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5장 (신이 내린 글)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얘기해 나가면서 정작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바꾸어 말해서, 이 책에서는 단지 그 수목에서 어떤 과일이 어떤 식으로 열렸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사상적 변천은 좋든 싫든 많은 부분 바로 이러한 품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는 이미 나에 앞서 다른 이들이 지적했던 점이었다. 사실 그의 글에 대해 피렌체의 대 산문 작가인 지노 카포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중한 듯하다가도 경멸 조로 돌아섬으로써 당시 칭송과 인기를 함께 누렸던 그의 문체, 그것이 지닌 비할 데 없는 대담성과 힘.(...)나의 생각으로는, 그의 교의가 드물지 않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도 작가로부터 풍겨져 오는 바로 그러한 인상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그가 바로 그 교의들, 그리고 새로우면서도 예리하며 힘차면서도 매서운, 바로 그 놀라운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궁정 라틴어로 호화롭게 치장하든가 혹은 질리도록 장황하지만 한 속어문 속에 용해시켜 버렸다면, 지금 그는 단지 몇몇 문학사 저작에서만 언급될 뿐인 그런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해 보라. (군주론)이 빈약한 필사본 전통만을 뒤로 남긴 채, 인쇄되기도 전에 유실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라도 그렇게 되었다면, 아고스티노 니포의 그 악명높은 표절서 (통치술 De regnandi peritia)은 그 저자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이점속에서 어떤 부침을 겪게 되었을지 알 수 가 없다. 단지 사실만이, 혹은 적어도 사실이 문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는 작금의 그 어리석은 비평가들은 이로부터 무언가라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오파르디는 자신의 (수상록 Zibaldone)에서 문체란 설사 사실로부터 분리된다 해도 어떤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따끔하게 꾸짖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만 사실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면서, 마키아벨리의 문체가 귀감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같은 곳, 같은 시대, 같은 장르에 속하는 다른 어떤 작가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귀에도 마키아벨리의 한 문장, 한 구절은 다른 수많은 작가들의 경우와 쉽사리 구별된다. 우리에게는 몇몇 학자들이 필체를 근거로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자필 문서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무디어서 내가 말한 그 독특한 음색은 잘 식별되지가 않는다. 만일 그가 그 문서들을 단지 베꼈을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병 관찰기 Descrizione della peste) (이 글의 저자는 로렌초 스트로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 16장 주 15를 볼 것 - 옮긴이) 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데 상티스는 (기교적이고 보카치오적인) 마키아벨리의 존재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우리말 논고)처럼 그 자필 원고는 유실되고 아둔한 학자들은 저자의 신빙성을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서기장의 작품이 분명한 크고 작은 원고들도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을 이 책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즉 마키아벨리를 알아보는 데는 필적보다는 문체가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오직 아둔한 학자들만이 어떤 말, 어떤 구절이 그 위대한 작가의 것인지 혹은 그의 글을 베낀 뻔뻔스럽거나 멍청한 사람의 것인지를 구별치 못하는 법이다(그래서 결국(만드라골라)의 진본 원고를 찾아낸 것도 사실 다름 아닌 나였다).
이후 (오직) 그만의 것인 그 언어와 그 문체에 대한 해부 작업이 뒤따른다. 접미사의 사용, 풍부한 액식 어법, (한 개의 형용사 또는 동사로 다른 두 개의 명사를 억지로 수식 또는 비배시키는 수사법을 말함. 이를테면 (흐느끼는 눈망울과 두근거리는 가슴)이라고 해야 될 것을 (흐느끼는 눈망울과 가슴)이라고 하는 것-옮긴이), 간결한 문장, 낱말 특히 동사의 배치 등을 통해 글의 속도가 빠른 이유가 탐색되어야 하고, 비문체와 양도 논법, 극히 자연스러운 어투, 대립적인 어휘 또는 대립적인 개념 간의 빈번한 대비, 자신의 (비극적) 본성에 잘 호응하는 용어와 문체상의 어떤 극적 박력성을 통해 그의 글이 지닌 힘의 비밀이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만 한다. 또한 궁정식과 평시민식을 섞어놓고, 고상한 속어와 피렌체 관용 어법을 라틴식 어휘나 혹은 직접적으로 라틴어와 혼합해 놓은 그 혼용의 방식이 연구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때로는 (일상의 옷)을 입었다가 또 때로는 궁중복으로 갈아입던 이 산 카쉬아노의 인물에 매우 쉽사리 접근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사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맞추어 인식하고 정리했다고 해도, 이 놀라운 말의 혼합물 속에는 여전히 우리를 비켜가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교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지만 이 글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풍미랄까, 더 적절한 표현을 찾자면 어떤 시 정신 같은 것이다.
한 근대 이탈리아 문학사가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면서도, 시심이 과정되고 허풍스럽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의 시를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를 평가하는 데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바로 그와 같이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정치, 역사 철학자인 인물의 저작 속에서, 특히 개인적인 편지들 속에서, 각별히 단테를 비롯하여 평소 암송하고 했던 라틴아와 속어 시인들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는 정치가와 역사가만이 아닌 문인까지 통틀어 당시이 대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에게 글쓰기의 스승이 되었던 사람은 누구보다도 단연 단테였고, 타키투스도 그러하였다. 아마 루크레티우스도 이에 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야 마키아벨 리가 그의 작품을 필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그를 정신적으로 이끌어가는 어떤 위대한 품성이다. 그가 귀감으로 삼은 것들, 그의 글쓰기 실제에 담긴 비밀들을 다름아닌 그 자신 속에서, 평시민적 휴머니스트이자 산문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던 그의 정말 특이한 품성 속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지노 카포니의 말(앞서 인용했던 다른 말들에다 이를 다시 덧붙인다고 해서 전혀 부끄러울 일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접하기 전에 이미 수없이 그와 똑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다)에 뜻을 같이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절묘한 행문을 보노라면, 아마도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질시를 느낄 것이다.) 그처럼 평온하고 온건한, 이른바 (솔직담백한 지노)의 문체에 조금이라도 친숙한 사람들에게라면, 니콜로가 구사하는 어떤 동사, 어떤 부사가 적어도 뭔가 상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처럼 범상치 않은 글에서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표현이 어울리는 법이다.
프렌체스코 데 상티스 역시 니콜로의 글 속에서 (근대 산문의 예감) (이보다는 (반드시 근대적임이 틀림없는 그러한 산문에 대한 예감)이라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같은 것을 보고 느꼈으며, 그리하여 한번은 그것을 가리켜 (신이 내린 글 divina prosa) 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까지 사람들은 오직 (신이 내린 시 divina poesia)에 대해서만, 그것도 최고의 시인들에 한해서만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 문서에 대한 간략한 논평
나는 극히 최근에 다른 경로로 얻은 몇 명 미편집 문서들 외에, 마키아벨리 문서철의 잔존 문서들을 조사하였다('Le carte del Machiavelli," La Bibliofilia LXXI (1969)). 이 잔존 문서들은 오랫동안 리치 가문에 보존되어 왔는데, 이는 니콜로의 막내딸인 바르톨로메아(별칭 바치나)가 그 가문의 조반니란 사람과 혼인한 이후의 일이었다. 이 결혼으로 줄리아노가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위대한 외조부에 관련된 문서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베끼는 데 전생애를 바쳤다. 그는 16세기 말에 니콜로의 친손들로부터 문서철에 남아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입수하였다. 추측건데, 유감스럽게도 마키아벨리의 작품 원고들은 이미 이때에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줄리아노 리치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G. Sapori, "Giuliano de' Ricci, ecc.," in Stu야 in onore di Armando Sapori, Milano, Istituto Editoriale Cisalpino, 1957, vol. 2, p. 1063 sgg.).
문서철이 줄리아노에게로 넘어갔다고 추정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사실, 니콜로의 증손녀이자 그의 마지막 혈손인 이폴리타가 리치 가문의 또 다른 인물 피에르프란체스코와 혼인한 뒤 1613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외동달은 피렌체 서기장의 소유물이었던 물건들 모두를 세리스토리(혼인이 이루어졌던 곳)에다 옮겨놓았는데, 그 속에는 문서라고는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줄리아노의 자필 노트에도 이 난파된 고문서호의 잔존물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1820년대에 들어, 리치 가문의 마지막 유족들이(최근에 자손이 끊기고 말았다) 당시 여전히 토스카나 대공의 개인 도서관이었던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에다 자신들의 고문서철 일부를 팔았다. 이렇게 문서철이 분할된 이후, 그 나머지 전부를 누가 입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1832년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가 분할된 나머지 모두를 중간 구매자 혹은 그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부터 총액 순금화 100제키노에 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 구매를 제안한 사람은 빈틈이 없는 데다 운도 좋았던 서적상이자 도서관장이었던 주제페 몰리니였다. 그가 원래의 문서철을 훼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두 번에 걸친 구입으로 얻은 모든 자료들은 이후 그의 주관 아래 정리되고 분류되었다. 현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키아벨리 문서 Carte del Machiavelli)란 바로 이 자료들을 피렌체 고문서관에서 나온 다른 자료들과 합친 것이다.
문서들이 그렇게 훼손되고 흩어지기 전에 그 문고가 어떤 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는자, 그리고 (이 쪽이 더 중요한데) 그 내용상의 다른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내가 원래는 하나였던 두 개의 문서철을 접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였다. 윤택했던 시절, 대공 가문에서 구매해 놓았던 것이 이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약 30년 전 이 문서철 중의 하나가 부침이 심한 골동품 시장의 파도 위로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숙부인 파에로 지노리콘티에게 그것을 구입하여 필사본 콜렉션에 넣도록 권유하였고, 이는 그 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나도 무언가 관련이 있었던 한 약속 덕분에 피렌체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나는 또한 운 좋게도 당시 바르갈리 페트루치 백작 가의 도서관에 보관중이던 다른 문서철 역시 국립도서관으로 보낼 수가 있었다. 당시 파스콸레 빌라니는 그의 저작을 쓰는 데 이 문서들을 이용, 연구하는 편의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내용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자내지는 못하였다.
이 두 개의 귀중한 고문서 유물 중에서 첫 번째 것, 즉 전 지노리 콘티 문고는 불행히도 잘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국립도서관에 오기 전에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 중 50통의 편지가 세르조 베르텔리의 편집으로 간행되었음은 이미 dkb서 말한 대로이다. 반면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책이 제본된 형태가 줄리아노 데 리치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는 좀더 (신중히) 받아들여야 할 말이다) 두 번째 문고, 즉 전 바르갈리페트루치 문고는 새로운 곳에 보관된 1956년 이후,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를 제외한 현대의 마키아벨리 연구자들에 의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이 두 번째 문고는, 전 지노리 콘티 문서철처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력시 전 문서철이다), 그리고 아마도 몰리니에 의해 훼손된 그 문서철처럼, 가죽으로 보강된 양피지에 싸여 있었다. 책등에는 (Lettere/del/Machiavelli)라고 씌여 있었고, 고퐁의 글씨체로 31이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피렘체 국립도서관에 (Nuovi acquisti, 1004)라는 서명으로 보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서철 속에는 다른 편지와 문서들, 그리고 첫 (십년기)의 모조폼에 적혀 있는 (미우 중대한 오류들)에 대한 주석 등을 제쳐놓고도, 피렌체 서기장의 편지 75통이 오롯이 들어 있다. 특히 여기에는 1506년 3월 14일에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대단히 귀중한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앞서 언급한 나의 글 "La carte del Machiavelli"를 통해 간략한 문서 목록을 제사하고 그 내용에 대한 몇몇 연구 결과를 간행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러한 문서 목록을 오랬동안 피렌체 국립도서관에서 같이 보존되어 온 리치 가의 다른 마키아벨리 문서 목록과 합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어쨌든 이로부터 어떤 문서학적 소결론을 끌어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니콜로가 죽은 후, 그 상속자들인 베르나르도, 로도비코, 피에로, 귀도의 문서들은 문서철 속에 뒤섞여 있었다. 사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들들이 니콜로에게 보낸 편지뿐만 아니라 그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끼어 있음을 본다. 이를테면, 훨씬 뒤에 루카르도의 교구 신부가 죽으면서 귀도에게 보낸 한 놀라운 편지가 그것인데, 여기서 그는 생전에 귀도의 좋은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던 모든 희망들을 적어놓았다.
어쨌거나, 그리고 혹시 다른 어떤 중요 사항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독자들은 앞서 말한 나의 글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지금의 이 짤막한 논평은 그 글을 간략히 요약한 것으로, 나의 의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글을 다시 돌아다보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진 마키아벨리 문서에 원형이 통일성을 부여해서 우리를 인도해 줄 그 간략한 문서 목록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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