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5장 사랑과 고통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는 이미 옛날의 그곳이 아니었고, 도시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시골에서 빈둥거리기보다 더 나은 바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는 괘활한 성격에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산탄드레아의 술집 주인이나 푸주간, 그리고 가마 굽는 친구들보다야 더 세련된 얼굴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생활이 분명 싫지는 않았으리라.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와 독설과 예민성이 난무하는 주점에서 그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고, 이 역시 자신의 재능을 때로는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잡기도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이러한 종류의 놀음만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성에 차지 않았다. 저녁이 오면, 그는 쓰잘데없는 말의 유희가 남긴 덧없는 수확물만을 가슴에 안은 채, 그 불멸의 목소리들과 함께 했던 알베르가초의 고독보다 더 큰 오로움을 느끼는 자신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언제나 미소년의 뒤를 쫓아 다니는 도나토 델 코르노의 상점과, 경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품위 있는) 여인은 아닌 궁인 cortigiana(15세기말 이후 이탈리아에서 고급 창녀를 완곡하게 지칭한 말. 저급의 창녀는 이들과 구별하여 (meretrice) 혹은 (puttane)라고 불렀다. 이들 (궁인)의 미가 뛰어나고 따라서 그들과 교제하는 데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아한 예법과 높은 학식으로도 유명하였다. 역사적으로 비교하자면, 고전기 아테네나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중후반, 각별히 시와 서간문을 통해 르네상스 문학에 기여한 궁인으로는 로마의 툴리아 다라고나와 베네치아의 베로니카 프랑코 등이 있다-옮긴이) 리차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지혜롭다는 명성 덕분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하층 시민의 신분을 벗어나 보려는 그 상인의 난롯가를 차지하고 게다가 아름다운 부인으로부터 몇 번의 키스까지도 (몰래) 훔쳐낼 수 있었다. 그는 심사숙고한 자신의 생각으로 이러한 화롯가 자리와 키스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나자(정치에서처럼 인생에서도!), 한쪽은 그를 가리켜 상점 진드기, 다른 족은 집 진드기라 불렀다.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이 시기의 경우 역시, 베토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다른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기를 쓰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도 진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오랜 친구들 가운데 베토리는 새 정권에서 받아들여진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고, 더욱이 2년동안이나 로마 대사로 봉직해 오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바라는 호의와 일자리를 줄 만한 곳은 바로 로마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베토리의 편지가 언제나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11월 23일, 베토리는 로마에서의 남은 날들을 함께 보내자며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웃고 농담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주지 않았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그는 전혀 대사같이 살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모든 곳에서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도 마키아벨리만한 인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그가 한 말이다). 그처럼 차갑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인물의 입에서 나온 칭찬치고는 듣기가 쉽지 않은 말인 셈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초대에 감사하면서도 이에 응하는 데 주저하였다. 그것은 소데리니 가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 가문과 맺어온 관계로 볼 때, 자신이 로마에 가면서 그들에게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즉시 바르젤로 Bargello (원래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에서 경찰서장 격에 해당하는 외국인 관리를 가리켰던 말로, 특히 피렌체에서는 그의 주거지로 쓰였다가 그 뒤에는 감옥으로 전용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건물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감옥이라는 뜻-옮긴이)로 끌려가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는 베토리가 재차 걱정 말라고 말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에게 약속된 풍족한 생활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손에 (군주론)을 들고 가서 그것을 진상하고 싶어했다. 그는 유명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말한 바처럼, (메디치 군주들)의 부름을 받고 시골에서 올라와 (이제 나 여기 있노라!)하고 외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베토리의 편지는 매번 그에게 실망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는 단지 가벼운 신변잡사나 호색적인 애정 행각, 도는 (카사)와 브란카치처럼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의 저급함 등의 이야기만을 주절대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그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준 것은, 물론 그 자신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았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와 연락을 게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 똑똑했던 사람이 밤이 왔다고 바보가 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친구에게 되새겨주었고, 사랑을 아무런 제약과 구속 없이 받아들이라고 권했으며, 피렌체 주점에서 들은 이런저런 농담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2월 25일자 편지에는 피렌체에서 사육제를 즐기던 중 그렇고 그런 브란카치가 역시 그렇고 그런 카사베키아에게 저열한 속임수로 장난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그 내용이 매우 외설적이긴 하지만 너무나 눈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해서, 조금만 손질하면 우리 문학 최고의 단편 설화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농담 조의 이야기에서 정치 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어언 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었으리라), 그는 오랜 관심사로 돌아와,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인 에스파냐 왕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편지 말미를, 수입은 90피오리노뿐인데 세금으로 나가는 것은 40피오리노나 되는 자신의 처지를 전하며, 대부청 gle Ufficiali 야 Monte에다 대출 천거를 좀 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베토리 역시 이러한 변덕에 자신의 변덕으로 응대하였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친구를 천거하되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묘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부청에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가난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물론 달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는 지금 수입에 비해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돈은 없고 아니들만 오글오글합니다.
베토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란 인물은 일이 편지 한 통쯤으로 해결될 만한 정도일 때는 다정다감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좋은 친구로 보이지만, 일이 중차대해서 귀에 좀 거슬리거나 흐름을 역류하거나 모든 호의를 앗긴 사람을 위해 자신에 대한 조그만한 호의라도 잃을 위험이 있을 때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를 인정하고 그를 좋아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자신의 불편과 노고를 무릅쓰고 그를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론)의 남은 부분을 받아 읽고 난 뒤에도 별 노력 없이 한두 번 알아보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친구에게 책에 대해서나 로마로 오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마디 말도 비치지 않았고, 마키아벨리 역시 책 문제가 아니고는 로마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편지를 웃고 즐기는 이야기로 채웠고, 답장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인 것을 좋아하였다. 결국 둘 중 더 초조한 족이었던 니콜로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답이 왔고, 비록 그러리라고 짐작은 한 바 있었지만, 그것을 보자 마키아벨리는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그는 격한 감정에 답장조차 할 마음이 없었다. 비록 그가 편지를 쓰긴 했으나 시골에 있다보니 편지 부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변명 조의 말을 뒤에 했지만 말이다. 당시 그는 솔가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6월 10일, 그는 매우 비장한 어조로 평소와는 달리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난 이 버러지 같은 인생들과 함께 여기 머물게 되었네. 어쨌든 이곳엔 내가 무얼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내가 어떻게든 소용에 닿을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 무엇보다 빈둥거리는 나날 속에서 내 자신이 녹슬어 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네. 만일 신이 도움을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집을 떠나 고관 댁의 가정교사나 비서직이라도 알아보는 것 외에 무슨 별 뾰족한 수가 있겠나. 아니면 어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책읽기라도 가르쳐야겠지. 여기 가족들에게는 마치 내가 죽은 듯이 하고 말이야. 사실 그들은 나 없이 더 잘 살아갈걸세. 돈만 축내고 살지만 그렇다고 안쓰고 살 도리도 없으니, 이야말로 짐이 아니고 뭐겠나.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자네를 불편하고 난처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단지 내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다시는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으려 함일세. 그 일은 서로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으니 말일세.
이후 서신 교환은 뜸해졌다. 베토리는 이러한 절규에 대해서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날 때까지도 답하지 않았다. 이 동안 그는 친구가 (엄청나게 가슴 아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있을 법한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7월 27일 편지를 보내왔으나, 그 내용은 온통 돈으로 신분을 사려는 장사꾼 도나토 델 코르노의 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드높은 꿈과 그가 의연함 속에서도 내비쳤던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왔다. 설사 그것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쿠피드의 화살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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