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7. 2시 30분 타임의 터줏대감 호월과 광풍
워낙에 야행성인 나의 생활습관 탓에 늦게 일어나도 느긋하게 나올 수 있는 2시 30분 타임을 고정 수련시간으로 정했다. 2시 30분 타임이 끝나면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4시 20분 타임을 마치고 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었다. 지금이야 도장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석촌동에 있는 본원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인연 있는 사람 몇몇이 공부하던 때라서 많아야 3명 정도가 고정적으로 수련을 하곤 했다. 문제의 2시 30분 타임의 터줏대감이 두 명 있었으니, 바로 호월과 광풍이다. 지금은 도호가 있어 호월과 광풍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호월이 권진홍(일명 권도사), 광풍이 최문식(일명 동대장님)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광풍은 나로 하여금 도장과 인연을 맺게 해준 바로 그 예비군 동대장님이었고, 호월은 워낙에 이 계통을 전전한 탓에 모르는 것이 없어서 권도사라는 별명을 불려지고 있었다. 두 분이 다 대맥수련을 학 계셨으니 누워서 헉헉대는 재 눈에는 그저 엄청난 고수로 우러러 볼 분들이었다.
"아이고! 권도사 나왔네? 어제는 왜 안 나왔어?" "안 나오긴 뭘 안 나와요? 동대장님이 안 나오고선 얼렁뚱땅 되치시기는." "아, 그런가~! 허허... 요즘 수련은 잘돼?" "맨날 그렇지, 나 같은 하근기자가 잘될 리 있겠어요?" "이거 이러다가 나 추월하는 거 아냐?" "걱정 말아요. 추월할 일 없을 테니까." "그래? 핫핫...!"
이분들의 입담은 정말 대단했다. 수련이 끝나고 사범이 차를 낼 때, 사범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 있었고 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다 할 정도였다. 물론, 2시 30분 타임을 맡은 사범이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운암 사범이라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운암은 멀쩡한 총각이었는데, 지금은 애아빠가 되어 미국 LA 지원에 파견 나가 있다. 정말 세월은 빠르다.
광풍: 그 단체에서 수련할 때 말야! 핫핫... 호월; 거기도 부작용 있데? 크핫핫! 광풍; 권도사 기감은 어떠신가? 푸핫핫! 나; ... 근데, 단전기감이 뭐예요? 광풍,호월; ... 나; 죄송합니다...
백회에서 용천까지, 단전에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두 사람의 입담 앞에 나는 입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선경을 헤매는 기분이었으니 이야기에 끼어든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단전호흡단체들의 성격과 장단점까지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돈 주소도 못 얻을 많은 정보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분들이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호월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예비군 동대장과 동대원이라는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던 광풍과는 달리, 호월의 경우 딱해 연관될 인연의 끈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4시 20분 수련이 끝나고 집으로 갈 때였는데 호월이 같이 길을 나섰다.
"나 서울문고 가는데 지하철역까지 같이 가면 되겠네요." "네, 저야 영광이죠."
막상 길은 같이 나섰지만 아는 게 워낙 없는 나였던지라 기초적인 수련인의 금기사항에 대해 묻기로 했다. 터놓고 질문할 수 있는 기회이니 얼마나 좋은가?
"저, 돼지고기하고 닭고기는 특히 먹지 말라고 하던데, 먹어서 기운이 흩어지게 되면 회복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먹지 말라고 하지만 먹어도 돼요. 거기에 묶여도 안 좋은 거예요. 입에서 당길 때만 먹어요." "네에..." "수련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제 일주일 정도..." "푸핫핫... 그럼, 먹어요. 먹어봐야 지금은 흩어질 기도 없는데, 뭘 걱정을 해요?" "..." "나도 빨리 수련하려고 고기와 술을 다 끊고 해봤는데 수련단계를 안 올려 주더라구요. 느굿하게 먹을 거 다 먹으면서 해도 돼요."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나빠져 왔다. 흩어질 기도 없다니... 그래도, 비록 일주일이지만 그렇게 열심히 수련을 했는데... 그 당시 나는 도장에서 두 타임 수련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 가서도 틈만 나면 누워서 수련을 하고 있던 차였다. 수련이 가장 잘된다는 자시(저녁 12시 30분에서 새벽 1시 30분)엔 두 시간을 쉬지 않고 호흡 수련을 하던 차에 흩어질 기운도 없다니... 나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흩어질 기도 없다구? 어디 한 번 해보자.' 생각지도 않았던 오기가 발동되면서, 그날 이후 고기는 물론 계란까지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시간을 배로 늘려 수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쉴새없이 한 달이 지나가고 드디어, 수련점검일이 되었다. 평상시 이야기하기 힘든 한당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날이라 회원들은 수련점검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달 수련해 보니까 어때요?" 선생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신다. "처음치고는 호흡이 잘 되시더라구요."
2시 30분 타임 담당사범인 운암이 옆에서 거든다. 느낀 대로만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수련할 때 느꼈던 기감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단전부위에 기감은 첫날부터 느꼈고, 단전부위에 계란보다 좀 크게 무언가 뭉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잘됐는데요? 좌식 들어가세요. 운암! 좌식수련 가르쳐드려라."
전혀 예상 밖의 결과였다. 그당시, 보통 단전자리를 잡아 좌식 들어가는데 3개월 정도가 기본이었으니 한달 만에 좌식을 들어간다는 건 기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쁨에 못 이겨 숨을 씩씩거리며 수련실에 들어가니, 호월과 광풍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더 하라고 하시죠?" "좌식 들어갔어요." "..." 호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시 물었다. "올라갔어요? 한달 만에? 대단하네..." "다 권도사님 덕분이에요. 권도사님이 그때, 흩어질 기도 없다 라고 하셔서 오기로 열심히 했더니 올라가게 되네요."
워낙에 근기가 약해 언제 수련을 그만둘지 모르는 사람이라, 선생님께서 수련을 빨리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든, 수련이 지나치게 빨리 간다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가끔 호월은 자기 때문에 빨리 갔으니 자기가 은인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한다. 맞는 이야기다. 호월은 내 은인이다.
8. 식인종 비디오
대맥수련을 할 때의 여름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니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매년 방학이면 형은 반포에 있는 교수님의 빈집을 지켜주곤 했다. 형님에겐 워낙 가까운 은사님이었다. 교수님이 미국으로 가족들을 보러 떠나실 때마다 집을 지키기 위해 반포에 가서 생활을 했던 것이다. 영화과 교수님의 집답게 반포의 아파트에는 수천 장의 주옥같은 영화들이 레이저 디스크로 보관되어 있었다. 집을 보고 있는 동안 레이저 디스크만 빼서 보아도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그날 따라 형은 일이 있어 내가 대신 집을 지키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워낙에 영화광이신지로 손수 차를 몰고 놀러 오셨다. 선생님이 오실 것을 대비해서 일부러 집에서 가져온 다기로 차를 뽑아 마시며 다담을 나누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께 레이저 디스크의 놀라운 화질을 보여드리기 위해 작은 방으로 안내를 해드렸다.
"뭐, 재미있는 거 있어요?" "많으니까 한 번 골라 보세요."
작은 방에 있는 디스크 하나하나 살펴보며 무슨 영화를 볼까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좌측 하단부에서 소름이 오싹 끼치는 기운이 감지가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일본에서 나온 영화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남미의 정글을 촬영하러 간 촬영팀을 식인종들이 잡아먹는 내용의 영화였다. 동료들이 잡아먹히는 장면을 촬영한 촬영기사마저 잡아먹히는 바람에 실종처리가 되었다가 후속팀이 뒤늦게 테이프를 발견하여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씌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이 연기도 아닌 실제상황으로, 그것도 노컷으로 담겨 있는 잔인한 영화였던 것이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게 뭔데요?" 안 되는 일어 실력을 총 동원해서 해석해 설명을 드렸더니, 당장 인상을 찌푸리신다. "일사, 기체크 한 번 해봐요."
선생님께서 기체크를 한 번 해보라 하시기에 손을 대어보니, 손을 위에 가져간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선생님께 디스크를 전달해드렸다.
"가공으로 만든 공포영화 등은 상관이 없어도, 이처럼 실제사건인 경우에는 그 영상을 담은 테이프 등에도 그 한의 에너지와 악령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보관하고 있는 집이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선생님은 디스크에 손바닥을 대시고 한기를 없애신 후, 다시 한 번 기체크를 해보라 하셨다. 다시 손으로 기를 체크해보니, 디스크에서 훈훈한 열기가 감지되었다. 그 느낌은 온화하고 포근한 기운으로, 처음 체크했을 때의 오싹한 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데요? 희한한 일이네? 그건 그렇고, 너무 불쌍합니다. 살아서 눈뜬 채로 배를 갈리고, 같은 인간에게 잡아먹히다니... 얼마나 무섭고 참혹했을까요? 이것도 운명입니까?" "지독한 악운이지. 하지만, 그것도 운명이야.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까. 안 갈 수도 있었는데, 식인종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갔다가 그런 악운을 만난 거니 누굴 탓할 수도 없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너무 가혹하고 불쌍하니 천도를 시켜주실 수는 없습니까? 제작 연도로 보아 아직 환생할 시기도 안 되었는데..." "천도는 내가하는 게 아니고, 신명들이 해야 할 일이지... 환생하면 좋은 곳에 태어날 거야. 옛날 무술도장 사범일을 할 때도 이 영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천도시킬 생각은 못 했었거든? 천도시킬 때가 되었는지 오늘에야 인연이 닿네..." "저런 식인종들은 죽은 후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영 자체가 소멸되지."
이상하다. 아무리 식인종이라 해도 인간은 윤회를 통해 영이 발전되어 간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윤회를 통해 인간의 영은 발전되어 간다고 하셨는데, 영자체가 소멸되다니, 이건 또 어찌된 일입니까?" "이건 퇴보야. 스스로 도를 모르고 한눈을 팔 경우, 영 자체는 퇴보할 수도 있어. 가령 전생에 죄를 오백 번 짓고 연옥에서 죄를 탕감한 후에, 보다 좋은 곳으로 가겠다고 사람 몸을 받고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공부를 안 하게 되면 전생보다도 죄를 더 짓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거지. 이런 식인종의 경우에는 원시인의 수준에서 발전되지 못한 영들이거든. 태초에 이천 명의 신명이 내려와 여러 문명을 이루었지만, 그 문명에서 도태되어 오지로 숨어든 인류가 저렇게 된 거야."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영이 소멸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치 사람이 자살을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닐까? 만약, 영의 소멸이 최고의 형벌이라고 해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듯 불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이 소멸되어 아무 것도 아닌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염치 불구하고 의문을 풀기 위해 질문을 드렸다.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만을 무서워할 뿐, 만약 죽어서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고 하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어찌 보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고 또 지은 죄가 많기에 벌받을 것은 겁이 나니, 오히려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몇몇 종교단체에서는 개벽에 살아남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거든요?"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어. 그건 최고의 형벌이야. 도계에 가장 무섭고 혹독한 형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거든.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을 때가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아닌 무(無)가 된다고 생각해봐. 관심을 가져줄 사람도 없어. 그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거야. 또, 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조물주의 영향권 밖이라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지만 무라는 것, 그 자체도 조물주의 영향권 안에서의 무일 뿐이거든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일이겠어?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일 뿐이지. 신명들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상의 위계질서도 유지가 되는 거야. 조물주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는 거지."
망망대해를 헤매는 기분이 이럴까? 사람의 마음과신명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저 먼 우주 밖,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영원한 시간 동안 홀로 떠 있는 막막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그조차도 없는 어둠 그 자체일까? 어둠이란 것 자체도 무라는 개념은 아니니 도저히 판단할 술 없는 일이다. 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막상 생각하려드니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은 도통을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한정적인 존재일까? 주어지고 보여지는 것이외에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그 세상 또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면, 그 엄청난 스케일 안에서 돈 몇 푼에 아등바등 사는 모습들이 우습다 못해 측은하여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생각해봐야 아직은 알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질문을 그냥 덮어두자. 나 스스로 완성되어 내 진면목을 알게 되는 날, 그날에 쌓였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때가 되면 이미 질문할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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