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디오르, 브래스, 클라인, 지방시, 드라 렌타, 폰 프루스텐베르그, 카시니, 가르뎅, 로렌, 구찌. 역사는 오늘날의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록에 담고 있지만 지금까지 계속 왕족이나 귀족의 옷을 만들어온 재단사, 드레스 메이커, 재봉사들의 이름은 어떤 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패션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가장 일찍부터 프랑스와 밀라노는 유럽의 2대 패션의 중심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까지 중요한 것은 옷자체(모양, 세공, 색, 소재, 그리고 물론 그것을 입고 걸어다니는 사람)로서 디자이너가 나설 공간은 없었다. 디자이너 의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고 브랜드 현상의 어버이가 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로즈 베르탄. 그녀야말로 명성과 신망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얻어낸 최초의 디자이너다. 1700년대 중반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로즈 베르탄은 재능을 타고나긴 했지만 몇 차례의 행운을 만나지 못했다면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 베르탄은 1770년대 초에 파리에서 부인용 모자 가게 주인으로 출발한다. 그 가게의 멋진 모자는 샤르트레 공작 부인의 눈에 띄었고 부인은 베르탄의 후원자가 되어 그녀는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난다. 이 오스트리아 여왕은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는 드레스 모양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로즈 베르탄은, 나중에 프랑스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또 유명한 왕비가 되는 이 여성의 의상을 모두 위임받는다. 로즈가 프랑스 황태자비를 위해 만든 사치의 극치인 의상을 두고 여제는 마치 무대 여배우처럼 야하다고 슬퍼했으나, 프랑스 궁전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빼앗았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더욱 많은 시간과 돈을 패션에 쏟아 붓는다. 그 낭비가 국가적 스캔들까지 되었을 때 로즈 베르탄의 살롱은 파리 패션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로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주 두 번씩 만나 새로운 드레스를 만드는 한편 프랑스 대부분의 귀족,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왕비, 데본샤 공작 부인, 러시아 황후들의 의상까지 만들고 있었다.
로즈 베르탄의 의상에는 엄청난 가격이 붙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도 그 가격을 내리는 일, 의상의 수요를 줄이는 일, 왕비의 패션광적인 집착(이것이 체포의 방아쇠가 되었고 결국에는 단두대로 향하게 만든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을 억제하는 일 가운데 이루지 못했다. 1791년 6월 초에 남편인 앙투아네트는 로즈 베르탄에게 대량의 여행복을 시일 안에 빨리 맞추라고 주문을 한다. 그런데 이 주문이 발각되어 왕과 왕비가 국외 도주를 꾀하고 있다는 의심을 뒷받침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왕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1793년에 단두대에 선다. 로즈 베르탄은 프랑크푸르트로 도망갔고 그 후 런던으로 옮겨가 유럽과 아시아 귀족의 의상을 계속 디자인했으며 나폴레옹이 치세하던 1812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즈 베르탄의 세계적인 명성으로 사람들은 의상을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부티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만든 의상에 자신의 이름을 넣게 된다. 그리고 파리의 디자이너인 샤를르 윌트는 1846년에, 오늘날에는 저작권법에 따라 위조나 모조가 금지되어 있는 브랜드 의상을 패션 모델을 써서 알린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이렇게 해서 전속 디자이너가 있는 고급 양장점이 탄생한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태어나 커다란 이익을 낳는 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의 일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패션 쇼와 동시에 일어난 기성복 보급이 서로 어우러진 결과다. 오늘날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가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마음에 드는 옷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옛날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성복이 나타나서 편리해진 지는 아직 3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양질의 기성복이 탄생한 지는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필요할 때 전문 재봉사나 집안의 여인네들이 옷을 만들어 왔다. 첫 기성복은 남성용 양복이다. 헐렁하고 볼품없는 싸구려 옷이 1700년대 초 런던에서 팔리고 있었다. 모양을 존중하는 남성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손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재봉사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면서도, 몸에 맞지 않는 이 양복은 아무리 헐렁거리더라도 특별한 때를 위해 꼭 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구입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하층 계급의 시민이 귀족보다 훨씬 많았는데 대부분이 귀족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발하고 있었으므로 기성복 양복이 많이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기성 양복은 리버풀이나 더블린에서도 만들어졌다. 재봉사 길드는 이 유행을 억누르려고 기성복을 위법이라고 못박는 법률을 정하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의회는 그런 성가신 일에 말려드는 것을 피했고, 기성복을 사는 사람이 더욱 늘어나자 길드를 버리고 이 새로운 수요에 따르려는 재봉사의 수도 증가했다. 1770년대가 되자 기성복 선풍은 유럽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를 엄습한다. 재봉사들은 질도 좋고 몸에 맞는 양복을 만들려고 경쟁하게 된다. 게다가 양질의 기성복은 상류 계급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70년대 말기에는 프랑스의 6개 회사가 양복과 제2의 기성복인 코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트는 특히 어부들이 마음에 들어 했다. 항구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 옷을 몇 번씩 가봉하여 몸에 맞추어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옷은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모양이나 기호, 사이즈도 모르는 남이 만드는 옷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양이나 색이나 소재를 여러 가지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이상, 옷을 만드는 데 들이는 커다란 수공을 절약할 수 있는 일등의 기성옷에는 맞춤복에 없는 이점이 많이 있으므로 결국에는 여성들도 기성복의 커다란 매력에 지고 만다.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처음으로 커다란 기성복 제조 회사가 1824년에 파리에 탄생했는데 꽃가게와 비슷하다고 하여 라벨르 샤르디네르(아름다운 꽃바구니)라고 이름지었다. 거의 같은 무렵인 1830년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퍼드의 브룩스 브라더스가 신사용 기성복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두 가지 발명에 힘입어 기성복 제조업은 오늘날처럼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우선 재봉틀이 옷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옷을 손바느질 외의 방법으로 재봉한 것이다. 나아가 신사복, 부인복, 아동복 각각에 규격 사이즈를 채용함으로써 제2의 돌파구가 열린다.
1860년 무렵까지 천은 두 가지의 방법으로 사이즈에 맞도록 재단했다. 한 가지는 가지고 있는 옷과 똑같이 새로운 옷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옷을 풀어서 천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모슬린을 대략적인 형태로 재단하여 가봉하고 시착한 다음 다시 한 번 모양을 바로 잡는 작업을 몸에 딱 맞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그런 다음 완전하게 형태가 갖추어진 모슬린 형태를 실제로 옷을 만들 좀더 값비싼 천에 대고 베끼는 것이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은 언제나 고급복의 재봉에 채용되고 있었는데 이 방법은 아무리 봐도 대량 생산용은 아니었다. 1860년대에 업계는 규격 사이즈에 맞춘 '사이즈별 옷본'을 채용한다. 손님은 이제 기성복을 살 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몸에 대보고서 어느 것이 가장 잘 맞는 사이즈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정에서도 잡지나 가게의 카탈로그에 실린 것이나 통신 판매용 옷본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875년까지 옷본은 1년에 1천만 장 판매되었고, 옷본을 사용한 옷을 입는 사람을 멋쟁이로 부르게 되었다. 맞춤복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빅토리아 여왕마저 왕자를 위해서 당시 가장 인기가 높던 패털릭 옷본을 사용한 양복을 주문하고 있다. 기성복에는 어딘가 민주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이 모두 평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이건 거렁뱅이건 대부분의 사람이 한정된 몇 가지의 사이즈에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패션이 소수의 부자 계급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손쉬운 것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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