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건진 조선의 의기남아
조선조 중기, 서울에 홍순언이라는 역관이 살았는데 중국을 드나들며 사신들 외교활동에 통역 일을 맡았다. 당시 법으로 이런 실무직은 상류층에선 하기를 꺼려해서, 특수계층에서나 맡아 했는데, 서울 복판 청계천을 중심으로 많이 살아서 흔이 중인라고들 불렀다. 말이 역관이지, 직접 외국인을 상대하여 교섭하는 직책이었던 때문에, 혀끝하나 놀리기에 따라. 하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무역에 관여해 욕 안먹고도 상당한 재산을 이룰 수 있었던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누구나 윤기가 돌았다. 그 홍역관이 한번은 사신을 모시고 중국엘 갔는데, 공식적인 임무를 마치고 시간이 나자 객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래 요새로 치면 나이트클럽을 찾아나섰는데, 그곳 홍등가의 풍습대로, 매파들이 나와서 손님을 끌었다.
“따아런!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냥 예사로 들었더니, 뒤따르는 말이 솔깃하다.
“하루저녁 모시는데 xx금인데, 그 길로 일생을 바치겠다는 군입쇼.”
호기심에 따라 들어갔더니 그야말로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같은 처녀인데, 그냥 양갓집 규수라기보다 사뭇 고상하게 귀티가 난다. 물론 말이야 유창하게 통하는 사이라, 조용히 사정을 물었더니 딱하기 이를 데 없다. 벼슬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북경 와 살았는데, 갑자기 자리를 잃고 이내 돌아가셔서, 고향인 강남으로 운구해 모시고 싶으나, 워낙 청백하게 지내셔서 그럴 여축도 없고...... 생각다 못해 이곳에 나와서 자기 몸을 팔아 그것으로 경비를 충당하려고 터무니 없는 고가를 불렀으니 들어만 주신다면 그길로 일생을 모시겠노라는 얘기였다. 홍순언은 의기남아다. 이 정경을 보고 어떻게 돌아서겠는가?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던져 아가씨를 구렁에서 건져 주었다. 그리곤 손목 한번 안 쥐어 보고, 그냥 돌아서려 하는데 처녀가 붙들고 매달린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어디 계신 누구이신 줄이나 일러 주시면, 일생동안 은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딸로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이.”
그 순정에 감동해, 나는 조선인 아무개노라 하고 휘적휘적 대문을 나섰다. 그것이 사재였는지 공금이었는지 그 많은 금액을 보충하려면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일설에는 공금을 유용해 쓴 죄로 옥에 갇혔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로, 중국 들어갔다 나온 동료 역관들의 말이 국경을 들어서며부터 이번 행보에 홍대인은 안왔느냐고 자꾸만 묻더라는 것이다. `이상한 일도 있다` 했었는데, 다음 번 자기 차례가 돼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산해관을 들어서자 관원 하나가 다가와서 묻는다.
“이번 행보에 홍대인이 오셨는지요?”
내가 그라고 했더니, 그러냐고 무척 좋아하며 돌아갔는데, 북경에 도착해 급한 공사를 마치고 나자, 또 한사람이 객관으로 찾아와 전한다.
“석노야께서 대인을 기다린지 오래시외다.”
노야라면 저들이 말하는 극존칭으로, 우리말로 하면 `대감`에나 해당할 그런 호칭이다. 준비해 갖고 온 가마를 타고 따라 나섰더니, 얼마를 가다가 어떤 고대광실 크나큰 집 대문을 썩 들어서더니 몇겹 대문을 또 거쳐서 내려놓는다. 그곳 풍습에 익숙해서 잘 알지만 여기는 주인의 서재 아닌가? 점잖은 분이 나서며 손을 턱 잡더니
“내 아내가 대인을 뵙겠다는구려.”
“?”
“띠에띠에!”
“아니, 아버지라니?”
주렴 안으로부터 구르듯이 달려나와 맞는 귀부인을 보니, 아니 이거 홍등가에서 구해 준 그 아가씨 아닌가?
“내 아내에게 아버지면 당신은 내게 장인이오. 그리고 조선은 나의 처가이고.”
주인은 귀 알았으리, 요새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 석성이요, 아가씨는 홍역관의 도움으로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연줄이 닿아 그의 후취부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물론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 중에도 귀한 선물은 부인이 그동안 무늬를 놓아서 손수 짠 비단, 바로 보은단 여러필이다. 재생의 아버지 은혜를 보답코자 시간만 나면 짜서 모은 것이다.
국무위원을 사위로 두고 보니 그동안 정체됐던 양국간의 어려웠던 문제도 순화롭게 풀려서 국가의 체면도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도 안된다. 예고도 없이 왜군이 쳐들어와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200년 평화에 젖어온 조선 정부에서는 어쩔 방도가 없다. 물론 각처에서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지만, 나라의 운명이 달린 큰일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물은 요청된다. 중국관계는 물론 홍순언이 나서야 했고, 그는 수양딸 치마폭에 엎어져 울음으로 호소하였고, 병부상서의 설명으로 조선은 의기있는 사람이 사는 우방임을 생각해, 드디어 이여송이 10만 명의 원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며, 정세는 급전환을 보았다. 그 뒤의 임란 사정은 얘기 않는다. 다만 석성 그 자신은 일본과의 강화문제로 책임을 물어 옥에 갇히고 그 안에서 생을 마쳤으니, 처갓집 신세갚음치고는 너무나 애처로운 최후였다.
얘기는 바뀌어 그 홍순언이 살던 곳이 서울 복판 삼각동이었고, 담을 화초담으로 곱게 꾸몄대서 고운담골이라고 하였었는데, 광복 직후 정객들이 흔히 찾던 미장그릴은, 그 동네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일설에는 보은단골이라는 것이 원래 이름이라고 하나, 아무튼 설화치고는 가슴 흐뭇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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