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와 자린고비
옛날 애기를 모으다 보면 인색하기로 소문난 자린고비 얘기가 쏠쏠히 많은 데 놀란다. 굴비에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떠넣고 한 번씩 쳐다보면서 먹는데, 겸상해 먹던 아들이 두 번씩이나 쳐다봤다고 “임자식! 물켜려고 짜게 먹는다.” 했다는 류의 얘기들이다. 옛날 충주에 고비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비는 비자와 통하여 난다는 뜻이다. 성과 합치면 높이 난다는 뜻이 된다. 광해군 때 학자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오를 정도로 부자면서 인색하기로 조명이 난 사람이다. 본래 사람 사는 길이라는 것이 체면과 도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특히 유교의 예절을 바탕으로 발달한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제사를 제대로 받들고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함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인색하여 그것을 옳게 차리지 못했으니 소문은 좋지 않게 나고, 자연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아 지방을 붙이고 행사를 하는 때는, 제사를 마친 뒤 그 지방과 축문을 깨끗이 불살라 없애는 것이 도리인데, 얘기의 주인공은 그 종이 태워 없애는 것이 아까워서 책갈피 같은데 끼워 놓고 매년 꺼내 되풀이해 썼더란다. 그런데 옛날 백지는 다룰 적마다 피어 보푸라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고비옹은 닳지 말라고 들기름으로 결어놓고 썼으며, 그래서 별명지어 `결은 고비`라고 하던 것이, 변해서 오늘날은 `자린고비`니 `자리곱재기`니 하는 호칭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가 사는 고장으로 암행어사가 왔는데, 일대에 자자한 그의 소문을 듣고, 어느날 늦게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하룻밤 쉬어 가자고 했더니, 들라 한 것가지는 좋았으나 오래지 않아 저녁 상이 나온 것을 보니 기가 차다.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게 격식 갖춰 차리고 곁상에는 전골과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이것은 주인의 몫이다. 다음, 개다리 소반에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친지 뭔지 반찬이 딱 한 가지 놓여서 내왔는데 이것은 손님의 차지다.
“시장하실텐데 어서 드시지요.”
그래도 인사는 잊지 않고, 부잣집 영감님답게 반주 석 잔 따라 자시고, 이 반찬 저 반찬 곁들여 상의 것을 골고루 아주 복받게 잘도 먹어 나간다. 어사야 애시에 그러려고 길 떠난 사람이라 자기 몫으로 온것을 이 또한 달게 먹어 치웠다. 뜰에 내려 한참을 서성이고 들어서니까 하는 말이다.
“기름 아까운데 우리 일찌감치 자리에 듭시다.”
침구를 내려 푹신한 이부자리는 아랫칸에서 자신이 깔고, 개떡조각같은 이불을 내어주며,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웃칸에서 자라고 한다. `듣던 대로구나!` 하며 고신고신 잠을 못이루고 그렁저렁 한 밤중이 되었는데, 그 집 남자 하인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친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살쾡이가 와서 닭을 한 마리 물어갔사와요.”
“으음!”
신음하는 것같은 소리가 나더니 주인 영감이 일어나 앉는 눈치다. 이내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이부자리를 개어 얹고 나더니, 장지를 열며 웃칸의 손님을 부른다.
“손님! 손님! 잠시 일어나 얘기나 나눕시다.”
“...”
“공연히 그러지 마십시오. 점잖으신 어른이 그만큼 하대를 받았으면, 분해서라도 잠드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지못한 척 몸을 일으켰더니 손을 잡아 아랫칸으로 인도한다.
“여봐라, 거 나 먹는 식으로 한상 잘차려 내오너라.”
새삼스레 통성명하며 인사를 나눈 뒤에, 주인이 잔을 들어 권하며 자신의 성장과정을 털어놓는다.
“알거지나 진배없는 외로운 신세로 남의 집을 살다가 등짐장사로 나섰습지요. 착실하니 신용있게 하는 사이 차츰 돈을 만지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달걀을 하나 얻었습니다. 주인 집에 맡겨 깠더니 암평아리 하나 주어서 제 몫으로 키웠는데, 알이 열다섯 개 모였을 때 안겼더니, 하나를 더 낳아 보태서 열여섯 마리를 깠는데 모조리 암놈이지 뭡니까? 그대부터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겼아와요. `나는 하늘이 낸 놈이다.` 그래 객주에 들어서도 음식이랑 언제나 최고급으로만 시켜 먹으면서 작정을 했습니다. `어디 얼마나 느나 힘껏 해보자.` 천량은 날로 늘고 이외의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디다. 한집에 살면서도 저녁에 보셨듯이 나만 그렇게 먹었지. 평생을 같이 산 마누라에게도, 자식 새끼들에게도 손님께 드린 그 이상은 못 먹게 했사와요. `내가 누군데.` 물론 인근 동에도 고을 안에도 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방금 살쾡이가 닭을 한 마리 물어갔다지 않습니까? 내 일생동안 천량에 축이 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내 재산 느는 것도 이것이 고비라는 징조로 여겨집니다. 여태까지가 오르막길이었다면 이제부턴 내리막인데, 인심도 이제 그만 잃고 돈도 한번 본때있게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님! 외모로 보아도 손님께서는 학식도 유여하고 경륜도 깊으실 것입니다. 이놈에게 제 천량 유용하게 쓰는 법 좀 친절하게 지도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튿날로 소 잡고 돼지 잡아 동네 잔치를 한바탕 벌이고, 가족들에게도 새옷과 옳은 밥상이 차례왔으나, 낭비를 막기는 오히려 전보다 더하였다. 어사는 그의 재산목록을 살핀 뒤 갖가지 사업을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충주 갑부 고비옹은 고장의 자선사업가로 탈바꿈해, 다리도 놓고, 집회소도 지어주고, 빈민 구제의 기금도 세워주어,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나이 많아 죽을 때, 그의 손엔 한푼 재산도 남은 것이 없었다. 임종에 그는 자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유언하였다.
“나는 내 손으로 모아 내 복에 살고 나 할 일 하고 간다. 너희들도 제 손으로 벌어서 제 몫을 하며 살아다오.”
이런 유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널리 또 길이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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