통에서도 무슨 죄나 지은 것 모양 기를 펴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는데 다 저녁때 손님도 거의 흩어질 무렵 하인이 하나 뛰어들어오며 외친다.
“저기 저, 동양위 대감 납십니다.”
지위에 걸맞는 좋은 옷에 근감한 행차가 아니다. 수수한 베 도포에 미투리 신고 하인에게 무얼 한짐 지워가지고 들어선다. 주인 영감과 수인사를 나눈 뒤
“얘! 그거 들여오너라.”
모두들 보니 큼직한 통돼지 삶은 것 하나에 막걸리가 한 장군이다.
“우리가 이런 술과 안주로 교분을 맺었으니, 오늘도 이것이라야 뜻이 있지요. 자! 만수무강하시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도 골고루 나눠주었으니 그날 그것 받아 먹은 것을 두고 두고 생광으로들 여겼더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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