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누군가가 채워 주어야만 좋은 여성의 단추
현대의 안전핀은 위험하지 않도록 핀 끝이 금속 씌우개 속에 완전히 숨겨져 있다. 옛날 핀의 끝은 약간 튀어나온 모양으로 철사를 구부려서 고리를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핀을 U자형으로 구부리는 연구는 중부 유럽에서 약 3000년 전에 탄생했는데, 그때까지 직선이었던 핀으로는 최초의 커다란 진보였다. 이런 종류의 청동제 핀이 여러 가지 발굴되었다. 철이나 뼈로 만든 직선 핀은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이 사용했다. 수메르의 문헌을 보면 봉제용 바늘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대의 동굴 회화나 유물들을 조사하는 고고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옛날인 1만년쯤 전 사람들이 생선 등뼈를 이용해 만든, 맨 위 또는 중간에 실구멍이 있는 바늘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나 로마의 여성들은 옷을 어깨나 팔의 윗부분에서 피뷸라라는 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한가운데가 원으로 되어 있어 천을 단단히 조이는 데다가 뺄 때 스프링 작용을 하는 획기적인 핀이었다. 피뷸라는 현대의 안전핀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직선의 막대 모양 핀을 액세서리로 사용했다. 상아나 청동으로 만든 '스틸레트'라는 이 핀은 15센티미터에서 20센티미터 정도로 머리나 옷을 장식했다. 핀은 벨트와는 별도로 여전히 옷을 고정시키는 가장 소중한 도구로 남았다. 그리고 감거나 덮거나 하는 옷이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을 고정하는 핀도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1347년에 기록 된 어느 궁정의 목록에 따르면 프랑스 공주 한 명이 가진 의상 때문에 1만 2천 개의 핀이 납품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손으로 만든 핀은 가끔 품귀가 일었고 그 때문에 핀의 가격이 뛰었는데, 농노들에 대해 쓴 사료 속에는 봉건 영주가 핀을 살 돈이 필요하여 세금을 부과했다는 기록까지 볼 수 있다. 중세 말기에 영국 정부는 핀의 부족이나 남용, 매점매석에 대해 제동을 걸기 위해 핀 제조업자가 1년 가운데 특정한 날 외에는 핀을 팔 수 없도록 법률로 정했다. 정해진 날에는 신분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이(대부분 평소부터 핀을 사기 위한 '핀 머니'를 열심히 모았다) 핀 가게로 몰려가 꽤 값이 비쌌던 핀을 샀다. 대량 생산 덕택에 핀 가격이 급락하자 '핀 머니'라는 말도 가격이 내려가서 '마누라 용돈'이라는, 다시 말해 핀을 살 수 있는 정도의 하찮은 돈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렇게 복식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핀도 기능성이 뛰어난 단추의 등장으로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 핀은 단추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옷을 고정시키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귀중품이었던 것이다. 단추는 원래 옷을 고정하는 것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둥글고 평평한 보석과 비슷한 액세서리로 남녀 모두의 옷에 붙여졌다. 그리고 약 3500년 동안 단추는 순수한 장식품으로 머물러 있었다. 옷을 고정하는 것은 핀과 벨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초의 복식용 단추를 볼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000년으로, 고고학자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굴했다. 여러 가지 연체 동물의 껍질로 만들어진 그 단추는 원형이나 삼각형 모양으로 옷에 붙이기 위해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튜닉이나 토가, 망토 같은 옷의 장식으로 조개 단추를 브로치처럼 옷 위에 붙였다. 금박을 입히거나 보석을 박은 것도 많으며, 정교하게 조각한 상아나 뼈의 단추가 유럽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어떤 회화, 문헌, 의상의 단편을 보더라도 옛날의 재봉사가 단추와 단춧구멍을 맞출 연구를 한 것 같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추'라는 명사가 '단추를 끼우다'라는 동사로도 쓰인 것은 놀랍게도 13세기 후의 일이다. 옷을 단추로 고정시키는 습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서유럽에서 탄생했다. 넉넉하고 펄럭이는 형태였던 그때까지의 옷은 1200년대에 이르러 몸에 딱 맞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벨트만으로는 몸단장을 할 수 없었고 핀이 여러 개 필요했다. 그런데 핀은 금방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기 쉬웠다. 매다는 단추가 등장하자 비로소 사람들은, 날마다 옷을 입을 때 고정 도구를 찾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었다. 이때 단추와 단춧구멍이 사용된 또 하나의 이유는 옷의 소재와 관련이 있다. 1200년대의 의상에는 전보다 고급스럽고 섬세한 천을 사용했다. 그런데 옷감을 몇 번씩 핀이나 안전핀으로 꽂는 사이에 옷감이 찢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기능성이 뛰어난 현대의 단추가 등장한다. 그때까지 허비한 시간을 되찾기라고 하려는 듯 단추와 단춧구멍은 모든 옷 위에 나타난다. 그저 단추를 쭉 늘어놓기 위해 옷의 목부분부터 발목 부근까지 달기 시작한 것이다. 단추가 확실하게 단추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필요도 없는 소매나 다리 부분까지 일부러 길게 재단이 들어갔다. 여성용 드레스 한 벌에는 단추가 줄줄이 200개나 붙여져서 입고 벗는 것도 큰 일이 되었다. 잃어버린 핀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했다면, 이렇게 단추가 많이 달린 드레스도 결코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14세기와 15세기의 조각, 삽화, 회화들을 보면 단추 매니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추의 유행은 다음 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에 단추는 또다시 단춧구멍을 발명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금과 은으로 만든 것, 보석을 박은 것들이 장식적인 이유로 옷에 붙여졌다. 1520년에 프랑스 왕인 프랑소와 1세는 검은 벨벳 양복 한 벌에 붙이기 위해 1만 3천 4백 개의 금단추를 보석상에 주문했다. 그 양복은 영국 왕인 헨리 8세와의 회견 때 입기 위한 것이었다. 칼레 근처 크로스 오브 골드 전투장에서 열린, 허례와 과시로 가득찬 회견에서 프랑소와는 어떻게든 헨리와 손을 잡고 싶은 덧없는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는 반지와 똑같이 디자인된 자신의 보석 단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의 초상 화가인 한스 홀바인은, 단추가 달린 의상과 짝이 맞는 반지를 낀 헨리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시절 단추의 열기는 1980년대의 그것과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는 단추가 아니라 지퍼의 열기가 절정을 이루었다. 바지나 셔츠에 지퍼를 다는 일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지퍼가 달린 주머니, 지퍼로 소매나 발 부분의 위쪽까지 개폐식으로 만든 것, 지퍼가 달린 주머니 덮개, 그 밖에도 무수한 지퍼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붙여졌다. 남성 옷에는 단추가 오른쪽에, 여성 옷에는 왼쪽에 달린다. 단추가 달린 옷을 입은 인물의 초상화나 데생을 조사한 복식사가는 이 습관이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그 기원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남성은 궁중에서든, 여행중이든, 전쟁터에서든 옷을 자기 스스로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였으므로 양복 단추는 오른쪽에 붙이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당시에 무척 값이 비쌌던 단추를 옷에 붙일 수 있는 여성들은 의상 담당 하녀를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하녀들도 대부분 오른손잡이였으므로 마주보고 여주인에게 옷을 입히려면 단추와 단춧구멍이 반대로 되어 있으면 입히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봉사는 여성들의 희망에 따랐다. 그 뒤에도 이 습관은 변하지 않았으며 또한 바꾸자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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