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허니문과 지금의 허니문은 의미가 아주 다르다. 지금의 허니문은 말할 것도 없이 결혼 생활의 전주곡이며 둘만의 행복한 격리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의 허니문 기간은 전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북유럽에서 약탈혼이 성행하고 있을 때 신부를 가까운 마을에서 약탈해 온 사나이는 그녀를 데리고 잠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랑의 들러리 이외의 누구에게도 거처를 알리지 않고 신부 가족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자기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 있었다. 이것이 민속학자가 말하는 허니문의 시작이다. 허니문이란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둘이 서로 사랑하여 맺어진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는 며칠이나 몇 주일씩 일하지 않고 행복에 잠기는 사치스러움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니문이라는 말도 역시 북유럽에서 있었던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신혼인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미드라고 불리는 꿀술을 매일 마셨다. 이 술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서기 433년부터 453년까지 훈족의 왕이었던 아티라는 서기 450년,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와 결혼했다. 아티라는 그 결혼 잔치에서 이 증류주를 먹어 보고는 너무 맛이 좋아 큰 잔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아티라는 이미 결혼한 그녀를 약탈하여 결혼하면서 로마 제국의 영토도 조금 떼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삼 년 후 다른 여성과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아티라는 미드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또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아니나다를까. 꿀술을 너무 많이 마신 아티라는 인사불성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허니문'의 허니(꿀)는 이 꿀술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문(달)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한다. 즉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언제까지나 신혼초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6,17세기 영국의 산문가나 시인들은 이 북유럽의 허니문 해석을 증거로 내세워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자주 결혼 생활에 비유했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것이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의미이다 보니 이혼의 역사 또한 결혼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정식 결혼이 없다면 정식 이혼도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결혼증명서는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의 엘판틴에 주재하고 있던 주둔병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파피루스에 아랍어로 쓰인 이 결혼증명서는 매우 간단하고 매정했다. 그것은 마치 매매증서와 같이 건강한 열네 살의 소녀를 소 여섯 마리와 교환한다고 적혀 있었다. 법률을 좋아했던 로마 시대에는 결혼증명서가 몇 페이지나 되는 복잡한 법률 문서로 변해버렸다. 거기에는 결혼 지참금의 액수라든가 이혼이나 사망시의 재산 분배에 대해서까지 빈틈없이 적혀 있다. 서기 1세기에 개정된 결혼증명서가 헤브루인에 의해 정식으로 채용되어 조금 바뀌었을 뿐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혼도 처음에는 되는 대로여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 아테네나 초기의 로마에서는 법적인 이혼 따위란 없고 남편 마음대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지방 관청에 들어가 이혼을 신청해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기각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7세기 말경, 앵글로 색슨인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되지도 않는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당시의 법률 문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내가 다음과 같은 요건에 하나라도 해당될 경우 남편은 이혼할 수 있다. 불임, 서툰 솜씨, 우둔, 짜증, 사치, 무례, 음주, 대식, 수다, 성급함." 이혼을 연구하고 있는 고대나 현대의 인류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저에서 일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합의에 의한 이혼이 많은 것은 모계사회이며 그곳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 숭앙되어 가정 내에서 모친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나 성적인 권리는 소위 혼인 비용을 지불해 남편이 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이혼이 남자측의 일방적인 편의로 행해지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