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인류 최초의 거울은?
깨끗한 웅덩이의 잔잔한 수면이 인류 최초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3500년경 청동기 시대가 되자 금속을 닦아서 만든 거울이 사랑을 받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청동 거울을 단순한 나무나 상아 또는 금 손잡이에 끼웠다. 이집트인들은 동물이나 꽃, 새를 조각하여 디자인이 멋진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집트의 묘지에서 발견된 많은 거울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손잡이는 사람이 청동 거울을 머리 위로 받치고 있는 디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금속 거울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이 기술을 이집트에서 배웠다. 모세는 이동 신전을 위해 제식용의 커다란 대야를 만들 때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거울을 내놓도록 했고 그것을 '놋쇠 대야' '놋쇠 받침'이라고 했다. 기원전 328년에 그리스에 거울 가공 기술학교가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금속판의 반사면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모래로 닦는 정교한 기술을 배웠다. 그리스의 거울에는 원반형과 상자형 두 종류가 있었다. 원반형 거울은 표면이 깨끗이 닦였고 뒤에는 조각이나 부조 장식이 있었으며 테이블에 세울 수 있도록 다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상자형은 두 장의 원반형 거울이 조개처럼 닫히도록 만들어졌고 한 장은 깨끗이 닦은 것, 또 하나는 닦이지 않은 것으로 거울을 보호하는 뚜껑 역할을 했다. 거울 제조업은 에트루리아와 로마에서 크게 번창하여 땅에서 파낸 것이나 수입품 등 모든 금속을 닦아 냈다. 그렇지만 거울의 재료로는 은이 애용되었다. 은이 가지는 중간색이 얼굴의 메이크업 색조를 바꾸지 않고 비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경 금 거울이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대부호의 집에서는 하인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전용 금 거울을 요구할 정도였고, 많은 하인들은 임금의 일부로 거울을 지급 받았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중세까지 남녀 모두 선조가 사용한, 금속을 닦은 거울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1300년대에 들어서 화장대의 필수품인 이 거울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유리는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형틀이나 입으로 불어서 병이나 컵 또는 장식품으로 가공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300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의 유리를 부는 기능공에 의해 유리 거울이 탄생했다. 유리를 부는 기술은 예술의 극치였으며 기능공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유리를 불 만큼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유리 거울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다. 금속과 달리 유리는 모래로 닦아도 쉽게 반사면이 깨끗해지지 않았고, 형틀에 흘려 보내는 완전한 판유리를 만들 필요가 필요가 있었다. 이 기술이 처음에는 미숙했기 때문에 초기의 유리 거울은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지게 비추었다. 하지만 유리 거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다. 14세기의 베네치아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가 최고로 중요한 일이었다. 부유한 남성, 여성 모두 펜던트의 보석 대신 금줄에 유리 거울을 붙이고 보란 듯이 목에 걸고 다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실망할 정도로 심한 모습이라도 타인의 눈에 비친, 거울을 단 자신의 이미지는 틀림없이 품위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성은 도검의 손잡이에 작은 유리 거울을 박고 있었다. 왕족들은 상아나 은, 금으로 테두리를 한 유리 거울을 많이 수집했으나 실제로 사용하기보다는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거울은 기능보다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잘 비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거울의 질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1687년에 프랑스의 유리 부는 기술자였던 베르나르 페로가 아주 편편하고 찌그러짐이 없는 판유리의 제조법을 고안하여 특허를 땄다. 그러고 나서 완벽하게 비추는 유리 거울뿐만 아니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까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즐거움을 앗아간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용모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무시무시한 병인 천연두가 1600년대의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것이다. 한 번 휩쓸 때마다 몇 천 명이 픽픽 쓰러져 죽었고, 많은 사람의 얼굴에는 수두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보기 흉한 곰보가 되었다. 유럽인 대부분이 많든 적든 지저분한 곰보 자국 때문에 얼굴의 윤기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별이나 초승달, 하트 모양을 한 패치(patch ; 한 번에 열 개도 넘게 붙였다)가 곰보 자국에서 시선을 빼앗는 수단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패치는 검은 비단이나 빌로드로 눈가, 입가, 뺨, 이마, 목, 가슴에 정성스럽게 붙여졌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붙였다. 남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에는 실로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프랑스에서는 패치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곤충인 '파리' 라는 뜻으로 '무슈'라고 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여 여분용 패치 상자를 만찬회나 무도회에 갈 때 휴대했다. 패치 상자는 작고 얇았으며 뚜껑 안쪽에 작은 거울이 붙어 있었다. 현대 콤팩트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패치를 붙이는 일은 무언의(하지만 매우 알기 쉬운) 언어로까지 발전했다. 여성의 입가에 붙인 패치는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신호, 오른쪽 뺨은 기혼, 왼쪽 뺨은 약혼중임을 의미했고 눈가의 패치는 가슴에 숨긴 정열을 나타냈다.
1796년 의학적인 차원에서 패치의 필요성은 없어졌다. 영국의 한 시골 의사인 제너가 농촌의 여덟 살짜리 소년에게 가벼운 천연두라고 할 수 있는 우두를 접종했던 것이다.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우두 접종설을 실험한 것이다. 접종 후 곧이어 소년에게 가벼운 발진이 나타났다. 그것이 사라지자 제너는 더욱 위험한 천연두를 접종했다. 소년에게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면역이 생긴 것이다. 제너는 이 처치를 우두를 뜻하는 라틴어인 'vaccinia'에서 이름을 따 'vaccination(종두)'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두 접종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천연두는 사라졌고, 패치는 가리개용 필수품에서 멋부리는 화장용품으로 변해 갔다. 멋부리는 화장품인 패치에서 펜슬로 그리는 점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보석을 박은 패치 상자에는 딱딱한 파우더가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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