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4. 동자야, 선녀야! 같이 놀자
93년 여름의 이야기다. 방송작가 생활을 하고는 있었으나, 정말이지 글을 쓴다는 것이 고역이었다. 게다가 까까머리 시절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를 했다가 다시 올라오는 일을 겪은 후로는, 늘 스승과 바른 법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터라 마감에 맞추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곳 저곳 다 찾아보아도 이거다 싶은 것이 없어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상태였고, '이 생에 도를 통하는 것이 정녕 불가능하구나'라는 절망감에 소리 죽여 운 밤도 많았다. 일마다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고, 이 책 저 책 다 들여다봐도 다 뻔한 소리였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마포에 있던 무당집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를 통해 용하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한 번 찾아가 이야기해 보면 내가 도를 공부할 인연이 있는 놈인지 없는 놈인지 알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토록 약해져 있었다. 마포의 가든 호텔 뒤편으로 가면 좁은 시장골목이 자리하고 있다. 사잇길로 조금 들어가면 허름한 70년대식 단층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골목 끝머리에 이보살의 신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보살이 반겨 맞았다. "젊은 분이 어인 일로 여기까지 찾아 왔을까?" "..." 막상 찾아 왔으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있는 나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이보살은 종을 꺼내 흔들며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삼촌, 답답하지? 조금만 참아. 이제 좋아져!" 느닷없이 이보살의 입에서 아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신당에 사탕과 과자, 장난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 저렇게 웃음이 해맑을 수 있을까? 이보살의 입가에 감도는 정감 어린 아이의 미소가 가슴에 와 닿았다. 처음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동자의 웃음에 씻은 듯이 녹아 내렸다. 이보살이 건네 준 약차가 입안에서 살며시 돌아가고 있었다. "삼촌, 큰 성공 할거야. 답답해 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성공은 바라지도 않고요. 그저 한 소식 들어 윤회의 사슬이나 끊었으면 좋겠어요." "한 소식?" "내 평생 소원이 도통인데, 여기저기 헤매 다녀도 끝내 도를 찾을 수 없으니, 저도 신 받아 무당이 되어 억울하고 나약한 사람들 도와주며 선업이나 쌓다가 내생에 좋은 인연 만나려고요." "삼촌, 그러지마... 나 울고 싶다."
이보살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갑자기 마음 속부터 욱하고 올라오는 그 무엇 때문에 나도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헤매왔던 그 많은 시간들, 도를 찾아 헤맸던 그 세월이 아무런 결실 없이 이렇게 마감되고야 말았다는 회한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심전심이라 했다. 동자의 눈물은 나에게 그렇게도 고맙고 포근했다. 그 첫 만남 이후, 나는 수시로 마포를 찾아갔다. 마음이 울적할 때나 일이 안 풀릴 때, 외로울 때면 반사적으로 마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신당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위기에 젖는다고 할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은 점점 신 받아 무당의 길을 걷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이보살님, 희한한 일이네요." "뭐가요?" "액자가 웃어요." 벽에 걸려 있는 초상들이 어느 날부턴가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예전에 불교수행을 할 때, 밤새워 천팔십배를 하고 나면 불상이 나를 보고 지긋이 웃곤 했었는데, 절을 하지 않아도 나만 보면 마치 한 식구 대하듯이 신당의 초상들이 미소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만 찾아가면 동자와 선녀가 먼저 나와 반색을 하였다. "삼촌 보고 싶었어!" "어제는 왜 안 왔어? 치잇!" 어느 날부턴가, 나에겐 현실세계에서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 동자와 선녀가 가장 친근한 친구로, 동생으로, 애인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일이 있어 찾아가지 않아도 그들을 만나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매일 밤 꿈에서 우리는 함께 만나 이곳 저곳을 함께 다녔으니 말이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만날 때마다 반가움에 기뻐하는 나를 이보살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큰일이네. 정말 신 받아야 되려나 보네. 나한테도 신 아들 생기려나?" "보살님 신 아들 되면 저야 영광이죠." 이보살은 걱정 반 기쁨 반인 모양이다. 집안 사정을 뻔히 알기에 나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와 집착도 알고 있던 이보살. 만약 내가 신을 받아 무당이 되겠다 하면 어머님은 뭐라고 하실까? 자식 꾀어내 무당 만들었다고 애꿎은 이보살이 덤터기를 써야 할지도 몰랐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어머님께는 비밀로 하고 내림굿 날짜를 받아서 신 받아 버리면 그때 가서 어머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요? 결국은 받아들이고 이해하시겠지요." "그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찜찜한 이보살이다. 그러나, 이보살의 반응과는 달리 동자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좋은 날 받아 줄게. 삼촌, 선녀 누나랑 같이 놀자!" "그래, 동자야. 이젠 매일 같이 살면서 놀자."
어느새 낙엽 지는 가을이 돌아왔다. 바람이 꽤나 선선하게 느껴질 무렵, 망설이는 이보살을 동자가 설득해서 드디어 내림굿 날짜를 잡았다. 막상 날을 잡고 나니 비장함과 함께 이젠 되돌아 설 수 없다라는 생각에 어머님 생각이 절로 났다. '그렇게 헤매고 결심한 지 오래인데, 또 흔들리다니... 나란 놈은 정말 하등의 쓸모 없는 놈인가 보다.'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빨리 신 내림을 받아야겠다고 초조해하던 어느 날, 갑자기 돌발사태가 생겼다. 예비군 훈련통지서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굿을 하기로 한 그날에 말이다. 예비군 훈련이야 연기하면 그만이지만, 공연히 찜찜한 마음에 동자를 찾아갔다.
"나 왔다. 동자야~! 이보살님!"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동자가 튀어나왔다. "삼촌~! 삼촌은 신 받으면 안 돼. 없었던 일로 해." "무슨 얘기야?" "아무튼 안 된다니까?"
신 내림 날만을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며 버텨왔는데, 신 받는다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동자가 정색을 하며 없었던 일로 하자니, 갑자기 이게 무슨 연유일까?
"글세, 이유를 말해야지. 동자야." "아무튼 안돼. 안되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동자야! 동자야?" 자꾸만 캐묻는 나를 피하기 위함인지 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보살님.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동자가 갑자기 왜 저래요?" "모르죠. 나야 동자한테 몸만 빌려주는 건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요. 한 번 알아보세요." "그래야겠네."
이보살이 동자를 부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벌여도 동자는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그 좋아하던 사탕을 봉지 채로 건네줘도 도무지 얼굴을 보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어차피 나온 훈련이니까 예비군 훈련받아요. 끝난 다음에 다시 알아보고 날을 잡든지 해야지. 동자 저러는 걸 보니 오는 날에 굿하는 건 안 되겠네요."
갑자기 앞이 막막해졌다. 내림굿한다고 그 동안 함께 일해왔던 PD들에게도 다시는 글 안 쓴다며 인사하고 나온 지 오래인데, 이제 와서 굿을 할 수 없다니. 신 받는 것은 둘째치고 이젠 생계까지 막막해지지 않았는가? 동자의 성격으로 봐서 두말하지는 않을 텐데, 갑자기 신을 받으면 안된다니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도 예비군 훈련이 시작될 때까지 수시로 동자를 찾아가 연유를 물으려 했으나, 내가 갈 때마다 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나타나질 않았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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