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2부 미학과 사회이론
2.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인 세상 - 프로이트와 토니 모리슨의 '언캐니'
1. 프로이트의 '언캐니'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 확실치 않아도 1919년에 출판된 글 '언캐니'(The Uncanny)는 미학과 관련이 깊은 프로이트의 글들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 즉 숭고함과 기쁨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관한 연구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반대의 측면, 즉 괴기함,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역시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캐니'와 '언캐니'의 어원과 낱말의 의미에 대한 추적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친근한", "집 같은"(homely), "낯익은"의 뜻을 가진 '캐니'(canny)와 "낯선", "두려운", "놀라운"의 뜻을 가진 '언캐니' (uncanny)는 얼핏 반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이란 고향이요, 친숙함이지만 이방인에게는 비밀을 간직한 괴기하고 신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언캐니는 캐니에 종속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언캐니는 원래 친숙한 것이었는데 억압되었다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낯익은 이성과 명료한 의식 밑에 억압된 무의식이 있고 이 억압된 것은 틈틈이 귀환한다는 프로이트의 핵심사상은 이 글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사회로부터 금기된 쾌감에의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의식 밑에 억압되어 있다가 틈틈이 귀환한다. 이 무의식의 발견 혹은 주장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한 강박적인 반복충동(compulsion torepeat)과 연결되어 프로이트 미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이 글은 다음 해 발표된 '쾌감원칙을 넘어서'의 뼈대가 되는데 최근 미국의 서사론자 피터 브룩스는 '플롯을 따라 읽기'라는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과 '쾌감원칙을 넘어서'를 접목하여 소설분석의 획기적인 작업을 이루어냈다. 독창성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오늘에 맞게 새롭게 읽는 것임을 보여준 예이다. 매혹이란 변함없이 친근한 면과 낯선 면이 합쳐져서 우러나는 것인가 보다.
미학적 매혹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하는 '언캐니'에서 프로이트는 유아 가 어릴 적에 품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거세 콤플렉스가 억압되었다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예로 호프만(Hogmann)의 '모래인간(The sand-Man, 1816)을 든다. 나타니엘은 어릴 적에 유모로부터 잠자리에 들 때 모래인간에 대한 무서운 얘기를 듣는다. 어린아이가 잠을 자지 않으면 모래인간이 나타나 눈을 빼앗아간다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는 아이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 을 남긴다. 아이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원인을 잘 모르는 그 죽음의 현장에는 코펠리우스가 함께 있었고 그는 그후 종적을 감춘다. 나타니엘은 아버지가 코펠리우스와 함께 있다가 죽었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그를 모래인간으로 여긴다. 성장한 나타니엘은 어느 날 코폴라에게서 안경을 산다. 그는 그 안경을 쓰고 맞은 편 집을 훔쳐보게 되는데 그곳에는 올림피아라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고 나타니엘은 약혼자 클라라를 잊을 정도로 맹렬히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소녀는 코폴라와 스팔란지니 교수가 함께 만든 자동인형이었다. 둘이 다툼이 벌어지던 날 코폴라는 인형의 눈을 빼서 나타니엘을 향해 던지고 그는 순간 기절한다. 환몽 속에서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죽음과 올림피아의 죽음을 동일시하게 된다. 클라라와 화해한 나타니엘은 어느 날 클라라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시내를 배회하다 첨탑에 오른다. 순간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경악을 하며 클라라를 개울 속으로 떠미는데 그녀는 마침 아래 서 있던 오빠에 의해 구출된다.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군중 속에 서 있는 코펠리우스였다. 나타니엘은 소리를 지르며 난간에 떨어져 죽고 코펠리우스는 유유히 자취를 감춘다.
프로이트는 이 이야기를 유아기에 경험한 거세 콤플렉스가 억압되었다가 계속 반복되는 것으로 풀어낸다. 나타니엘은 모래인간을 거세 위협하는 아버지로 받아들인다. 눈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거세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모래인간은 코펠리우스, 코폴라, 그리고 마지막 다시 나타난 코펠리우스로 다르게 반복되어 그럴 때마다 사랑이 좌절된다. 그는 나타니엘의 사랑을 막는 아버지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반복은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가는 모호함을 낳고 이 낯설음에 의해 서사가 계속된다. 반복은 독자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그를 불확실성 안에 가두며 이것이 바로 작품 그 자체, 즉 미학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예술이론인 '낯설게 하기'와 피터 브룩스의 '플롯을 따라 읽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면 반복은 왜 일어나는가. 이 부분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은 욕망의 원리를 설명하는 라캉의 것과 흡사하다. 주체는 유아기에 자아와 대상을 일치시킨다. 어머니와 나를 혼동하는 이 '더블'(double) 혹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끝없는 자기사랑에서 나온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아점검의 단계로 들어선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켜보는 이 분열된 주체, 즉 자기 반성적 주체는 유아기 나르시시즘에 종속된다. 다시 말하면 친숙한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사라지지 않고 억압되어 괴기하게 다시 나타난다. '언캐니'란 '더블'이 극복되었지만 공포로 다시 나타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본능 속에는 반복충동이 있고 이것은 대단히 강박적 이어서 쾌감원칙을 넘어서 존재한다. 쾌감원칙도 이 반복을 향한 충동에는 당해내지 못한 다는 것이다. 반복충동이란 무엇일까. '언캐니'를 씨앗 삼아 활짝 꽃피는 그 다음 글, '쾌감원칙을 넘어서'를 잠깐 보자. 프로이트는 어느 날 어린 손자가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 혼자 놀이를 하면서 엄마의 부재를 견디어내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는 실패 같은 것을 던지며 안 보이면 "포르트"(fort)라고 소리치고, 다시 잡아당겨서 보이면 "다"(da)라고 소리쳤다. 이 '포르트다' 게임이 그 유명한 반복충동이라는 이론을 낳는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때로 그것이 힘들고 지겹다고 느끼지만 막상 죽음이나 위기의 순간에 부딪히면 그 반복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고 그 반복자체가 곧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이트가 그저 스쳐 지나치기 쉬운 아이의 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어머니 부재라는 현실을 견디어내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쾌감원칙보다 더 강렬한 게 삶의 원칙 아닌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쾌감의 충족을 미룬다는 프로이트 이론이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리비도는 성본능 뿐 아니라 삶본능도 포함된다. 이 후기 이론은 인간이 어떻게 불만의 현실에 자아를 적응시켜 가는가라는 얘기여서 당대 모던 심리학의 자아조정 이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 반복충동을 끝없는 반복이라는 "환유"로써 다시 읽는다. 다시 '언캐니'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이 내적인 반복충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괴기함'으로 감지된다(whatever reminds us of this inner 'compulsion to repeat' is perceived as uncanny). 그렇다면 '언캐니'란 무엇일까 혹시 라캉의 '프티 오브제 아'처럼 인간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갖게 하여 삶을 영위시키는 동인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더블' 은 라캉의 상상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사회로 들어서는 단계는 상징계가 아닐까. 주체가 사회로 들어서며 억압되는 부분인 '실재계'는 주체를 상징 계에서 다시 상상계로 귀환시키는 동인이다. 말하자면 상상계는 극복되는 듯하지만 틈틈이 상징계를 뚫고 되돌아오기에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뭉크의 외침처럼 들리지 않지 만 엄연히 존재하고 아담의 뼈처럼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다. 바로 이 상징계만도 아니요, 상상계만도 아니게 만드는 얼룩이 실재계이고 반복 을 가능케 하는 욕망의 동인이다. 그리고 이 반복충동이 죽음본능인 쾌감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삶의 본능이다. 인간의 삶은 욕망이 있는 한 계속되고 상상계와 상징계의 끝없는 회로 속에서 욕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라캉의 실재계 혹은 '프티 오브제 아'에 해당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반복은 또한 픽션을 가능케 하는 동인이다. 그것은 죽음의 본능 너머 삶을 연장시키는 동인이며 동시에 예술에서는 서사를 끌어가는 동인이다. 브룩스는 사실주의 소설과 모더니즘 소설에서 반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탄생과 죽음의 사이가 삶이듯 시작과 종말의 사이가 소설이다. 현실원칙 혹은 삶본능은 앞으로 곧장 내달린다. 그러나 직선은 두 지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다. 가장 긴 거리는 구불거리는 아라베스크 곡선이다. 반복충동은 직선을 아라베스크 곡선으로 늘리는 것으로 죽음을 늦추려는 강박적인 삶본능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는 단순하게 성 본능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박적인 삶본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삶본능과 대치되는 죽음본능이 소개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어린 핍이 죄수 매그위치와 처음 만나는 장면은 서사를 끌어가는 근원적 상흔이다. 공포의 그 장면은 그가 에스텔라와 해비샴 저택, 그리고 런던에서 신사수업을 받을 때까지 틈틈이 죄수와 연결되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다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 날 저녁 죄수는 그의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출연은 낯익은 어릴 적 상흔이 억압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이며 서사를 반전시키고 주인공을 무지에서 발견으로 인도한다.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어떤가. 월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Absalom, Absalom!, 1936)에서 서사는 양파 껍질처럼 반복된다. 서트펜, 헨리, 본, 주디트를 둘러싼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그것은 다시 서술자인 씩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야기는 거의 퀜틴과 쉬리브에 의해 꾸며진다. 서술의 '전이', 혹은 서술자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반복'되는 것이다. 브룩스는 프로이트와 쾌감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반복충동을 소설 읽기에 적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프로이트의 '모래인간 읽기'와 거의 같다. 그러면 포스트모던 서사에서 괴기함은 어떻게 나타날까. 60년대 실험소설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물의 내적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서술자로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겉보기에 강력한 삼인칭 서사로서 인물들의 입장에서 서술해주는 서술자는 줄곧 자의식적이다. 자신의 객관서술을 바라보는 욕망의 시선이 있다. 서술은 바라봄만 있는 게 아니라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서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자기 얘기일 뿐이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술의 주체는 입장에서 서술하는 전지적 주체와 그런 주체를 의심스럽게 응시하는 일인칭 주체로 분열되어 있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면 시선과 응시의 교차이다. 시선이 앞으로 나가려는 현실원칙이라면 응시는 억압되어 틈틈이 돌아오는 쾌감원칙이다. 포스트모던 서사는 삼인칭 서술을 틈틈이 간섭하는 일인칭 서술의 귀환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매끄러운 시선을 가로막으며 귀환하는 응시가 바로 '언캐니'이다. 객관재현을 할 수 없다는 반사실주의는 60년대에 격렬한 실험으로 나타난다. 언어의 자의성, 이념의 허구성을 콜라주, 자의식적 서사로 표현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70년대에 이르러 억압된 계층이 자신의 음성을 내는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동안 엇갈리며 매끄러운 사실주의를 의심하던 반사실주의는 대화를 시도한다. 일인칭 제한서술은 이제 더 이상 삼인칭 전지서술을 가로막는 간섭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이다. 일인칭이 볼 수 없는 상황을 삼인칭이 보충해주고 삼인칭 서술이 실패한 내용을 일인칭이 보충해준다. 이 역동적이며 대화적인 관계는 토니 모리슨의 경우 '가장 푸른 눈'에 잘 나타나며 '빌러비드'는 조금 다르지만 역시 대화적이다.
2. 토니 모리슨의 정치적 수사
백인 문화가 가치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 인종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화가 똑같이 적용되는 사회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의 주체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는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라캉의 거울단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상계적 착오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르시스적 자아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하나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차이'를 지닌 독특한 문화로 공존하는 게 아니라 우월의 관계가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한다. 모리슨의 첫작품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s, 1970)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상상계적 사회가 흑인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흑인 소녀 피콜라는 파란 눈이 미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런 눈만 지니면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광고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인형도 그런 모습이었다. 깨끗하고 정돈된 백인의 가정과 그들의 부부관계를 부러워하는 어머니는 딸보다 백인 주인의 딸을 더 소중히 여겼고 아버지는 과거 의 상처로 인해 그런 아내를 사랑할 용기와 관용이 없었다. 그의 뇌리에 는 근원적 상흔으로써 어릴 적 백인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짙게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거부한 아버지에 의해 가족이나 뿌리 없이 자랐다.
소설은 피콜라를 둘러싼 인물들이 제각기 상처받은 과거의 기억으로 그에게 어떤 대응을 보이며 그것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서 작가는 자신의 어릴 적 분신이기도 한 클로디어 가족을 개입시킨다. 클로디어 가족은 이 소설의 타자이다. 사회 전체가 눈 먼 나르시시즘 속에 물들어 있을 때 유일하게 그런 억압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질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그녀의 서술은 삼인칭 서술을 뚫고 솟아오르는 일인칭 서술이다. 타자를 인정하는 이런 이질성(hoterogeneity)은 소설을 끌어가는 동인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자아를 긍정하는 정치성을 낳는다. 백인과 다를 뿐 그것에 의해 지워질 수 없는 흑인의 문화, 그리고 남성과 다를 뿐 그것에 의해 지워질 수 없는 여성의 정체성을 클로디어라는 소녀의 일인칭 음성과 삼인칭 전지적 서술자의 음성이 교직됨으로써 이루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피콜라의 가족과 이웃에 관한 전지적 서술이 실패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클로디어의 서술은 그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존한다. 모호성, 혹은 낯섦이라는 미학의 본질을 밝히는 프로이트의 '괴기함'과 반복충동은 모리슨에게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정치적인 문맥으로 자리바꿈 된다. 이제 이런 자리바꿈을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빌러비드'에서 살펴보자. 노예의 삶이건 자유로운 삶이건 매일 매일의 삶은 하나의 시험이요. 시련이다. 네가 하나의 해결일 때조차도 문제인 그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느니라. 노예였던 어머니가 자신의 젖먹이 딸만은 같은 삶을 반복시키지 않겠다고 죽인다. 1855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근거로 하여 쓰인 소설 '빌러비드'(Beloved, 1987)는 1873년 신시내티의 블루스톤가 124번지로부터 시작된다. 호미 바바가 그의 책, '문화의 위치'에서 가볍게 언급했듯이 124번지는 서술이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괴기한' 집이다. 집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집은 베이비 숙스가 마을의 지도자로 활기 찬 삶을 영위할 때는 이웃이 모여드는 정거장이었고, 시드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후로는 잿빛 감옥이었다. 유령이 살 때는 괴기함과 흔들림으로 떨었고, 유령이 되살아난 빌러비드가 살 때는 소유와 탐닉으로 고립되었고, 그녀가 떠난 뒤로는 폐허가 되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집은 주체이며 가족이며 이웃을 상징한다. 그것은 친근함과 낯섦이 반복되는 '괴기함' 이다.
124번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지닌 다양한 인간들이 그 집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꾸며간다. 그들은 서로가 지닌 과거의 상처에 의해 영향을 주고 받는다. 124번지는 모임과 축제의 장소에서 주장과 자만으로 가득 찬 잿빛 가옥으로, 소유와 탐닉으로 물든 배타적인 은둔처로, 그리고 수선을 기다리는 풍상에 찌든 집이 된다. 마치 '가장 푸른 눈'에서 주변 사람들이 피콜라에게 영향을 주듯 사람들은 집에 영향을 준다. 소설은 유령이 나오는 집에 18년간의 방랑을 거친 폴 디가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행위가 조각이불 잇듯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이어져 가는 전체 내용을 시간 순서로 간추려본다. 시드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아들이 치룬 노동의 대가로 자유의 몸이 된 베이비 숙스가 희망에 찬 연설을 하며 흑인에게 육체를 사랑하라고 꿈과 용기를 불어넣던 곳이었다. 그러나 베이비 숙스의 꿈은 며느리 시드가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여 함께 산 지 28일 만에 산산이 부서진다. 도망친 노예를 잡으러 온 것을 안 시드가 어린 딸을 죽인 것이다. 오렌지 색을 그리워하며 베이비 숙스는 구두 수선공으로서의 삶을 끝마친다. 시드의 남편이었던 홀은 소식이 끊겼고 두 아들은 유령이 나오는 집이 무서워 도망갔다. 어린 딸 덴버와 단 둘이 사는 이 고립된 시드에게 폴 디가 나타난다. 스위트 홈 농장시절 시드를 사랑했던 폴 디는 그녀의 피폐된 삶에 활기를 불어 넣으려 애쓰며 유령을 내쫓는다. 한동안 잠잠했던 집에 어느 날 낯선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가 한 가족이 된 후 폴 디는 한 단계 씩 집안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헛간에서 자던 날 폴 디는 소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스탬프로부터 시드가 아이를 죽인 사건을 들은 폴 디는 시드를 떠난다. 그녀의 잔인성과 폴 디의 죄의식이 겹쳐 그들 사이에 커다란 숲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폴 디를 쫓아 낸 빌러비드는 시드를 독차지하고 늘 어머니가 무서웠던 덴버는 과거의 기억 속에 살며 빌러비드를 따르지만 둘은 덴버를 외롭게 소외시킨다. 시드는 자신이 사랑 때문에 딸을 죽였노라고 끝까지 해명하지만 빌러비드는 그럴수록 광폭하게 그녀를 탐하고 욕심을 채운다. 이웃과 단절된 채 눈먼 둘만의 탐닉은 시드의 몸과 영혼을 파괴한다. 드디어 덴버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웃의 힘으로 빌러비드는 집에서 쫓겨나 숲으로 사라진다. 다시 찾아온 폴 디는 시드의 피폐한 영혼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가진 최선은 딸이 아니고 그녀 자신이라고 일러준다.
육화된 유령을 자연스럽게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 이 환상적 사실주의는 모리슨의 독특한 창조일 뿐 아니라 흑인의 민속에 뿌리내린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유령을 몰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푸닥거리이다. 유령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법석을 떨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 발자국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1850년대 신시내티의 작은 마을에 그런 얘기가 소문처럼 떠돌 수도 있었으리라. '빌러비드'는 노예의 기억으로 가득찬 책이고 124번지는 과거의 상처로 가득 찬 집이요, 빌러비드는 6천만흑인들의 악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리슨은 이 아픈 과거를 청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모리슨은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를 통해 과거 노예시절의 기억과 분노가 흑인의 현재 삶을 얼마나 갉아먹는가, 그리고 진정한 자아찾기와 이웃의식, 그리고 더 나아가 올바른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려 했다. 시드는 어릴 적에 어머니의 사랑이나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란다. 노예의 삶이란 부모와 자식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삶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그녀에게 보여 준 문신은 시드가 어머니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 첫 번째 상흔은 어린아이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그후에 일어난 어머니의 교수형, 젖어미가 들려주던 노예의 참혹한 운명, 그리고 그녀가 스위트 홈 농장에 가서 겪는 일들로 반복하여 일어난다. 홀의 아내가 될 때 그녀는 흑인 노예에게는 결혼의 예식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후 '학교 선생'의 아이들은 그녀의 젖을 훔쳤고 동물처럼 두개골의 칫수를 잰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도망쳤고 124번지에 도착하자 자유를 처음으로 만끽한다. 그리고 28일만에 노예잡이가 그녀 집의 뒷뜰로 들어선 것이다.
28일간의 자유는 그녀에게 그날 무엇을 할 것인가 스스로 결정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맛보게 했다. 124번지와 공터는 긍지, 자립, 해방된 자아를 주장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고 자식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였다. 백인들은 흑인을 가축처럼 소유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욕망을 대상과 일치시켰다. 그들의 주체는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갇힌 상상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드는 그것과 똑같은 선택을 내린다. 그녀는 딸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과 아이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그녀가 본 아이는 바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가 프로이트의 더블 혹은 라캉의 상상계라는 것은 죽은 딸이 유령으로 나타나는 것과 육화된 후의 삶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타자를 배제시킨 124번지에서 시드와 빌러비드는 서로 내것이라며 완벽한 소유를 주장한다. 시드는 자신의 행위가 딸을 너무 사랑해서나온 것임을 되풀이하여 주장하고 딸은 그럴수록 그녀에게 밀착하여 보상을 요구한다. "너는 내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다." 되풀이되는 이 말은 백인이 하는 말과 방향만 다를 뿐 차이가 없다.
폴 디는 그녀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힌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시드에게 말한다. 유령을 견디지 못한 두 아이는 집을 나갔고 덴버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속에서 아버지만을 기다린다. 또한 탐닉한 두 사람조차 서로를 황폐화시킨다. 시드는 빌러비드만을 너무 사랑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줄 사랑을 남겨놓지 못했고 그 아이조차 탐욕에 눈멀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파멸에 이른다. 사랑이 너무 지나쳐 대상을 한 치의 우수리도 없이 소유하기를 원하면 자아도 송두리째 내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백인이 흑인을 소유하려던 것, 제국이 식민지인을 교화시키는 것과 상상계적 착오라는 것에서 닮았다. 둘은 쌍둥이였다. 베이비 숙스가 좌절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한 쪽만이라면 숙스는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이 그녀를 패배시킨다." 즉 백인이 뒷마당으로 들어온 것과 시드가 아이를 죽인 것은 서로 방향만 달랐을 뿐 같은 주장이었던 것이다. 숙스는 백인뿐 아니라 동족의 가금에서도 악을 보았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 날 그녀의 집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넘치는 음식과 웃음, 베이비 숙스는 너무 많은 것을 누렸고 흑인들은 질투를 느껴 노예잡이가 마을로 들어설 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희망에 찼던 거대한 가슴은 무너지고 그녀는 오렌지 색을 그리워하며 암울한 삶을 마친다.
반복을 모르는 이 파괴적인 '원초적 나르시시즘', 지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낙원을 빌러비드와 시드가 꾸미려 한다. 그러나 아담이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울대뼈가 불쑥 튀어나온 이래로(밀턴의 '실낙원'),아이가 어머니와 누렸던 아주 짧은 유아기 이래로(프로이트의 현실),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래로(라캉의 상징계) 지상에 그런 낙원은 없었다. 둘은 완벽히 고립되고 닫힌 상상계를 꿈꾸지만 이미 상징계에 노출되었기에 타자에 의해 보이고 보여져서 서로 대상을 바라만 보는 평화를 누릴 수는 없었다. 낙원이 아닌 실낙원에서 소유는 대상을 먹으려 하고 둘이 서로를 먹으려 하기에 124번지는 탐욕으로 배가 부르고 질투로 황폐해질 뿐이다.이 상상계를 꿈꾸는 닫힌 세계에서 조그맣게 문이 열린다. 고립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우수리가 있었다. 124번지라는 상상계의 얼룩이 덴버이다. 다른 식구와 달리 그 아이는 힘든 상황을 견디는 지혜를 갖는다. 그녀는 어머니와 달리 백인인 에이미의 도움을 되풀이하여 떠올린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간 오빠들과 달리 숲의 공터에 가서 자아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그녀에게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상상력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 나오게 도와준 백인 소녀 에이미는 그녀가 힘든 삶을 견디는 데 즐거운 추억이 된다. 벨벳을 구하러 보스톤으로 가던 에이미는 시드가 덴버를 낳는 데 도움을 준다. 시드는 딸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었으면서도 자신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지 못한다. 덴버는 꼭 닫힌 집안의 뒷문을 열고 이웃을 받아들인다. 타인의 도움을 청하고 자기자신을 돌보고 마침내는 이웃의 힘으로 빌러비드를 몰아내는 것이다.
타자의식이 없는 시드와 빌러비드가 반복을 모르는 고착이라면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덴버는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이 교차 반복되는 주체로서 진정한 '언캐니'이다. 시드는 무의식 중에 백인이 흑인에게 향한 폭력과 소유욕을 딸에게 옮기는데 이 닮음은 반복이 아닌 쌍둥이다. 프로이트나 라캉, 혹은 '해체'의 반복은 '다르게 반복하기'이다. 상상계 혹은 상징계에는 아담의 뼈 때문에 얼룩이 생긴다. 이것이 라캉의 실재계요, 프로이트의 언캐니다. 이 얼룩이 너와 나의 완벽한 합일을 무너뜨린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액인 이 우수리 때문에 인간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앞선 것을 다르게 반복한다. '꼬마 한스에 대한 분석'은 3, 4세 때 어머니를 사랑하는 한스가 아버지나 어린 동생을 장애물로 여겨 말(馬)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때 아이는 환상을 창조함으로써 공포증에서 벗어나고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한다. 환상은 현실의 불만을 이겨내는 탈출구로서 즉각적인 소망을 늦추는 우회의 길이다. 그것은 다르게 반복하기로서 고착을 벗어나며 현실에 적응하는 타협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글 '언캐니'에서 진정한 언캐니(괴기함)는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현실에 적용되는 믿음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햄릿'의 유령은 언캐니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연인을 얻는 것도 언캐니가 아니다. 소원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것은 언캐니가 아니다. 소원을 늦추는 것, 죽음에 이를 때까지 소망충족을 늦추어 삶을 연장시키는 삶본능이 언캐니다. 언캐니란 상상계와 상징계의 잉여물로 대상을 향해 우리를 끝없이 가게 만드는 욕망의 미끼(a)이다. 억압된 무의식은 위장된 모습으로 귀환하기에 늘 잉여물이 남고 그러기에 반복이 일어난다. 반복은 우리를 결핍에 떨게 하면서도 살게 만드는 동인이다.
언캐니를 정치적인 상황으로 끌어 내보자. 성차별과 제국주의라는 계급의 문제로 옮아 가보자. 남녀의 사랑에서는 소유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우수리가 되고, 탈식민주의에서는 제국의 상상계적 동일시에 저항하는 우수리가 된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최고는 빌러비드였다고 말하는 시드에게 당신이 가진 최고는 바로 당신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속죄로 피폐된 그녀의 육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폴 디는 덴버와 마찬가지로 반복이 가능한 주체이다. 그는 시드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부딪쳤고 더 참혹한 탈출을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마음 속에 있는 담뱃갑 속에 넣고 꼭 닫아둔다." 그가 겪은 수많은 위기는 그에게 주어지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어루만질 수 있게 가르친다. 과거가 튀어나와 현재를 망치지 않게 하며 사랑을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으로 믿게 한다. 일찍이 밤하늘을 보며 홀로 누워 흑인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배웠기에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되 다음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남긴다.결코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과 일치시키지 않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간다. 그의 쾌감원칙은 현실원칙과 타협을 벌이며 욕망의 충족을 늦춘다. 이 반복이 가능한 분열된 주체가 프로이트의 진정한 '언캐니'다.
해결이 곧 문제인 세상
폴 디는 소설의 맨 마지막에 시드에게 스스로가 자신이 지닌 최고의 것이라고 얘기해준다. 소설의 주제로 보아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음성이기도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모리슨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엘라이다. 그녀 역시 폴디처럼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극복한 주체이다. 그녀는 베이비 숙스보다 더 강하다. 어릴 때 겪은 "가장 심한 치욕"의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그 이후의 어떤 굴욕도 견디게 만든다. 그 상처는 바로 백인이 아닌 같은 동족, 그것도 바로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겪은 일 년간의 감금과 강간이었다. 덴버가 에이미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돕고 이웃에 도움을 청하듯 엘라는 동족으로부터의 굴욕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블'의 함정을 벗어난다. 연설을 하고 파티를 연 베이비 숙스와 달리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흑인을 돕는다. 베이비 숙스가 백인이 뒷마당에 들어선 것과 시드가 아이를 죽인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한 것과 달리 엘라는 그 다음을 본다. 그녀는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상황을 직시하는 인물이다. 시드는 자신의 행동이 백인의 것과 똑같이 닮았음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딸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주체는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가 없는 눈먼 주체였다. 해결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는 것은 영원히 우수리가 남는 상황이다. 자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은 죽음 이외에 없다는 프로이트의 말과 같다. 시드가 그런 상황을 읽을 수 없던 것에 비해 베이비 숙스는 그런 상황에 경악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녀의 이름이 베이비인 것처럼 그녀는 단순한 이상주의적 안목으로 사태를 쉽게 보아왔고 이질성과 타자를 수용할 기회가 없었다. 엘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노예의 삶이건 자유로운 삶이건 매일매일은 하나의 시련이요, 시험이다. 네가 하나의 해결일 때조차도 문제인 그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느니라.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을 짓밟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엘라의 단호한 뜻은 바로 모리슨 자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아는 이질성과 타자를 수용하여 반복을 가능케 하는 분열된 주체이다.
3. 프로이트와 토니 모리슨의 '언캐니'
해결이 문제인 세상이란 언제나 우수리가 남는 세상이다. 프로이트의 '더블' 이나 라캉의 상상계에는 우수리가 없다. 아이는 주체의 욕망과 대상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라캉의 거울단계나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대상에게서도 자신의 얼굴만을 볼 뿐 타자를 보지 못한다. 차이가 없는 세계, 아니 차이를 억압한 세계이다. 아이는 사회화되면서 이 단계를 극복한다. 그러나 상상계는 사라지지 않고 억압되어 상징계 속에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실재계요, 프로이트의 '언캐니'이다. 그리고 모리슨의 "해결이 문제인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데카르트가 이성의 투명성을 강조한 이래 계몽주의는 자만심에 차 있었다. 그는 전쟁, 식민지 개척, 나치즘의 유대인 박해 등이 모두 그런 자만심의 부정적 산물이 아닐까 의심했다. 프로이트 사상의 혁신성은 의식에 억압된 거대한 무의식은 늘 반복을 꿈꾸며 표출되고 그것이 삶의 동력인 이상 인간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고 사악함을 억압한 양면적 존재라는 데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과학과 문학이 합쳐진 어느 곳, 이성과감성이 만나는 어느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프로이트의 글 '언캐니' 역시 미학에 관한 글이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더 잘 구현되는 언캐니는 억압된 무의식이 틈틈이 의식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데서 오는 낯섦이다. 그것은 교육과 이성의 힘으로 단련된 현실원칙을 뚫고 들어오는 쾌감원칙이기에 갈등을 일으키는 어깃장이다. 이러한 갈림, 혹은 타자, 이질성이 괴기한 느낌을 갖게 하고 독자를 모호함속에 사로잡아 작품을 지속시킨다. 쾌감의 충족을 지연시키며 반복되는 억압된 것의 귀환은 인간의 본능이며 미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리슨에게 언캐니는 단순히 미학이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반복이란 타자를 인정하는 이웃의식이요, 앞으로 나가면서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의식적 혹은 분열된 주체요, 바흐친의 용어를 빌려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갈림(heterogeneity)이요, 바바의 표현을 빌리면 혼혈성(hybridity)이다. '빌러비드'의 124번지를 둘러싼 여러 이웃들의 혼성 적이고 갈림적인 들락거림에 의해 이루어진 소설의 짜임새 역시 혼혈적이다. 반복을 모르는 주체는 제국주의적 주체이다. 백인과 흑인 노예의 관계나 시드와 빌러비드의 관계는 둘 다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는 '더블'로서 진정한 언캐니가 아니다. 덴버, 엘라, 폴 디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블의 함정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모리슨의 반복은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를 인정하는 탈식민주의적인 언캐니라고 볼 수 있다. 흑인 여성작가로서 모리슨은 여성인물들을 중심으로 소설을 쓴다. 그러나 그들을 남성인물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입장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인물을 자기 반성적 주체로 그리면서 남성적 특성에 억압되어온 여성적 특성을 살려낸다. 이 소설에서 작가 자신의 음성은 엘라라는 여성인물뿐 아니라 폴 디라는 남성인물을 통해서도 말해진다. 폴 디의 인내와 삶의 직관은 엘라의 것과 거의 비슷하며 게다가 부드러움이라는 여성적 속성으로 시드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백인과 흑인이 악과 선의 이분법으로 축소되지 않듯이 남성과 여성도 그리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제국주의가 반복을 모르는 프로이트의 원초적 나르시시즘과 같은 것이었다면 남성 우월주의 역시 그런 것이었음이 유추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억압된 것이 귀환할 때 느끼는 기이한 감흥이다. 우리의 본능 속에 있는 반복충동은 쾌감원칙보다 더 강렬해서 억압된 것은 현실의 옷을 입고 나타나고 그래서 늘 다르게 되풀이된다. 다르게 반복될 때 생겨나는 이질성의 공간이 인간의 유추를 가능케 하고 이 은유성이 무의식을 통해 의식의 명료성을 의심해보는 프로이트와 사상이다. 그는 은유적인 것이 환유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원리라고 보았던 셈이다. 시드는 어머니와 격리되었던 유아기의 상처를 그대로 빌러비드에게 옮겨준다. 그리고 백인이 그랬듯이 빌러비드를 "너는 내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계적 착오는 덴버라는 우수리에 의해 와해되고 이웃과 섞인다. 언캐니는 현실과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 엇갈려 갈 때 일어나는 감흥이다. 그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이질성이다. 프로이트가 미학의 원리로서 혹은 삶의 원리로서 설명한 '언캐니'는 흑인 여성인 모리슨의 입장에 적용되었을 때 탈식민주의 여성이론이라는 정치적 담론으로 바뀐다. 흑인문화와 백인문화 동양문화와 서구문화 그리고 여성과 남성은 이질적일 뿐 우월의 관계가 아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지워 버릴수 있다는 중심주의는 언제나 잉여물 혹은 우수리에 의해 전복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해체론 이후 매끄러운 총체성을 와해시키는 우수리로서 억압된 계층을 복원시키는 정치적 전략이 된다.
3. 나르시스적 주체의 슬픔
신화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신들의 사랑, 질투, 정욕, 복수, 허영, 의심, 그리고 탐욕은 인간의 것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인들은 그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얘기를 하고 역사가는 그 얘기를 빗대어 자기 시대를 말한다. 보편성을 얻는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은 신화 가운데 유독 몇 가지만 돋보여온 것은 왜 일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제 모습에 반해 죽은 나르시스의 비극만큼 인류문화사에 깊이 참여한 신화도 없는 듯싶다. 힘든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늘 어릴 적 어머니의 품안을 그리워한다. 아버지의 세계인 사회는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야 되는 법과 질서의 세계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늑한 평화와 안식을 주는 너그러운 연인이요, 포근한 대지이다. 오이디푸스의 소망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늘 갈망하지만 죽기 전에는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요 환상이다. 그의 비극은 의식의 세계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무의식중에 실천했기에 일어난다. 인간의 운명을 이만큼 명료하게 그린 신화도 흔치 않으리라 그러면 나르시스의 비극은 인간의 어떤 면을 상징하는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죽은 이는 추한 노인이 아니라 젊은미남 청년이었다. 환상과 미망의 폭은 젊은 시절에 더 크게 인간을 사로잡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신화는 그보다 훨씬 더 인간 모두에게 내재된 미망을 상징한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살았고 많은 문학작품들이 주제로 삼아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설명해 보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나르시시즘은 좋은 근거를 제시한다. 왜 우리는 서로사랑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세상과 삶에 대해 정답을 내놓지 못하는가, 왜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는가. 아마도 이것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사가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혹시 인간의 내부에는 타자와의 완벽한 교감을 가로막는 이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의 사랑을 가로막는 나의 내부 속의 타자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해 볼 수는 없을까. 비록 그 설명이 낯선 이물질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해도 낯섦을 낯익게 만들어 더 큰 오해와 혼란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역사 속에 얼룩진 미움과 폭력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들이 제 이름만 부르며 우는 이유를. 인간의 실존을 '불안'(anxietry)으로 규정한 실존주의는 기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적절히 포착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한단계 더 나아간 오늘날에도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방황은 삶의 본질 마냥 짙게 깔려 있다. 김형경의 소설에서 불안은 "집 없는 세대"로 형상화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집'은 쉴 곳, 혹은 기댈 수 있는 거처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 곳은 맑고 투명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산실이다. 단편, '민달팽이'에서 집 없는 느낌과 닿을 수 없는 인간사이의 틈새를 살펴보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나'는 어릴 적에 외가에서 자랐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외가는 그후 객지를 떠도는 그녀의 마음 속에 낙원으로 자리잡는다. 과묵하지만 초췌해가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결코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집을 안겨주지 못하고 내내 방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의 기억 속에 아버지와의 교감은 현미경을 통해 보여준 세상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차라리 망원경을 보여 주셨더라면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으리라고.
현미경과 망원경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물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과 거시적인 접근의 차이가 아닐까. 현미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안식처가 아니다. 수없이 자질구레한 분자들은 잠시도 쉴 줄을 모르고 움직이며 유동적이다. 현미경을 통해 본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박해일 수도 있으며 이기심을 달콤하게 포장해놓은 당의정일 수도 있다. 현미경으로 본 마음은 더 이상 순수한 단음조가 아니고 이성은 더 이상 투명하지도 않았다. 잠시도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집 없는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도 역시 민달팽이다.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그를 보낼 때가 왔음을 느낀다. 민달팽이들의 사랑이란 지상에서 맺지 못하는 모든 사랑의 이름이다. 그들에겐 집이 없기에 어디로 신호를 보내야 되는지 늘 헷갈리기 때문이다. 선량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똑똑함과 영민함이 교활함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 막막한 관계의 끝에서 가질 수 있는 선택은 상대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처럼 이 단편의 화자 역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사랑의 소음을 듣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그녀가 보았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에서처럼 사랑은 소유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그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취향대로 변화시키려는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속에서 , 남녀라는 성차에서 그리고 사랑 그 자체 속에 사랑은 이미 폭력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그녀는 자아 속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 는타자를 느끼며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내면 속에서 타자를 느낄 수 있는 '나'는 집 없는 존재이기에 적어도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소유하려는 꿈을 버린다. 집이 없는 내가 어떻게 또 집이 없는 그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의지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밖에는.
'민달팽이'는 김형경의 소설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되는 나르시스적 주체의 원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을 현미경으로 보는 그녀의 서술방식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이 좁힐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은 그녀의 중편, '담배 피우는 여자'에서 베란다와 맞은 편 베란다사이의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인 양 서간체의 형식을 지닌 것 같지만 결코 받아보는 상대가 없는 글의 양식은 독백으로 머무는 단절의 주제와 잘 들어 맞는다. 소설의 화자인 '나'에게는 일을 하면서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주부지만 남편은 매일 밤늦게 들어오고 아이는 유치원에 다닌다. 아침 일찍 해장국을 끓이는 존재 이상은 될 수 없는 아내의 위치가 '나'를 텅 빈 맞은 편 베란다를 지켜보거나 담배연기를 길게 뱉아내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맞은 편 베란다에 또 다른 담배 피는 여자가 나타난다. 나의 외로움을 반씩 나누어 가질듯이, 아니 기댈 곳 없는 삶의 은신처를 담배 피우는 데서라도 찾은 듯이. 어느 날 나의 아파트 거실 깊숙이 뛰어든 맞은 편 집 여자는 남편이 담배를 피우면 구타를 하기 때문에 베란다를 펄쩍 건너 뛰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는 남편과 아내의 흡연을 한사코 막으려는 옆집 남자. 목숨을 걸고 난간을 뛰어넘으면서도 담배 피우기를 그만둘 수 없는 여자. 삶은 그렇게 겉돌았다. 그녀가 난간을 뛰어 건너려다 미처 발이 닿지 못해 캄캄한 심연 속으로 기다란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간 후 '나'는 알게 된다. 그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남편은 아내의 건강에 치명적인 담배를 못 피우게 막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사랑은 자신이 살기 위한 필요에서 나왔고 결국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이른다.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다면 왜 담배에 의지하게 만드는 그녀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을까. 사랑은 외로움을 치유하기는 커녕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잔인한 이기심일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무관심과 단절의 심연을 견딜 수 없어 담배를 피우는 나와 너무 지나친 관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는 그녀. 사랑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기심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콩 나물국을 잘 끓이는 것으로만 아내의 존재를 인식하는 남편과 그녀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기에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그 남자.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애의 다른 이름인 것을 모른 데서 폭력과 비극은 훨씬 더 커진다. 담배 피우는 두 여자는 집이 없는데서 서로 닮았다. 장롱 속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나'의 분신이고 맞은 편 베란다에서 본 그녀는 거울 속의 나이다. 두 여인은 사랑이 없음과 사랑이 넘침의 피해자다. 그리고 둘은 베란다를 사이에 두고 영원히 서로 닿지 못한 채 헤어진다. 미끄러지는 나락은 자아의 내부에 있는 틈새이다. 나와 또 다른 나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얼룩으로 남는다. 나는 늘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이제 조금씩 작가 김형경이 완강히 거부하는 정신분석에 접근해보자. 아니 우리는 이미 그 속에 들어온 지 한참되었다.
김형경의 화자들은 유난히 자신들의 심리를 정신분석에 갖다 들이대지 말라고 강조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진단하지 마세요. 소외나 단절감, 혹은 무엇무엇으로 부터의 억압... 그런 분석은 사양합니다" ('푸른 나무의 기억', 문학과 지성사, 1995. 9) 그러나 화자의 거부는 읽는 이를 끌어들이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녀의 소설을 일일이 정신분석에다 갖다 맞추는 힘든 짓은 하지 않기로 다짐해도, 커다란 맥락이 프로이트의 사유체계에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트를 '꿈의 분석'만으로 이해하여 단순한 범성론자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글가운데 인간의 심리를 나르시시즘으로 풀어본 예지에 잠깐 귀를 기울여보자. 꿈이란 억압된 무의식이 위장된 이미지들로 나타난다고 본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꿈을 분석하여 환자가 억압하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꿈의 분석'은 그가 분석한 많은 예들을 모은 초기의 저서이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프로이트를 이해할 경우 그는 모든 형상들을 남녀의 성기와 연결시키고 자의적으로 꿈을 분석한다는 인상을 얻기 쉽다. 그가 일생에 걸쳐서 쓴 수많은 글들은 그 책보다 훨씬 더 깊은 삶의 혜안을 보여준다. 자아와 타자의 문제, 여성성에 관한 문제, 그리고 문명사에 관한 이해 등 과학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많은 글들은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암시한다. 그가 꿰뚫어본 인간의 비극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것은 바로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없나 라는 영원한 물음이었다. 나르시시즘으로 이 딜레마를 풀어보자('나르시시즘에 관하여'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1914). 물 위에 비친 아름다운 청년에게 매혹되어 물 속에 몸을 던진 나르시스의 비극은 인간의 자아형성과 타자인식의 바탕이 되는 게 아닐까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겪게 되는 외계와의 접촉은 일생동안 중요한 경험으로 남는다. 어머니와 가졌던 충만한 시절은 늘 되돌아 가고픈 낙원으로 새겨진다. 그때는 성차도, 종족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느낄수 없던 시절이었다. 현실이 고달프고 불만스러울수록 그 시절은 비대해진 그리움으로 채색이 된다. 아버지의 질서와 법이 우리를 구속한다고 느낄수록 어린시절의 무한한 자유와 아늑한 품은 되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이 된다. 프로이트는 왜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우리는 문명 속에서도 불만을 느끼는지 설명해보려 애쓰다가 그런 가정을 세우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린시절의 행복했던 경험은 의외로 아주 가까이에 묻혀 있다가 틈틈이 우리의 사유체계를 간섭한다고. 그러기에 이성의 판단이 그토록 많은 오차를 내고 우리가 의도한 것과 그것의 결과가 그렇게도 달라지는 게 아니냐. 너 하나만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는 부질없이 깨어지고 더 잘 살아보겠다고 고안해낸 기술문명과 제도들은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고 공해를 낳는다. 너무도 익숙하지만 아무도 설명해 낼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이 프로이트의 화두였다. 그는 현실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거슬러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또다른 힘을 무의식이라 가정한다. 무의식은 어린시절에 어머니의 품안에서 누렸던 무한한 기쁨의 순간들로 쾌감원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형성의 과정에서는 '근원적인 나르시시즘' 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나르시시즘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 속에 빠질 때 제 모습에 반했기 때문으로 보아 자기애의 극치로 풀이하는 경우와 타인으로 착각하여 물에 빠진 경우로 보는 것이다. 나르시스가 워낙 자기 자신만을 사랑해서 요정들의 원성을 샀으니 첫 번째의 해석도 가능하고 착각이 개입되지 않는 나르시시즘이란 별 의미가 없으니 두번째 해석도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을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하는 최초의 자기충만으로 보아 대략 생후 2세부터 4세 사이로 잡는다. 이때 유아가 접하는 외계는 완전하다. 사실은 어머니나 누이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아이는 제 혼자서 느끼는 충만한 지복이라고 믿는다. 지복의 순간은 짧고 그러기에 그 맛은 영원히 떠나지 않는 이상으로 인간의 뇌리에 남는다. 아이는 커가면서 차츰 외계에 눈뜨기 시작한다. 타인의 존재는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와 접촉해야만 한다. 그는 가족이 아닌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아버지의 법이다. 그는 불안에 가득 찬 눈으로 새로운 대상에게 접근한다. 언제든지 자아에게 되돌아 올 준비를 하고서 그것도 아주 재빨리. 그의 마음속에는 지복의 순간이 자리잡고 있어 그가 추구하는 대상은 바로 그것이지만 잡고 보면 늘 그게 아니었다. 가족 안에서 찾던 대상을 밖에서 찾아야 되는 현실. 성의 대상과 자아가 일치하던 낙원에서 분리가 일어나는 실낙원으로 옮아가는 데 인간의 비극이 있지만 더 큰 비극은 실낙원에 사는 데도 늘 낙원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착각에 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바로 그것"이라고 믿고 붙잡지만 그 순간 쭈르륵 미끄러지고 만다. 그는 늘 마음속에 닿을 수 없는 심연을 지니고 살며 그가 내리는 판단은 투명할 수가 없다. 주체는 나르시시즘 위에 세워지기에 지을 수 없는 이물질인 타자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김형경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 끈질기게 매달리는 화두인 인간과 인간사이의 단절과 소외의 문제를 나르시스적 주체의 맥락에서 풀어보면 어떨까 싶다. 민달팽이처럼 집 없는 느낌, 외가도 아버지의 집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집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운 방황이나 사랑이 지닌 잔인함이나 그것이 소유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리고 담배 피우는 두 여자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 등, 민달팽이의 사랑과 선택에는 늘 미끄러지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제 나르시스적 주체를 사치적 문맥으로 끌어 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