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씀씀이는 어질고 착해야
한국사에 관해 얘기하자면 꼭 외워두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무슨 왕대에...`하면 대충 어느 연대쯤인 것은 판단이 가야 하는 건데 앞뒤 왕의 존호를 대고 서력으로 연대를 맞추고해야 이해가 간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 전
`세`자가 두 번 나오는데 먼저 어른이 세종, 나중 분이 세조며,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났고, 선조 때는 임진란, 인조 때는 병자호란을 치뤄야 했다. 순자가 두 번 나오는데 먼저 분은 순조, 뒤의 분은 맨 나중 빈 자리를 지키다 물러난 순종이시다. 셋째줄의 현종대왕 아버지가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온 효종이시고, 아드님이 당파 싸움에 휘말리어 장희빈의 파란을 겪은 숙종인데 비해, 현종대왕은 15년 동안 비교적 무풍지대에 왕위에 있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간 분이다. 그 어른이 아직 세자로 계셨을 때 일이다.
누가 새끼곰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쳐서 대궐 뜰에 놓아두고 길렀는데, 이놈이 미련하기는커녕 사람을 따르고 재롱이 여간 아니다. 본시 산간지대에서는 곰을 어려서부터 데려다 길러, 방아를 찧거나 장작을 패게 하는 등 일을 가르쳐서 부리기도 한다는 것인데, 평화로운 환경에서 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받다보니 대견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본성은 속일 수 없는 것이어서 무럭무럭 자라나 뼈대가 굳어져 가고, 때로 성을 내어 이를 드러내 보이든지 하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래 주위에서는 귀한 어른들을 모신 뜰안에서 자칫 무슨 사고라도 내든지 하면 큰일 아니냐고 소리없이 처분해 없애자는 공론이 돌았다. 이것을 풍편에 전해 듣고 세자는 그러시는 것이다.
“어려서야 귀염도 받겠지만, 자라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여지껏 아껴 기르던 것을 어찌 차마 그런단 말이냐? 사고만 안내면 되는 것이니, 저 살던 고장에서 마음껏 뛰놀게 깊은 산중에다 풀어 놓아 주려무나.”
신하들은 땅에 엎디어 인자하신 처분에 눈물을 흘리며 감복하였다.
“지당하신 분부인 줄로 아뢰오.”
그리고는 이 어른이 왕위에 오르시면, 그 타고 난 성품대로 자비로운 정치를 하실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지만, 어머님의 사랑을 모르며, 구중궁궐의 눈치꾸러기로 자란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대왕을 모시고 대궐 후원을 거닐었을 때 얘기다. 이 역시 놓아 먹이는 사슴이 아마도 평화롭게 기른 때문이라 무척 사람을 따라서 콧등을 긁어주면 좋아할 정도로 길들었는데, 그중의 한 놈이 신방등을 핥았더란다. 가만 두고보아도 좋고, 싫으면 발을 빼면 될 것을 세자는 짜증스럽게 그놈의 얼굴을 연거푸 찼다. 부왕이신 성종은 장차 만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할 귀한 신분에 있으면서, 그러면 못쓰는 거라고, 이 역시 그냥 타이른게 아니라 좀 따끔하게 꾸지람을 하셨던 모양이다.
훤칠한 키에 신하를 모아 잔치 열기를 좋아했고, 건강을 해쳐 피를 토혈하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하루저녁도 여색을 가까이 않은 날이 없다던 풍류대왕 성종께서 무절제한 생활이 화근이 되어 38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버렸을 때, 세자는 아바마마의 승하에 눈물을 흘리긴커녕 활을 얹어 가지고 곧장 후원부터 찾았다. 그러고는 그때 그 사슴을 찾아내 한 살에 쏘아 죽이는 것으로 첫 공사를 삼았다니 옮기기조차 끔찍한 얘기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한비자가 쓴 책 <설림>에 이런 얘기가 실려서 전한다. 한창 나라 안이 어지럽던 전국시대의 한 조그만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맹손이라는 노나라의 군주가 사냥을 나갔다가 예쁜 아기사슴을 한 마리 붙잡았다. 아마도 몰이꾼들의 함성에 겁을 집어 먹은 어미사슴이 저도 모르게 내달려 가버려, 아기사슴이 혼자 아장아장 나섰다가 눈에 띈 모양이다. 맹손은 부하가 안고 온 아기사슴의 초롱초롱한 눈매를 보자 별다른 생각없이 전서파라는 부하에게 일렀다.
“저것 좀 네 수레에 실어 가지고 돌아가자.”
궁전에 돌아 오는 길로 진서파를 불러 그 아기사슴을 바치라고 했더니,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놓아 주었으니 죽이시더라도 그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뭐야? 제멋대로 놓아줘?”
“예! 어미가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오며 하도 애처롭게 울어대기에 그만...”
“집어쳐라 이놈, 누가 널더러 인정 베풀라더냐?”
그는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 집에서 근신하고 있는데, 몇 달이 지나 소명이 내려서 들어갔더니 벼슬을 높여 공자의 보호역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곁의 사람이 간하듯이 그랬다.
“먼저 제멋대로 사슴을 놓아 주었으니 벌받을 놈인데 오히려 중책을 맡기시다니 혹시 덜 생각하신 거나 아니온지?”
그에 대한 임금의 대답이 들을 만하다.
“사슴새끼도 차마 어쩌지 못하는 놈이니, 내 아들에게야 오죽 잘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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