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10. 천생연분
도를 닦으려고 들어온 사범들은 도를 펼치기 위해 도장에서 숙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젊은 나이인지라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다. 연일 수많은 회원들을 만나 지도하고 이야기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간혹 사람이 귀찮아지면서도 정말 흉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이성친구를 바라는 마음 또한 여느 일반인 못지 않다. 일반적인 인식이 잘못되어 있어서 도를 닦는다고 하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특히 여자는 마로 여기며 수련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조물주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천지를 운행하게 하는 양대 축인 음과 양,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무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하고는 멀어지는 어리석음에 빠져드는 것이다. 수련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양기는 좋은 것이 음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선도의 본질은 수분이 아니라 조화다. 이기려고도 지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선도의 본질이거늘, 이것은 음기다, 저것은 양기다... 우루루 피하고 쫓아다니며 수련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짓거리이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마음가짐이지 않은가? 설사, 음기가 정녕 나쁜 것이라 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양기로 승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서 음기가 꽉 차 있으니 도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며 도장문을 아예 닫아버리는 행위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니 딱하기 그지없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사범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미팅을 주선했다. 아마 도화제 단체미팅은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 도장사범은 현재 교사로 승진해 있는 1기 사범들과 기생실무진(정식 실무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장에 숙식한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임)인 현재의 2기 사범들이었다. 당시 결혼해서 부산에 파견 나가 있던 의진 사범을 제외하고는 평생 도만 닦느라고 여자친구 하나 없이 수련만 하며 지내던 상태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하늘의 이치에 맞는 거야. 특히, 도를 전파하는 사범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부부관계, 자식을 낳아 키우게 되면 부자관계, 이 모든 인간적인 고민과 행복을 느껴 봐야만 인생을 알 수 있지. 다 내버리고 도를 닦는다고 도통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도는 생활 속에 있는 거야."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어, 당시 방송작가 일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후배들과 방송관계 여성동료들을 잘 알고 있던 내가 인원을 소집하게 되었다.
"어, 나다. 민선배야. 미팅 안 할래?" "좋지, 심심한데 잘 됐다. 근데, 괜찮은 사람들이우?" "그럼, 믿을 만한 사람들이지. 핫핫! 이 선배가 그 정도 보증도 못할 줄 알고?" "근데, 뭐하는 사람들이야?" "단전호흡 도장 사범들인데, 도 닦는 사람이야." "... 전화 끊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그래. 오빤데 너 미팅 한 번 안 해볼래?" "음... 오빠가 주선하는 거면 나가볼까? 뭐하는 사람들인데?" "그럼,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만나보면 너도 반할 거야." "근데, 오빠. 뭐하는 사람이냐니깐?" "뭐하는 사람이냐구? 단전호흡 도장 사범인데..." "어머! 갑자기 삐삐가 왔네. 오빠 다음에 얘기해? 안녕!" "..."
참으로 희한한 세상이다. 도를 닦는 것처럼 근본적이고 소중한 일이 없는데, 도를 닦는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이 되는지 전부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에서 펑크를 낼 수는 없는 일.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네 명의 여자를 구할 수 있었다. 학교후배면서 탤런트 일을 하고 있던 문윤선, 역시 학교후배로 연극배우를 하고 있던 후배, 방송작가로 데뷔할 수 있게 도와준 공로로 그리고 도닦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 승낙을 한 방송작가 한 명, 혼자 가기 쑥스럽다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나온 그 작가의 친구. 이렇게 도합 네 명의 여자후보가 선출이 되었다. 그런데 여자 수가 부족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 머릿수는 맞추어야 미팅이 성립이 되는 건데, 맞지가 않으니 누군가 희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서울 본원의 사범이 다섯 명. 한 명이 빠져줘야 하는데 누구에게 빠지라고 한단 말인가? 말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데 반가운 이야기가 들려 왔다.
"내가 빠지지 뭐."
가장 나이가 많은 해암 사형이 먼저 양보를 했다. 사실은 가장 먼저 장가를 가야 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젊은 후진들을 위해 먼저 발을 빼니, 신사도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니 어디서 만날 것인지도 문제였다. 예상들하고 있겠지만, 도화제의 정복은 초록색 트레이닝복이었다. 항상 도장에서 수련만 하고 지내는 사범 생활이다 보니 변변한 옷도 하나 없었고, 뻑적지근하게 놀 만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만남이란 것 자체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도리에 맞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여타 만남처럼 밖에서 무리할 것 없이, 아예 도장 내에서 차를 마시며 만남을 갖기로 했다. 혹시나 지루한 시간이 될까 걱정되어, 감천 사범이 여성멤버들의 사주를 봐주는 깜짝쇼도 준비를 했다. 감천은 도문에 들어오기 전에 사주와 역학 쪽으로 거의 통달을 한 상태여서 언제 어느 때라도 기회만 주어지면 직업을 바꾸어도 될 정도로 사주풀이에 능했던 것이다. 시간은 주마와 같이 흘러 어느덧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핫핫... 다들 준비 됐죠?" "..." "아니, 분위기들이 왜 이래요? 무슨 일들 있어요?"
다들 머쓱해 하는 분위기가 수상해서 캐물어 보니, 막상 미팅날이 다가오자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서로들 빠질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아니,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요..." 답답해하는 나에게 한마디씩들 던졌다. "사실 해암이 나가야 하는데, 해암이 빠지니 좀 그러네요. 내가 대신 빠질 테니 해암한테 나가라고 해요." "그거 뭐, 처음 보는 사람들 만나서 탐색전 하는 거, 영 분위기에 안 맞아서..." "도 닦는 놈이 여자는 무슨 여자?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참 희한한 일이었다. 그 많은 회원들 앞에 서서 수련지도를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 상담을 하고, 회원들에게 차를 내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마담 역할까지 하던 사람들이 고작 미팅 이야기에 슬슬 꼬리를 감추다니...
"세상에... 뭐, 맞선보는 자리유?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고 좋은 시간 가지면 되는 거지, 웬 부담들을 그렇게 가져요?"
참,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도장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든 흐름이 중요한 것이라, 자연적인 흐름에는 언제든 순응하지만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냄새가 날 때는 공연한 거부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생활이 몸에 배었다고나 할까?
"거... 이왕 하기로 한 거 딴 소리하지 말자구요."
청월이 드디어 한소리 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동조자가 나섰을 때 못을 박아둬야 뒷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 나는 먼저 나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후다닥... 약속시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순전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얼른 도장을 빠져나왔다. 나 또한 도 닦는 사람이라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미팅이나 소개팅 한 번 못 해보았을까? 모르는 여자를 처음 만나 직업은, 성격은... 이하 등등.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끌어가야 한다는 것의 그 부자연스러움. 그것은 그러한 분위기를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곤혹스러움이다. 하지만 오늘은 상관이 없다. 오늘 참가하는 여자들은 다 내가 아는 후배들이고, 나는 중매쟁이지 선보러 나온 선남선녀가 아닌 것이다.
"30분 후면 볼만하겠군? 핫핫..."
홀로 회심의 미소까지 지으며 나가보니, 선배와의 약속이어서 인지 벌써들 나와 있다.
"아니, 벌써들 나와 있네? 역시 선후배간의 도리를 다할 줄 아는군... 기특하다, 얘들아." "충성! 여기서 멀어요?" "아니, 금방이야, 걸어서 5분. 가자!"
혹시라도 도장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도장의 내부 구조에서부터 오늘 나오는 인물들의 프로필까지 사전정보를 미리 전해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벌써 도장에 도착했다.
"들어가자." "몇 층이에요?" "6층!" "6층? 아휴... 거기까지 어떻게 올라가? 와글와글..." "엘리베이터 있어. 씨이..."
도장에 올라가니 사범들은 이미 수련실에 들어가 있고 선생님이 현관에서 맞으셨다.
"안녕하세요? 이 아가씨들인가?" "네, 선생님(누군지 다 아시면서...). 아까 말한 한당 선생님이셔. 인사 드려라." "안녕하세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자." "재미있게들 놀다가요."
수련실로 들어가는 등뒤로 선생님의 애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저 분을 도통한 도인으로 볼 것인가? 그저 평범한 속인으로 볼 수밖에...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저 평범함과 숨김없는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진리와, 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과 위엄을.
"자... 이쪽으로 앉아라. 제가 얘기한 후배들이에요." "네, 선배님..." "아, 예...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자리가 정돈되고 서로 마주보는 자세가 정해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졌다. "..." "...아, 더워..." "..." "천장에 때아닌 파리가?" "앗... 파리?" "아, 신기하다... 저게 파리구나. 생전 처음 봐요." "..." "..."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선자인 내가 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갑자기 주변이 얼어붙으며 누군가 이 정적을 깨뜨려주길 바라는 모두의 열망이 느껴졌다.
"..." "..." "학학... 그럼, 얘기들 잘해요, 난 화장실에..."
도저히 참다못한 내가 화장실을 핑계 대며 일어서 빠지려고 했을 때였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수련실의 어색함이 절절히 가 닿았던지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 조그마한 변화에 모두의 얼굴엔 살았다...라는 안도의 한숨이 느껴졌다.
"도장에 와보니까 어때요?" "깨끗하고 정갈해서 좋네요. 단전호흡 하는 데라고 들었는데, 그게 몸에 좋은 건가요?" "좋지요. 특히 여성들 미용에 좋아요..."
요즘 신바람 건강법이 유행을 하고 있지만, 그날은 도화제 사범들 미팅날이 아니라 선생님의 여성을 위한 선도강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녹차란 어쩌구저쩌구..." "어머나, 세상에... 그렇구나." "전신의 기혈이, 경락이... 허허." "음..." "조식호흡이라는 것은... 핫핫." "악, 악!"
일순 분위기가 반전이 되며 도장 안이 화기애애해졌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어느새 분위기가 무르익어, 장소를 옮겨 노래방에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루루... 빠져나간 수련실에 홀로 앉아 뒷정리를 하고 있자니, 공연히 서글퍼졌다. 나는 무언가? 외로운 기러기떼에도 끼지 못한 길 잃은 철새 아닌가 말이다. 나도 언젠간 결혼을 해야할 테고, 한다면 분명히 짝이 있을 텐데... 갑자기 언젠가는 나타날 나의 짝이 보고 싶어졌다.
"선생님, 결혼하는 인연은 따로 있는 건가요?" "그렇지, 따로 있지.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내 연분인가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지. 그러나 결혼을 생각한다고 해서 결혼하게 되는 건 아니거든. 헤어지게 되면 그때서야 '연분이 아니었구나' 깨닫게 되는 거야." "그것을 미리 알 수 없다 해도 사실은 다 정해진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요?" "세 가지가 있어. 먼저 천생연분이 있지. 이것은 천상에서 사람으로 내려오면서 서로 결혼을 하자고 약속을 하고 내려오는 경우야. 가령, 내가 언제 어디에 가 있을 테니, 너는 그 때 시간 맞춰서 나와라! 그렇게 만나서 결혼을 하자고 약속을 하면, 그 장소에서 본인도 모르게 만나게 되고, 첫눈에 끌려서 교제를 시작하고 결혼을 하게 되거든?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생연분이야. 두 번째는 지상연분이야. 이건 말 그대로 지상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정을 키우는 경우이고, 세 번째가 전생연분으로, 이것은 전생에 부부인연 등을 맺었던 사람들이 이생에서도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거지." "누구나 천생연분이 있을 거 아닙니까?" "아니야, 천상에서 보기도 지겨운데 밑에서까지 결혼 하냐고 그냥 내려오는 경우도 있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래." "성경에 보면, 어느 지역에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얻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죽어 하늘에 가서 '이 사람은 누구의 아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모두 '내 아내가 아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지. 개체로 돌아가는 거야. 이승에서 못 이룬 인연, 저승 가서 이루자는 둥,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 하자는 둥,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것도 다 사람 머리 속에서 나온 거야. 죽어서 서로 가는 곳이 틀린데 무슨 수로 다시 만나겠어? 다 희망사항일 뿐이지."
과연 나에겐 천생연분이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결혼을 하게 될까? 전생연분일까? 아니면 지상연분일까? 이왕이면 드라마틱하게 천생연분이나 전생연분이면 좋겠지만, 그것도 도를 이루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이지, 누구와 만나 결혼한들 그것이 무슨 연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천안통 수련해서 야단맞을 때, 미래의 내 아내 얼굴이나 볼 것을... 아니, 혹시 모른다. 사람 몸을 받고 내려올 때, 난 내려가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작심을 하고 내려온 케이스인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속인의 신분에서 이런 상상은 언제나 솔솔찮은 재미를 가져다주곤 한다. 도를 닦기 이전에, 나와 도장 실무진들은 인간이고 한창 이성을 그리워할 젊은 나이의 청년들인 것이다. 그나저나, 한 커플이라도 잘 되어서 장가가는 사범이 생겨야 할텐데...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노라니 예상보다 훨씬 시간을 넘겨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야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어요?" "그냥, 식사하고 노래방에 가서 놀고... 그리고 들어왔죠. 다들 착하더라구요." "한 커플이라도 잘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요?" "모르죠 뭐."
그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결과를 말씀 드린다면, 그때 미팅에 참가한 여자들 중 한 명이 도문에 입문하여 사범이 되고, 운암과 결혼하여 현재 미국 도장에 부부사범으로 같이 나가 있으며, 얼마 전 '소희라는 이쁜 딸까지 낳았다. 문희민 사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배였는데, 내가 가장 아끼고 본받으려 애쓰는 속깊은 사람, 운암과 결혼을 했으니 그날의 해프닝이 결코 무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이 기회를 빌어 미국에 있는 운암, 문희민 부부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참으로 사랑하고 보고 싶은 이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