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4장 첫 프랑스 사절 시기
니콜로가 피사에서의 위험한 임무를 위해 출발하던 5월 10일 바로 그날에, 그는 아버지를 잃엇다. 어머니는 4년 전인 1496년 10월 11이레 세상을 떠났다. 누나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베르나르도 미네르베티라는 남편을 맞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단지 남동생인 토토뿐이었는데, 그는 사제의 길을 택하였거나 혹은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히 니콜로는 아버지를 잃은 누구나가 그러한 것보다 그의 공백을 더욱 뚜렷이 느꼈을 것이며, 일생 중 그대로 고통이 덜한 때를 생각하며 달래게 마련인 충격의 흔적은 더 무겁게 그의 말음을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메쎄르 베르나르도와 니콜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둘은 익살맞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거의 형제 사이와 같이 가까웠으며, 서로간에 말이나 글로, 또는 산문이나 시로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니콜로는 아버지가 운명한 후 그가 썼던 사물(사물)과 일찍이 자신의 어린마음을 담아두었던 손때 묻은 책들을 정리하다가, 이런저런 것들 사이에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써 보낸 소네트 한편을 발견하였다. 이 시는 그가 시골의 아버지에게서 살찐 거위 한 마리를 받았을 때 썼던 것이었다. 메쎄르 베르나르도는 아들이 시내에서 바쁜 나머지 말리비틀어 진 육포와 건과로, 혹은 (빵과 나이프)만으로 식사를 대충 때우고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달 도 더 넘게
호두와 무화과와 콩과 육포를 먹고 살았네.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네
오랬동안 그곳에 그렇게 머문다는 것이.
마치 피레솔레의 황소가 굶주린 채로
제 콧등을 핥으며 아르노 강을 내려다보듯이,
야채 가게 여주인의 달걀과
푸줏간의 양고기, 쇠고기를 쳐다보고난 있었지.
(...)
그러다 마침내,
나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사 보내셨지
오리와 거위를. 당신께서는 잡숫지 않으시고.
이젠 고인이 된 베르나르도여! 그의 위대한 니콜로는 그가 운명한 후에도 여전히 애정 어린 친근함으로 또 다른 농담을 던질지니. 1504년경이었던가. 산타 크레체의 한 수도사가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마키아벨리 가의 묘역에 불법적으로 다른 사람이 묘를 썼으니 빨리 그것을 옮기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니콜로는 (그 수도사의 장광설에 대해 ) 이렇게 답하였다. (뭐 그대로 두시구려. 제 부친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셨으니, 동무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실 테니까요.) 그러한 농담 속에서 우리는 불경함을 느끼기보다는 다른 준은 이들을 향한 동정심을 본다. 그것은 불손함도 무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몇 년후, 일찍이 아버지가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던 것을 이행했을 때 보여준, 그의 위대함에 걸맞는 커다란 관용의 마음이며 후하고 너그러운 품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니콜로는 바삐 돌아가는 공무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사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이지만 그것을 동생인 토토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의논할 틈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베르나르도가 운명한 당시는 서기국이 피사 원정을 준비하느라 허둥대고 있을 때였으며, 얼마 후 그도 사절과 함께 전장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다음 임지로 가야만 했는데, 이번 목적지는 프랑스였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는 첫 해의 임무이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든 경력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피사 원정에서 진짜로 얻은 것은(그 일에 쏟은 노고와 그 과정에서 겪은 위엄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6피오리노 금화가 아니라, 바로 이 여행 그 자체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가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토스카나 밖에 나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그는 가방 속에,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I Commentari)를 놓고 외국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 호기심 많은 관찰자에게 외국 사람들이란 마치 막 첫장을 펼친 책처럼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미지의 대상이었다. 자시의 고향 피렌체는 마키차벨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었음에 틀림없지만,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바로 그 민족들이 이제는 거꾸로 피렌체와 이탈리아에, 그리고 특히 마키아벨리라는 천재 정치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차례였다. 그들은 강력한 통일성에서 나왔다. 그들은 복종의 관습에 잘 적응되어 있었고 자국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주의 이름 아래 뭉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이미 프랑스 대사로 프란체스코 괄테로티와 로렌초 렌치를 파견해 놓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카사와 마키아벨리가 도착한 후에도 그곳에 남아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특별 사절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두사람이 만다타리오로 지칭되고는 있었지만, 이번의 파견은 7월 18일자 결의 사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델라 카사와 마키아벨리는 지위와 권위의 측면에서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전자가 나이나 신분 면에서 위인 데다가 공문서에서 먼저 거명되었고 사절 신임장의 말미에 먼저 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점들이 그들 사이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신임장의 내용도 모두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기 작가나 문학사가들은 둘의 봉급이 다르다는 사실에 오도되어 이러한 점을 잘 알지 목하고 있었다. 카사의 경우 매일 8리라(즉 당시의 가치로 따져서 1과 3분의 1 피오리노 금화)와 일당을 받은 반면 마키아벨리는 4리라를 받앗다. 빌라리는 후자가 (더 하급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봉급을 반밖에 못 받은 것인가? 사실은 이러하다. 델라 카사는 국가로부터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급료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사절 선임 과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공화국이 그가 받기로 되어 있던 특별 수당에서 서기국의 관습에 따라 (그의 정상 급여)를 감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가외의 급료를 더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무위원회 판단으로는, 그들 자신의 변명과 불만이 남들의 불만과 비난보다 먼저 왕국에 전달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래서 대사들에게 훈련을 전하기에 앞서 이러한 점을 빨리 주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그들이 받은 지시는 이랬다. (힘이 닿는 한말에서 내리지 말고 가능한 빨리 가라.) 이에 따라 그들은 7워 18일에 목적지로 출발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여행 속도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볼로냐에서 멈추었는데, 이는 정무위원회의 명령으로 벤티볼리오와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파르마에서 피아첸차로 가는 동안, 그들은 피사의 진지에서 이탈한 천여 명의 스위스 병사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에 대한 앞서의 경험도 잇고 해서, 부득이하게 그들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러한 상황은 마키아벨리의 여정을 지연시키기보다는 더 재촉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지만 (혼란과 사고) 때문에 두 사절은 도중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일에 대한 열의로 충만되어) 그들이 리용에 도착한 때는 7월 26일었다. 앞서부터 그곳에 상주해 있었던 두 명의 대사 중에 괄테로티는 이미 이탈리아로 떠난 상태였고 렌치는 왕국의 분위기와 임무 수행의 방법에 대한 특별 정보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극소에 남아 있었다. 원래 그에게는 사절들을 왕에 알현케 해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마키아벨리 일행이 도착하기전에 이미 리용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렌치는 귀국길로부터 더 멀어지는 여행에는 더 이상 같이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사실 그는, (스스로 피렌체에 보고했듯이 이제 (어떤 큰 일도 다룰 수 있는 )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 직후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동안 신임 사저들의 열의는 리용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이 역마로 달려왔기 때문에, 말이며 하인이며 옷가지들을 그속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공화국은 사절들에게 그리 넉넉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일행은 떠나기 전에 선금으로 각자 80피오리노씩 지급받았으나, 한 주 만에 각자가 쓴 돈이 벌써 30피오리노에 달했다. 이는 무려 22일분의 급료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리용에서 머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졍부로부터 받은 현금은 모두 바닥이 났으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가져온 돈까지도 상당액을 써버린 상태였다. 아니, 그들은 결코 프랑스 땅에서 여유로울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7월 30일, 결국 그들은 스스로 왕의 일행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은 그에 지불된 돈만큼의 힘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왕은 당시 시골에 만연하고 있던 역병을 피해서 요리조리 신속하게 길을 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5일, 그들은 생피에르 르 쿠티에에 가 가 있었으며, 따라서 네베에 머물고 있던 왕을 거의 따라잡을 뻔하였다. 그들은 그 조그만 마을에서 정무위원회에 보내는 각자의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 속에서 (슬쩍) 자신의 개인적 요구 사항을 담은 편지를 끼워넣었다. 그 내용은 그나 동료나 둘 다 쓰는 돈이 다를 바 없으니 자신의 급료를 동료와 똑같이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어조는 자못 대담하다.(만일 제가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저 역시 프란체스코만큼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다달이 저에게 지급되는 20두카토가 쓸데없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뒤의 경우가 맞다면, 원컨대 저를 소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사절들은 (모든 불편과 감염의 두려움도 뒤로 한 채) 드디어 네베에서 왕의 일행과 만났다. 그들은 도착 즉시 루앙을 접견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 말을 빌린다면, 우리가 이후로 전능의 조르주 당브와즈이며 루앙의 추기경이라 부를 인물이었다. 추기경과, 그를 통해 그 직후 만난 왕과의 첫 대면은 솔직하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이든 장관이든 어느 구구도 피사 공략에서 나타난 무질서한 상황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임무의 핵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랑스인들에게는 단지 수치일 분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인 즉, 피렌체인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이 있으며 자신들 역시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이미 과거사이므로 지금부터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왕의 명예를 되찾고 공화국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애써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프랑스어와 궁정 라틴어를 섞어가면서 말했지만, 그것을 보통의 피렌체 말로 옮기면 결국 왕 군대의 유지비용을 여전히 피렌체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절의 고민은 그들의 용건이 끝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들이 온 것은 단지 피사 건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고 상대방에게 잘못을 전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들은 공화국이 전쟁을 계속할 돈도 그와 같은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의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 스스로가 피사 공략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중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과 그를 둘러싼 장관들은 즉각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반란과 도주의 오명을 얻은 스위스 군에 대한 급료는 여전히 피렌체인들의 몫이기 때문에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뼈있는 말들이 오가자, 이야기는 처음과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피렌체 사절들을 물러가게 하면서, 왕은 앞으로 3일쯤 뒤에 몽타르지에 머물 테니 그곳으로 좀더 나은 제안을 들고 오기 바란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들은 8월 10일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곧 여전히 앞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루앙과 언쟁을 벌였다. 그들간의 대화는 거의 언제나 귀머거리들이 논쟁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각각의 상대방의 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싫증날 정도로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피렌체인들을 비난하였다. 첫째, 마키아벨리가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듯이, 왕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피렌체인의 돈으로 피사 전투를 계속하려 하지 않는 것. 둘째, 스위스 군이 피사 공략에서 이탈한 후 그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셋째, 스위스 군 사건 이후 왕의 다른 군대가 피렌체의 영토내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한 것. 마키아벨리는 정무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정무위원님들께서는 결코 훌륭한 편지나 달변의 연설들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도시가 프랑스 왕가에 보여온 신뢰감이나, 전왕의 시대에 했던 일들, 우리가 그 동안 쓴 돈, 그 동안 겪었던 위험, 얼마나 자주 헛되이 돈을 썼는지, 최근의 사건들과 우리의 힘이 커짐으로써 왕의 권력은 이탈리아 내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확보되리라는 것,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은 믿기 힘들다는 것들을 아무리 얘기하려 해봐야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문제들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곳 상황에 어두운 사람들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과 현재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으며 오직 군세를 갖추거나 돈을 줄 것 같은 자들만을 높이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지쳐서 합리적인 선 이상을 넘지 않으려는 공화국이란 모루와,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길 뿐인 왕이란 망치 사이(모루 incudine와 망치 martello의 비유는 진퇴양난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표현임 - 옮긴이)에서, 그리고 급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왕궁과 대답을 거의 내놓으려 하지 않는 정무위원회 사이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다니지 불충분하고 보상도 없는 위임적 위치에 서 있던 두 사절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지옥과 같이 느껴졌으며 결국은 사태가 조국의 파멸로 끝날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인들의 요구를 무언가 받아줄 만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한 우리의 계급과 위신으로 침몰 직전의 상황을 다시 되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임 전권 대사를 보내는 거시 필요하며, 덧붙여(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사절들의 불안감은 필요시 특별 전령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궁한 당시의 처지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결국 다시 재촉한 끝에 급료를 올려 받게 되었다. 이는 동생인 토토의 노력과 곤팔로니에레의 호의 덕분이었다. 이 소식을 먼저 전해 준 것은 바로 토토였다. 이 결과 겉으로 보아 마키아벨리의 수당은 동료와 같아졌지만, 그가 정상적으로 받는 봉급까지 계산에 넣을 때 사실상 그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그는 또 그 같은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얘기된 바이지만, 사절의 협상 과장에 대한 명문의 편지들도 모두 바로 그의 자필로 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필체보다는 문체 쪽이다. 피렌체에서 그 편지들은 큰 찬사를 받았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찬사는 어느 날 그러한 찬사를 전해 들은 진실된 성품의 부오나코르시가 그 편지들이 얼마나 쉽고도 명쾌하게 씌어졌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이와 같은 수입의 증대와 피렌체인들의 찬사 덕분에 그는 프랑스에서 겪고 잇던 고통을 일부나마 덜게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절친한 부오나코르시의 편지가 역시 큰 위안이 되었는데, 그는 니콜로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 서기국의 용병들 중에서도) ((용병 glistradiotti)이란 원래 16세기 당시 베네치아가 고용한 마케도니아 혹은 슬라브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마도 서기국 관리끼리 스스로를 지칭하는 일종의 속어인 것으로 생각된다 - 옮긴이) 그 이상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한껏 우쭐해 있었다. 물론 니콜로는 다른 (용병들)의 추신이 달린 다정하고 유쾌한 편지들도 받았는데, 모두가 그가 없는 사무국은 분위기가 영 재미없고 쓸쓸하다며 그쪽이라도 (제발 빌어먹길) 바란다는 (문장 속에 (제발 빌어먹길 mille cancheri)이란 표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허물없는 사이에 주고받는 반어적 의미의 속어로 생각된다 - 옮긴이) 애정어린 내용이었다.
그 동안 왕은 몽타르지에서 멜뤼으로 옮겨갔으며, 피렌체 사절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처한 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들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시임 대사가 그러한 대답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그러한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프랑스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 먼저 프란체스코 페피가 대사로 선출되었으나 가려 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루카 델리 알비치가 다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피렌체 사절들이 그의 임명 소식을 왕국에 알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자신이 갈 수 없는 사유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가 사적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스스로 내세운 이유는 몸이 불편하고 경비도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조반니 리돌피가 뽑혔지만, 그들 역시 알비치처럼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키아벨리 일행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9월 3일쯤에는 급보를 전하기 위한 돈조차도 수중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잭 없이 즉시 그곳을 떠나 작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위협은 점점 더 커져갔다. 루앙은 심각한 경고를 보냈고, 이는 왕과 피렌체 간의 사이가 완전히 파국 상태를 맞는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고토록 많은 비용과 그토록 깊은 염원을 갖고 추구해 왔던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이런 식으로 와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편지에 써 보냈다. 피렌체로부터의 대답은 여전히 열을 달라는데 겨우 하나만 주거나 아니면 아예 이도 저도 없는 정도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9월 20일 자의 한 편지에서, 정무위원회는 대사로 보낼 사람도 찾을 수 없고 (그러한 임무를 수행케 할 만한 히도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시민들의 생각을 왕의 요구에 따르도록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왕이 만족할 정도의 돈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피렌체 사정은(재정 결핍)을 이유로 사절들이 그토록 애타게 요쳥해 왔던 작은 액수의 돈조차도 주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피렌체 공화국은 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부딪히자,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심신을 편히하기 위해 파리로 가버렸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왕을 쫓아 블로아로 갔다. 혼자 남은 그는 두 사람 몫의 열성을 가지고 루앙과 왕을 타협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이리저러 애써보았지만, 협상 거리도 없이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하려고 왕궁의 분위기를 그려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의 장기인 날카롭고 단호한 판단력이 잘 드러난다. 며칠 전의 편지에서 그는, 왕이 나폴리 원정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키는 이유로(특히 그가 피사의 예를 통해 최근에 보았듯이, 힘이 필요한 곳에서는 분필과 명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폴리의 서기장이 여기에 와서 합의를 끌어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일단 무언가를 약속하고 주려는 경우에만 귀를 기울이는 족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곧 받아들여지리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새로운 생가가 거리를 찾았는데, 그것은 발렌티노가 교황의 이름과 돈을 빌려 또 다른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콜론나 가를, 또 혹자는 파엔차, 리미니, 페자로를 비롯한 로마냐 지방의 참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혹은 불로냐를 치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이 모든 일을 용인한 이유는 발렌티노가 승리하는 것을 정말 원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야욕이 비록 무절제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 공공연히 저항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르자 가의 야욕이 겨냥한 것은 로마냐였음이 곧 밝혀졌지만, 그들이 과연 그것에 만족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시 피렌체인들의 의심을 샀다. 그러다가 이 교황의 아들이 메디치 가와 음모를 꾸미는 듯한 기미를 보이는 데다가 그가 피에로를 권좌에 복귀시키겠다고 드러내놓고 거들먹거리자, 피렌체인들의 의심은 급기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태는 말하자면 공화국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프랑스와의 친선이 바야흐로 노골적인 적대 관계로 바뀌려는 바로 그 시점에 태풍을 알리는 먹구름이 공화국의 경계로 몰려들고 있는 형국인 셈이었다. 10월 11일에도 마키아벨리는 어쩔 도리없이 대사가 스위스 용병의 봉급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여전히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루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게 그거지. 사실이야. 히지만 우리는 그 대사라는 친구가 오기 전에 다 죽고 말거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죽는 꼴을 보게 될걸세.) 피렌체인들을 불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르자가 즉각 손을 든 리미니와 페자로를 수중에 넣는 동안, 두려움으로 인해 갑자기 제정신을 되찾게 된 피렌체인들은 곧 대사와 돈을 조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왕의 일행을 쫒아 낭트로가 있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신임 대사 피에르프란체스코 토싱기가 만족스런 답변을 가지고 10월 16일 이쪽을 떠났음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답변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1월 4일 왕으로 하여금 발렌티노가 피렌체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짓을 추호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점을 그에게 알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에게 보내도록 할 정도는 되었다. 바로 이날 보르자의 야심에 대한 이러한 토론중에 나온 것이 추기경에 대한 그의 유명한 응답이었다. 그 내용인즉, 루앙이 이탈리아인들은 도대체 전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즉시 프랑스인들은 정치 lo stato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반박하면서 그것을 안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큰 힘을 가지도록 방치했겠느냐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이 전능의 대신관 맞설 만한 대담성과 기민성만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이 보낸 거의 모든 편지 속에서, 현상태의 피렌체를 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왕의 힘 앞에서는 과거의 분노와 이유와 권리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쪽이 현명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일만 두카토는 바로 내고 나머지는 분할하는 방법으로 스위스 용병에 대한 말썽 많은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왕은 돈이 늦어지는 것을 흔쾌해하지 않았지만, 분할금은 그들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액수로 쪼개졌고,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왕궁에서 좀더 나은 시간을 보내 수가 있었다.
그는 또한 이제 곧 고향 땅과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아마 이제는 애정이 식은 집보다는 일더미가 쌓여 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로 가득 차 서기국으로 되돌아갈 욕심이 더 컸을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 오래 머무는 동안, 누이 역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결혼했던 바로 그 누이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죽음에도 공무에 바쁜 나머지 미처 슬픔을 나눌 틈도 없었던 그에게 이렇듯 다시금 슬픔이 닥치자, 그는 스스로가 (뒤죽박죽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고 썼던 주변 정리를 위해 이제 돌아가게 해다라고 정부에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이 외에도 그의 귀향을 부추긴 다른 일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친구인 비아조로부터 (그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의 다른 서기보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로부터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어려운 말로 된) (원문의 (in grammatica)란 라틴어를 우회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 옮긴이) 익살스런 장문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의 복귀가 계속 늦어진다면 서기국 관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삶이며 영혼을 다 바쳤던 제2서기국에 있어, 그는 바로 그것의 영혼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서기보들에게서 온 편지들, 그리고 베스푸치에게서 온 최근의 이 편지로 미루어볼 때, 그동안 그들은 서기장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기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던 그의 재치있고 유쾌한 말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왕은 낭트에서 투르로 옮겨갔고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는데, 그때가 11월 21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공화국을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성하(성하)의 신성함에 어울리는)교황에 음모에 관한 자신의 마지막 경고와 조언을 담은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늘 되풀이하던 대로, 그들 스스로는 부정한 맘모나 신의 친구amicox de mammona iniquitatis(맘모나 신의 악덕한 부를 상징하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재물을 주고받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편을 만든다는 것 - 옮긴이가 되어야 하며, 그 길만이 프랑스 궁정에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임 대사가 느긋하게 부임해 오고 잇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는 12월 12일자 편지를 통해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당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귀향길에 올랐지만, 오는 데 한달 반이나 걸린 토싱기보다는 훨씬 더 빠른 발걸음이엇다. 그는 1501년 1얼 14일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프랑스 땅에 머물고도 그는 안장 주머니를 채울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다. 아마 리용이나 파리의 인쇄소에서 나온 책 한 권도 들고 오지 않았으리라. 15세기를 마감하는 그 해의 한 이탈리아 휴머니스트에게 당시의 프랑스 문학이란 아직 별것이 아니었으며, 비용의 발라드조차도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 그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모르긴 해도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어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 정도를 가지게 된 것을 확실하겠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음미하지는 못했을 거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가 왕궁에서 들은 것은 우리가 앞서 본 바대로(예컨데 주 29의 본문에 있는 루앙의 말은 원문에는 라틴d어로 적혀있다. - 옮긴이) 세련되지 못한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호기심 많고 영민한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도 없이 6개월을 한 나라에서 보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k 그랬듯이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묻고 말하는데 열심이었을 것이다. 무론 당시 프랑스 평민들이 학식있고 명민한 피렌체인들과는 비교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사절 임무에 관한 통신문들중, 궁정에서 일어난 토의 과정을 기술할 때 그는 보라는 듯이 약간의 프랑스어를 쓰거나 또는 말을 프랑스어식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그래도 한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인에게는 별 소용이 없겠지만(사실 그는 문인은 아니었다), 정치 관측자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 법하다. 이는 좌우간 그의 정신을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종이에 쓰기보다는 마음속에 담아온 관찰 의 보따리에다가 이번 여행이 덧붙여준 또 하나의 유용한 지식이었다. (프랑스 견문 Ritratti delle cose di Francia)이나, 또는 (갈리아 관측기 Denatrua Gallorum)(지나치게 경직된 독일 학계는 이 글의 저술연대를 이 시기로 잘못 비정해 왔다) 처럼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조차도, 바로 이러한 첫 프랑스 사절의 경험 속에서 아직 모양이 다 갖추어 지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자양분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열매는 결코 금방 익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열매라기보다는 차라리 씨앗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른 유사한 경험들과 어우러져 어느 날 마키아벨리의 정신과 사상 속에서 싹이 트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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