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112174421&Section=04
유럽의 도시는 특수하다고?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9>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③
4. 다른 대륙의 도시들
이슬람권의 도시들
서양학자들은 이슬람권의 도시들을 전통적으로 매우 경시해 왔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로 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목민들은 표류하는 종족들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도시들에는 경제활동이 있다 해도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적인 것이라고 본다. 주변의 농촌을 뜯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상업 활동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 사회는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상업 활동에 제약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10세기에 후옴미아드 왕조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최대의 도시였다.
또 14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의 카이로가 크게 번성했다. 이 도시도 중국의 항주(杭州)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 인구도 약 50만에 달했다. 이집트에는 이 외에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개의 대도시가 나일강을 따라 발전했다.
카이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세계무역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가 유럽과 인도, 중국을 잇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와 인근 지역에는 상업, 국제무역 외에 수공업도 매우 발전했다. 면직이나 린넨 같은 직조업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밖에 설탕산업이나 야금업, 무기제조, 유리, 도자기, 가죽제품 등 많은 산업이 발전했다.
또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정권은 각종 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경제에 약간의 통제를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집트인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이슬람권에서는 계약, 동업, 중개제도, 장부의 기장, 신용제도 같은 상관습이 잘 발달했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을 반자본주의적으로, 이슬람도시를 정치적, 종교적 도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중국의 도시들
서양 사람들은 중국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정치적, 행정적 성격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중국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9-10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발전과 무역의 증가 때문이다. 특히 13세기인 남송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 산업기술,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도 발전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의 항주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전국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무역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송대에도 상공업이 발전했으나 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곡물이나 면, 견 같은 상업 작물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들도 상품 생산과 분배의 거점으로서 주변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고 따라서 인구증가, 도시화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남경의 인구는 100만, 북경도 60만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명, 청대에는 행정과 전연 관계없는 상업, 산업도시도 많다. 경덕진(景德鎭) 같은 도시는 유럽에 자기를 수출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산업도시이다. 또 양자강 하류지역과 태호(太湖) 지역에는 면직물,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수십 개의 산업도시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양자강 하류의 큰 도시인 한구(漢口)에 대한 연구를 보면 베버와 같은 식으로 중국 도시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행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킨 상업도시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
일본의 도시도 경제발전에 따라 16세기 이래 크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1825년에 이르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82개에 이르고 도시인구는 모두 367만 명으로 추산 된다. 이런 도시화율은 18세기의 서유럽과 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오사카와 교토의 인구는 40만-50만이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戶)의 인구는 근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도시화도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도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봉건영주가 자리 잡은 성곽도시이기는 하나 그것을 반드시 행정도시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인도도 인도양 지역의 중심 국가로 일찍부터 경제가 발전하며 도시도 발달했다. 17세기에 아그라, 델리, 라홀 같은 무굴제국의 주요도시들의 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고 인구 20만명을 넘는 무역항들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프리카가 원래 미개하여 지금 보이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마도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건설되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많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1200년경에 인구 2만 이상의 도시가 31개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것이 1400년에는 35개로 늘었고 1600년에 30개로 약간 줄었다가 1800년이 되면 21개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200-1400년 시기의 이런 도시 숫자는 아프리카가 도시화라는 점에서 유럽에 크게 뒤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6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있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는 16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아프리카인의 자생적인 정치, 경제할동이 위축되고 그리하여 도시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5. 유럽의 중세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빈약한 유럽 도시들
지금까지 유럽의 중세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지역의 도시들이 어땠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유럽 도시들의 특징은 우선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만이 10만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알프스 북쪽에서는 파리만이 10만 정도였다.
그러면 이렇게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들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급격하게 성장했는지 런던을 예로 들어보자. 런던은 17세기에 들어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4만 정도였다. 조선 초의 14세기 말 한양이 10만 이상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작은 도시이다.
1563년에도 9만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1580년에 12만 3천, 1593-95년 사이에 15만 2천, 1632년에는 31만7천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1700년에는 70만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잉글랜드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므로 런던시의 급성장은 잉글랜드인의 해외진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며 노예무역 등을 통해 잉글랜드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런던시가 대표적이지만 많은 유럽도시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유럽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전 유럽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 아니다. 아시아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규모도 작고 인구도 훨씬 적다.
이렇게 도시가 빈약했다는 것은 중세시기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규모도 작고 숫자도 많지 않은 유럽도시들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규모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도시의 자유니 뭐니 하며 성격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유럽도시의 특수성은 잘못된 주장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들이 봉건적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가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약간의 자율성을 얻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 수백 개의 특허장을 확보한 도시라 해도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특허장을 도시민이 왕이나 영주와 싸워 얻은 결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영주들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허장과 도시의 자유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도시들은 왕이나 영주들의 소유권, 법적 관할권에 의해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니 도시가 누리는 자율이라는 것이 그 가운데 남겨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에서 왕권이 강해지며 도시의 행정권, 사법권이 점차 왕의 관리들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그나마의 자율성마저 잃게 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또 유럽도시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 받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중세도시의 전통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도시의 성격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치적 성격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 경제가 18세기까지도 유럽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활력 있었다는 주장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럽도시와 아시아 도시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무 지나치게 유럽 도시의 특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도시는 특수하다고?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9>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③
4. 다른 대륙의 도시들
이슬람권의 도시들
서양학자들은 이슬람권의 도시들을 전통적으로 매우 경시해 왔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로 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목민들은 표류하는 종족들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도시들에는 경제활동이 있다 해도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적인 것이라고 본다. 주변의 농촌을 뜯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상업 활동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 사회는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상업 활동에 제약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10세기에 후옴미아드 왕조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최대의 도시였다.
또 14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의 카이로가 크게 번성했다. 이 도시도 중국의 항주(杭州)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 인구도 약 50만에 달했다. 이집트에는 이 외에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개의 대도시가 나일강을 따라 발전했다.
카이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세계무역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가 유럽과 인도, 중국을 잇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와 인근 지역에는 상업, 국제무역 외에 수공업도 매우 발전했다. 면직이나 린넨 같은 직조업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밖에 설탕산업이나 야금업, 무기제조, 유리, 도자기, 가죽제품 등 많은 산업이 발전했다.
또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정권은 각종 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경제에 약간의 통제를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집트인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이슬람권에서는 계약, 동업, 중개제도, 장부의 기장, 신용제도 같은 상관습이 잘 발달했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을 반자본주의적으로, 이슬람도시를 정치적, 종교적 도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중국의 도시들
서양 사람들은 중국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정치적, 행정적 성격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중국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9-10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발전과 무역의 증가 때문이다. 특히 13세기인 남송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 산업기술,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도 발전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의 항주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전국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무역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송대에도 상공업이 발전했으나 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곡물이나 면, 견 같은 상업 작물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들도 상품 생산과 분배의 거점으로서 주변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고 따라서 인구증가, 도시화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남경의 인구는 100만, 북경도 60만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명, 청대에는 행정과 전연 관계없는 상업, 산업도시도 많다. 경덕진(景德鎭) 같은 도시는 유럽에 자기를 수출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산업도시이다. 또 양자강 하류지역과 태호(太湖) 지역에는 면직물,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수십 개의 산업도시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양자강 하류의 큰 도시인 한구(漢口)에 대한 연구를 보면 베버와 같은 식으로 중국 도시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행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킨 상업도시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
일본의 도시도 경제발전에 따라 16세기 이래 크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1825년에 이르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82개에 이르고 도시인구는 모두 367만 명으로 추산 된다. 이런 도시화율은 18세기의 서유럽과 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오사카와 교토의 인구는 40만-50만이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戶)의 인구는 근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도시화도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도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봉건영주가 자리 잡은 성곽도시이기는 하나 그것을 반드시 행정도시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인도도 인도양 지역의 중심 국가로 일찍부터 경제가 발전하며 도시도 발달했다. 17세기에 아그라, 델리, 라홀 같은 무굴제국의 주요도시들의 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고 인구 20만명을 넘는 무역항들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프리카가 원래 미개하여 지금 보이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마도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건설되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많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1200년경에 인구 2만 이상의 도시가 31개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것이 1400년에는 35개로 늘었고 1600년에 30개로 약간 줄었다가 1800년이 되면 21개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200-1400년 시기의 이런 도시 숫자는 아프리카가 도시화라는 점에서 유럽에 크게 뒤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6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있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는 16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아프리카인의 자생적인 정치, 경제할동이 위축되고 그리하여 도시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5. 유럽의 중세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빈약한 유럽 도시들
지금까지 유럽의 중세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지역의 도시들이 어땠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유럽 도시들의 특징은 우선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만이 10만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알프스 북쪽에서는 파리만이 10만 정도였다.
그러면 이렇게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들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급격하게 성장했는지 런던을 예로 들어보자. 런던은 17세기에 들어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4만 정도였다. 조선 초의 14세기 말 한양이 10만 이상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작은 도시이다.
1563년에도 9만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1580년에 12만 3천, 1593-95년 사이에 15만 2천, 1632년에는 31만7천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1700년에는 70만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잉글랜드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므로 런던시의 급성장은 잉글랜드인의 해외진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며 노예무역 등을 통해 잉글랜드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런던시가 대표적이지만 많은 유럽도시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유럽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전 유럽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 아니다. 아시아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규모도 작고 인구도 훨씬 적다.
이렇게 도시가 빈약했다는 것은 중세시기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규모도 작고 숫자도 많지 않은 유럽도시들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규모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도시의 자유니 뭐니 하며 성격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유럽도시의 특수성은 잘못된 주장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들이 봉건적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가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약간의 자율성을 얻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 수백 개의 특허장을 확보한 도시라 해도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특허장을 도시민이 왕이나 영주와 싸워 얻은 결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영주들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허장과 도시의 자유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도시들은 왕이나 영주들의 소유권, 법적 관할권에 의해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니 도시가 누리는 자율이라는 것이 그 가운데 남겨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에서 왕권이 강해지며 도시의 행정권, 사법권이 점차 왕의 관리들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그나마의 자율성마저 잃게 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또 유럽도시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 받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중세도시의 전통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도시의 성격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치적 성격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 경제가 18세기까지도 유럽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활력 있었다는 주장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럽도시와 아시아 도시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무 지나치게 유럽 도시의 특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