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3부 에로스의 저항
1. 프로이트와 스피박의 문화비평
올림포스 산의 숲속에는 아름다운 요정 에코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제우스 신의 아내 헤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남편이 다른 요정과 바람 피우고 있는 현장을 잡으러온 헤라에게 말을 걸어 시간을 지연시킨 죄이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던 에코에게 헤라는 그녀가 다시는 자신의 말을 할 수 없고 오직 남의 말을 뒤따라, 그것도 끝 부분만을 반복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숲속에는 요정들만큼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스가 살고 있었다. 에코는 그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아무런 구애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숲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나르시스의 부름에도 오직 그의 말 끝만을 반복했고 그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을 때도 허락의 말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가 내 가슴에 안겨달라 외칠 때 그것을 허락하는 끝말을 하지만 그녀를 본 나르시스는 냉혹히 거절한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으로 여위고 뼈만 남은 에코는 나중에는 목소리만 남아 쓸쓸히 동굴에서 살며 타인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한편 나르시스를 사랑하는 숲의 요정들은 에코의 슬픈 모습을 본다. 그리고 자신들도 애타게 구했으나 거절당한 사랑의 상처를 복수의 여신에게 빌어서 앙갚음하려 한다. 나르시스를 벌하여 주소서. 그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여 파멸케 해주소서. 복수의 여신은 나르시스의 오만함에 벌을 내린다. 깊은 숲속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고요한 호수가 있었다. 그 물가에서 나르시스는 물 위에 떠오른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에 반해 애타게 구애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의 눈물방울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고 그가 팔을 뻗으면 함께 뻗었다가도 잡으려면 사라지곤 했다. 자신의 모습만을 사랑한 그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인에 의한 고통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일그러지고 가슴은 메말라 죽고 만다.
나르시스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여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사랑의 본질, 환상의 본질이 들어 있기에 프로이트가 그것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 위에 비친 내 모습을 타인으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 자신을 대상으로 착각하는 환상 우리는 연인의 얼굴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고 모든 이념 속에서도 제 얼굴만 보는 것은 아닐까. 연인이란 내가 세운 이상적 자아이고 그것과 합일을 원하는 것은 내가 그것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대상이란 또 하나의 독립된 인간일 뿐 결코 내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믿는 본능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고통을 겪고 상처를 주고 배반의 쓰라림을 겪는가. 프로이트는 바로 이 고통의 근원을 탐색했다. 그가 가설로 내세운 무의식, 유아기 성, 쾌감원칙은 인간 속에 내재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프로이트 이론의 현실원칙이요, 문명의 시작이라면 나르시시즘은 에로스의 본질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제삼자의 존재를 의식하기 이전, 오직 너와 나만 있는 세상, 오직 네 모습에서도 나만을 보는 유아기 단계가 나르시시즘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지나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무의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요, 이 무의식을 억압하며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되는 게 오이디푸스 단계이다. 현실원칙에 순응하더라도 억압된 무의식은 틈틈이 현실의 옷을 입고 위장하여 되돌아오기에 프로이트는 그토록 수많은 글들 속에서 본능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썼다. 교육의 힘으로 다져진 의식 밑에 억압된 무의식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나르시시즘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이었다. 어머니와 나의 욕망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믿는 상상계적 오인은 물 위에 비친 제 모습을 대상으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의 오인과 다를 게 없다. 아이의 성은 사춘기에 이르러 새로운 대상을 향해 옮아가는데 이때 억압된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남아대상의 선택에 환상이 개입된다. 그는 자신의 성본능과 에고본능을 충족시켜줄 것이라고 믿는 연인을 향해 다가선다. 연인은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어머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을 받으면 나의 자존심이 세워지고 그렇지 못하면 나의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흠모와 증오가 교차한다. 대상은 결코 근원적 어머니가 될 수 없고 나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은 원래 자기사정에서 나오기에 사랑 속에는 늘 대상에 대한 소유욕과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일어나는 증오가 도사린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의 주체이론에서 억압된 무의식이요, 쾌감원칙이다. 문학에서는 은유이고 라캉에 오면 상상계가 된다.
이런 식으로 나르시스 신화는 에코의 이야기를 떼어버리고 수많은 인용을 낳는다. 인간이 사회화되기 전의 동물적 본능을 가리키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이기심을 가리키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이 억압된 유아기 성, 혹은 나르시시즘에 혁명적인 시선을 보내다가 차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이 더 나르시스적이어서 보상심리로 허영심이 많고 그것을 승화시키지 못해 역사적으로 큰 일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프로이트는 어떻게 읽혀질까. 최근의 문화비평의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보자. 제국주의 비판과 페미니즘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여성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경우를 살펴본다.
프로이트와 문화비평 : 어떻게 주체적인 읽기가 가능한가
윤리적 주체로서의 에코
스피박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인으로 데리다의 해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 서구의 대가들을 정확히 읽고 그들의 이론 뒤에 숨은 제국주의적 혹은 중심주의적 오인을 들추어 전복함으로써 비서구인의 비판적 읽기를 시도한다. 그녀는20세기 인도의 철학자, 마티랄(B.K.Matilal)을 통해 서구와 동양의 윤리학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모색한다. 인도인들은 논리에 바탕을 둔 서구철학이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인도철학과 다르기에 서구에 저항하는 인도 고유의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어떤 것이 인도 고유의 것인지 가려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대안은 비 유럽문화 속에 갇히지 말고 서구의 것을 정확히 알아서 그것에 저항하는 전략적인 읽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데리다의 해체에서 자리바꿈(displacement)이라는 전략을 빌어와 남성 중심주의의 허구를 들추어 여성으로서의 읽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제 제3세계인으로서 제국주의에도 저항하는 이중비판을 수행한다. 본질은 이미 반복인데도 인간은 본질을 말하는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데리다의 '차연'은 구조주의의 정반의 차이에 시간이 결합되어 온갖 우열의 차이를 없애는 정치적인 전략이다. 본질은 이미 차이의 철학인 구조주의에서부터 열려 있었다. 스피박은 데리다 이후의 마르크시즘을 생각한다. 해체 이후의 정치성은 전통 마르크시즘처럼 본질, 혹은 고유가치로서의 주장이 아니고 오직 전략으로서의 주장이다. 진리는 니체의 말처럼 힘들의 전략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구문화가 억압해온 에코, 나르시시즘에 억압되어온 에코를 어떻게 귀환시키나. 그러나 결코 에코는 나르시시즘이 저지른 남성 우월주의와 제국 우월주의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자신이 더 진리라고 보여서는 안 된다. 나르시스만이 전부가 아니고 둘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에코의 이야기를 제외시 켜온 서구의 나르시스 중심주의를 전복해보자.
프로이트는 무의식 중에 에코의 부분을 제외하고 나르시스의 이야기만을 도려내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고 이렇게 서사의 틀을 무시한 것은 라캉도 마찬가지다. 에코는 서구신화에서 억울하게 벌을 받은 요정이다. 그녀는 제우스를 위해 일했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티리어시스는 제우스와 헤라가 남녀의 성적 결합에서 누구의 희열이 더 크겠느냐고 물었을 때 제우스의 편을 들었다. 분노한 헤라가 그의 눈을 멀게 했을 때 제우스는 대신에 그에게 예언가의 지혜를 주어 보상했다. 그런데 에코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그녀는 억압 받는 하위계층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오늘날 인간이 하는 짓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여자를 하찮게 여긴 것도 그랬나 보다. 아무튼 스피박은 제우스신 이래 서구인들이 억압해온 에코를 찾아내어 그녀를 윤리적 주체로 부활시킨다.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되는가. 에코가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오직 늦게 그것도 끝부분만 반복하는 것을 눈여겨보자. 나르시스는 말을 못하여 남의 속만 태우게 하는 에코에게 묻는다.
그대는 왜 내게서 도망가시오?(Why do you fly from me?)
나르시스가 답답하여 소리치면 그녀는 그저 '내게서 도망가시오'(Fly from me)라고 뒷부분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허락할 수 있었던 끝말의 반복을 마쳤을 때 물론 그는 에코를 거절한다. 매혹은 허락하는 순간, 손에 쥐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너무도 아름다워 자신만을 사랑할 운명을 타고난 나르시스의 비극은 자신이 보여지는 존재, 요정들의 원한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데서 시작된다. 라캉이 욕망이론에서 보여짐을 모르는 상상계를 거울단계라고 한 것은 나르시스의 비극을 잘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요정들에 의해 보여 지는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라캉의 타자의식에서도 에코는 여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스피박은 에코의 말 "내게서 도망가시오"에 초점을 맞춘다. 나르시스는 대상을 추구하고 내게서 도망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물 위에 비친 제 모습만을 사랑하기에 그 대상을 얻는 순간 그것을 잃고 만다. 에코가 허락하는 순간 그녀를 거부했듯이 물 위에 비치는 제 모습을 잡는 순간이 곧 죽음이듯이 그는 대상을 소유하려 하지만 영원히 포착하지 못한다. 대상은 대상일 뿐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르시스적 인식론이 겪는 논리의 아포리아이다. 그러나 에코는 대상을 포착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과 행위는 나르시스와 달리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우연 속으로 흩어진다. 그저 타인의 욕망에 불완전하게 호응할 뿐이다. "Why do you fly from me?"라고 물으면 오직 "Fly from me"라고 반복한다. 그녀의 대답은 다르고 늦게 온다. 차연이요, 흔적이고 산종이다. 앞의 것이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지배의 언어라면 뒤의 것은 대상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해방의 언어다.
스피박은 나르시스 이야기를 의미의 고정, 고집스런 자기 동일성, 라캉의 거울단계로 보아 계몽주의 이후 남근 중심주의, 식민지 담론, 배타 적 민족주의로 본다. 이에 비해 에코는 앞의 것을 따라하는데 오직 늦게 다르게 하기에 의미의 산종, 흔적 글쓰기, 여성, 흑인 소수민족, 해체 그리고 탈식민지 담론으로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르시스를 인식주체로 에코를 윤리적 주체로 보아 그녀의 신비스런 책임성을 암시한다. 인식론의 아포리아를 벗어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책임의식을 갖는 길은 나르시스적 인식주체에서 에코적 윤리의 주체로 넘어서는 것이다. 스피박은 에코에게 보답 없이 벌만을 내린 오비디우스, 에코를 지워버린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인식론적 아포리아에 머문 데리다를 다시 읽어 윤리적 주체로서 에코를 되살려낸다. 에코는 지금까지 서구 중심주의 역사에 서 있으면서도 지워져온 여성이기도 하고 억압되어온 인도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피박은 선배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그들과 다르게 읽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그들보다 늦게 읽으면서 그들이 범한 중심주의를 되풀이하지 않으므로 차연이요 산종이다. 그리고 나르시스의 말을 늦게 다르게 반복하는 에코의 언어이다. 선배와 후배는 동반자이면서 라이벌인 것이다.
동반자이면서 맞수.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무의식을 강조하던 프로이트는 점차 초기의 혁명성을 잃고 후기에는 초자아를 설정하여 문명과 사회현상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의 성이론이 유아기 성이나 오이디푸스 전단계를 강조하던 전반부의 글과 성차가 별 의심을 받지 않던 당시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던 후기의 '여성성'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악명 높은 '남근선망'이나 '거세 콤플렉스'는 여성의 열등성을 열심히 설명해낼 때의 프로이트요, 최근의 페미니스트들이 그가 발견한 무의식에서 혁명성을 끌어낼 때는 자연주의 사상과 에너지 불변의 법칙등 초기의 억압된 것을 들출 때이다. 남근선망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는 시각 중심주의 오류라고 여성이론가들은 말한다. 스피박은 오비디우스의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듯이 버지니아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정밀히 읽어서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생산능력을 밝힌다. '등대로'는 아내가 죽고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등대에 도착하는 램지 씨가족과 램지 부인을 그리지 못하던 화가 릴리가 그 순간 하나의 긴 획을 그려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시킨다는 이야기다. 3부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1부가 '창문'으로 램지 부인의 결혼생활, 2부는 '시간이 흘러서'로 전쟁으로 가족이 흩어지고 부인이 죽는 이야기 3부 '등대'는 남은 램지 씨와 아들들이 등대에 도착하여 릴리가 초상화의 한 획을 긋는 이야기다. 스피박은 이 소설에서 램지 부인이라는 텍스트를 철학자인 램지 씨와 예술가인 릴리가 어떻게 다르게 읽어내는가로 본다. 순수이성과 심미적 이성의 대조요, 인식론적 주체와 윤리적 주체의 대조이다. 1부 '창문'에서 램지 부인은 남성들의 메마름을 다스리며 가정의 화목과 사랑을 확인하지만 언어를 믿지 않는다. 램지 씨는 Q 다음에 오는 R, 즉 자기 이름의 첫글자인 R에 도달할 것을 꿈꾼다. 그는 부권적 전유와 언어의 절대성을 믿는다. 그러나 결코 아내를 언어로 그려내지 못하기에 그의 꿈은 좌절된다. 2부 '시간이 흘러서'는 램지 씨의 결혼의 언어와 릴리의 예술의 언어를 이어주는 접목부분이다. 실제 울프의 삶에서는 램지 부인의 모델이었던 어머니가 죽고(1894) 전쟁(1914-18)이 끝나고 울프 자신은 정신이상으로 몇 번의 발작을 겪던 시기였다. 그러기에 이 접목부분은 불안정하고 따라서 램지 부인이 누구인가(기표)에 대한 대답(기의)은불안정하다. 기표와 기의는 일치하지 못하고 진실에의 접근은 쉽지 않다. 식구들이 흩어지고 램지 부인이 죽듯이 모든 게 흩어지고 인간과 자연을 연결짓는 고리는 상실된다. 재현의 거울이 사라진 지금 램지 부인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것이 살아남은 램지 씨와 아들이 등대를 향해가는 제3부에서 릴리가 맡은 임무다. 3부 '등대'는 예술가가 심미적 비전을 얻는 과정을 그린 것이요, 언어가 아닌 추상으로 이루어지는 재현이다. 릴리는 43세의 울프 자신이요, 화가인 여동생 바네사를 모델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여성적 감수성과 남성적 능력을 가진 양성적 존재이다. 램지 씨가 등대에 발을 딛는 것을 상상하며 릴리는 갑작스런 계시 속에서 직선을 긋는다. 길다랗게 그은 그 한획은 잠정적인 것이다. 폴 드 만의 시간의 수사성처럼 램지부인에 대한 알레고리적 읽기이다.
그런데 정말 릴리는 양성적이고 자족적인가? 스피박은 '첨가'된 글로 앞의 논리를 뒤엎는다. 릴리는 남자를 이용하여 심미적 비전을 얻는다.그녀는 순수 이성주체인 램지 씨를 이용하여 램지 부인이라는 예술을 창조하는 심미적 주체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버지를 이용하여 어머니를 낳는 생산자가 아닌가. 남근을 부러워하는 딸이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흠모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다는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은 혹시 여성의 생산능력을 억압하고 나온 가설이 아닌가. 릴리는 아버지를 이용해 어머니를 재현하는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는 여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기에 신경증 환자가 많고 사회적으로 창조적인 활동을 못하고 역사적으로도 인류에 공헌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릴리는 아버지를 이용해 어머니를 재현하는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릴리의 창조행위는 램지 씨의 시도와 달리 잠정적인 알레고리로 에코의 말처럼 흔적이요, 얼마든지 다르게 반복될 수 있는 산종이다. 스피박은 릴리를 이용하여 프로이트를 다르게 반복하고 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이리가레이가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을 공격하며 왜 여성의 자궁은 인정하지 않는가 물었듯이 스피박은 정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그녀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화가인 릴리는 철학자인 램지 씨를 이용하여 램지 부인이라는 예술 텍스트를 낳는다. 남성들이 그토록 내세운 남근숭배를 의심해보자. 혹시 자신들의 생산능력이 없음을 감추기 위해 여정의 자궁을 결핍으로 규정지은 것은 아닌가. 남근선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자궁선망을 그것과 대립시켜보자는 것이다. 푸코가 말했듯이 결코 권력의 형식으로부터 진리를 분리시킬 수는 없지만 현재 헤게모니가 작용하는 곳의 진실성을 의심해볼 수는 있다. 이것이 릴리와 램지 씨가 "맞수이면서 동반자"인 이유이다. 둘 다 중심이 될 수 없으면서 둘 다 중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리다 이후, 푸코 이후의 마르크시스트들이 가질 수 있는 정치성이다. 혁명의 자리에 공존과 타협을 놓는 것이다. 아무런 비전을 얻을 수 없다 하여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남성을 도구로 하여 여성에 대한 여성의 비전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등대로'를 읽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스피박은 말한다.
남근선망에 대한 대안으로 자궁선망을 암시한 스피박의 제안은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스피박은 이 글에서 페미니즘 텍스트의 고전이 되다시피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제국주의 비판의 텍스트로 다시 읽는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여주인공 제인의 억눌린 분노와 광기를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 버어사로 해석하여 제인이 어떻게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펴나가는가 보여주었다. 이제 스피박은 버어사가 크레올계 유색인종이었음에 초점을 맞추어 버어사를 제인이 당시 대영제국이 요구하는 가정을 꾸미는데 희생되는 식민지인으로 해석한다. 문화는 당대의 이념을 심는다. 가치중립적인 텍스트란 없다. 19제기 영국소설 속에는 당대 이념을 독자의 무의식 속에 심어주는 정치적인 욕망이 있다. 가치중립적인 언어란 없다는 푸코나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입장에서 스피박은 문화비평을 시도한다. 그녀는 억압되어온 유색인 여성작가, 진 리이스(Jean Rhys)의 텍스트 '드넓은 사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1965)를 복원하고 19세기 메어리 셀리가 쓴 '프랑켄슈타인'(1818)도 다시 읽는다. 연구실에서 과학의 힘으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박사의 욕망은 인간을 창조해내는 여성의 자궁에 대한 남성의 선망에서 나온 게 아니냐. 또한 박사가 괴물의 씨를 퍼뜨리지 못하게 막는 것은 식민지인에 대한 제국의 야망이 아니냐. 그러기에 셀리는 서사의 틀을 열어놓아 식민지인이 피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스피박의 정밀한 해석은 서사의 가닥가닥을 더듬으며 선배들의 매끄러운 논리 밑에 억압되어온 무의식을 들추어 늦게 그러나 다르게 되받아 읽는다. 이런 저항적 인기가 문화연구의 한 갈래요, 문화비평이다. 문화 비평은 왜 프로이트와 연결되는가.
문화비평과 프로이트
첫째, 일상의 삶이나 대중문화, 혹은 정치 등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세련된 분석방식. 둘째, 문화적 유물론의 발달 다시 말하면 문화적인 작품들이 생산되거나 수용되는 상황들을 연구하는 것. 셋째, 문학작품들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한 작품을 기능케 하고 그것과 관련된 의미들이 어떻게 구조되는가를 보기 위해서 상황과 역사를 읽는 것. 넷째, 이론을 역사화하는 것,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19세기 유럽인(유대인?)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반영하는가, '해체'는 어떻게 프랑스에서 일어난 1968년 5월의 사건과 관련되는가 등등... 위의 글은 1996년 봄 한국에 다녀간 바바라 존슨이 대담에서 밝힌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 대한 정의이다("문학비평의 새로운 방향", '현대문학', 통권 498호, 1996) 미국에서의 문화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로 줄곧 세속적 비평을 주장해온 에드워드 사이드와 관계를 맺고 있다.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이전, 그 외에서 근원을 찾을 수도 있지만 사이드가 예일대학 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해체비평이 여전히 텍스트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불만을 표하며 이제 비평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텍스트와 세상을 연결하자. 문학은 그렇게 가치중립적인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상황의 산물이다. 아니 상황을 반영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것이다. 문화비평은 신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해체비평이 더 정밀한 텍스트 인기에 빠져버린 것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비유적이어서 저자의 의도가 그대로 작품 속에 반영될 수 없고 따라서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가정 아래 작품의 유기적 구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던 신비평이 그 사명을 다할 즈음,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체비평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으나 대단히 미국적이었다. 신비평이 언어를 텍스트 안에 가두었다고 비난하면서 이제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자고 말한 폴 드 만('신비평의 막다른 골목')은 언어를 텍스트 밖으로 끌어냈지만 그것이 실재를 지칭하지 못하는 것을 줄기차게 보여주는 비평의 알레고리를 연출한다. 언어는 객관 실재를 지칭하지 못하고 읽기는 앞선 읽기를 다르게 반복한다. 드 만의 수사비평은 정밀한 텍스트 읽기와 언어가 욕망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읽기는 늘 또다른 읽기를 억압하고 만이 가능하다는 실천비평으로 많은 공헌을 했으나, 사이드가 보기에는 여전히 텍스트 안에 갇히기는 마찬가지였다. 푸코가 이미 말했듯이 지식은 권력과 뗄 수 없다. 권력에의 의지와 지식에의 의지를 인간의 속성으로 본 니체를 다시 끌어들인 푸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을 쓰게 한다. 가치중립적인 언어는 없다. 동양을 읽는 서구의 지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제국의 욕망으로 물들어 있다. 지식이 권력을 창출한다는 가설은 문학을 비롯한 문화현상이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무의식 중에 심어준다는 뜻이다. 19세기 영국 소설인 '폭풍의 언덕'이나 '위대한 유산'을 자세히 보면 식민지인 오스트레일리아는 죄인들이 속죄하러 가는 곳이거나 갑자기 돈을 벌어오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문학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의식 중에 심어준다.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19세기와 20세 기의 영국소설들을 제국과 식민지인의 관계에서 분석했다.
언어와 권력을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보기에 제국은 식민지 문화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고 문학은 당대의 지배 이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화비평은 작품을 욕망과 이념에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단순히 작품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게 아니라 시대의 이념을 어떻게 심어주고 구조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치중립적인 언어가 없다면, 언어가 객관 실재를 지칭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식민지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의 언어 역시 욕망에 물든 정치적 전략이 아닌가. 여기에 인식론적 한계가 있고 데리다와 푸코를 비롯한 해체론자들이 부딪히는 논리의 아포리아가 있다. 사이드는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이 이런 한계에 부딪히자 푸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새롭게 지도했고 그것이 '문화와 제국주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텍스트 분석이 단순해서 사실주의 작품들은 거의 당대 제국의 이념을 벗어나지 못했고, 조셉 콘래드와 E.M.포스터 등의 모던 소설들은 제대로 저항을 못했다는 이분법을 낳는다. 작품을 사실주의 시각에서 스토리 위주로 보았을 뿐 복합적인 형식 속에 들어 있는 저항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호미 바바가 그의 책 '문화의 위치'(1994)에서 똑같은 모던 텍스트를 다르게 분석한 것과 대조된다.
인도인으로서 호미 바바는 프로이트의 '전이', 라캉의 '상상계', 데리다의 '산종', 바흐친의 '대화'등 선배들의 이론틀을 빌려 '문화와 혼혈성'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고 모더니즘의 텍스트가 갖는 복합적인 저항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는 문화란 고유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문화 위에 다른 문화가 덧칠해지는 것으로 정신분석의 전이와 같다고 보았다. 환자와 분석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치료는 환자의 욕망과 그것을 읽어내는 분석자의 욕망이 상호 접촉하면서 의미가 계속 덧붙여져 나간다. 그러므로 치료가 완료되는 순간이란 둘 사이의 욕망이 타협을 보는 순간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무의식을 어딘가에 묻힌 상흔으로 보았으나 후기에 이르러 특히 '전이의 역동성'이나 '분석에 있어서의 구성'과 같은 글들에서 상흔이 복원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했다. 사실 라캉이 벌떡 일어서서 선배를 재해석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분석은 대화 속에서 얻어진다. 진리는 이미 표층에 올라와 있는 것이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정신분석은 둘 사이의 욕망 길들이기이고 예술 작품도, 사랑도, 삶도 둘 사이의 욕망길들이기 이다. 이것은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과도 흡사하다. 그는 나의 말은 이미 반쪽이 타자의 말이라고 했다. 데리다의 산종은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덧칠해져가는 것으로 나의 의식은 고유한 백지가 아니라 앞선 흔적의 타자 위에 또 다시 쓰여지는 요술 책받침과 같다. 우리의 의식이 초를 먹인 셀로판지와 같다고 본 프로이트에게서 데리다가 얻어낸 선물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이론은 앞선 이론 위에 또다시 쓰여지는 흔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프로이트가 현대 이론에 공헌한 것은 나르시시즘 혹은 라캉의 상상계이며 이것은 문화비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상상계적 오인이다. 너는 나요, 나는 곧 너라는 동일시가 제국의 논리라는 것이다. 바바는 이 동일시가 부르는 착오로 식민지 정책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선배들의 것에서 자신의 이론 을 만들어냈고 스피박은 실천적인 읽기를 했다. 그녀에게 나르시시즘은 중심주의 사고이다. 모든 중심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르시스적 본능이다. 그러나 중심주의는 타자를 억압하고만 설 수 있기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 얼룩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라캉의 실재계로 가는 길이었고 스피박의 탈식민주의 여성비평이다. 그녀는 위의 논리를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 여성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낸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정밀하다. 올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으면서 앞선 텍스트를 읽어 그 속에 숨은 얼룩을 짚어낸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근선망이 억압한 자궁선망이나 나르시스가 억압한 에코는 중심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대안이다. 식민지는 제국과 다르지만 열등하지 않고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만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월의 차이 대신에 공존의 차이(difference)를 들여놓은 현대이론은 공존과 대화, 그리고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고유가치를 상실한, 아니 포착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본질에 대한향수보다 표층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를 발전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두고 가는 것, 잃고가는 것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실천비평가라고 말하는 스피박의 읽기는 프로이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데리다, 라캉의 '해체'를 인도 여성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냄으로써 선배들의 인기가 억압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정밀한 텍스트 읽기와 정치적인 전략의 양면을 충족하는 그녀의 읽기에서 프로이트는 그녀 의 선배이면서 동시에 맞서는 라이벌이 된다. 백인 남성에게서 빌려온 논리로 백인 남성을 전복하는 게 스피박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