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모정과 누정에 숨은 뜻은
찜통더위가 계속되면 누구나 탈출을 꿈꾼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마룻바닥에 누워 뭉게구름을 바라보는 나른한 오후의 한때...... 이것은 모든 도회인들이 꿈꾸는 바가 아닌가. 대뜸 원두막에서의 한가로운 피서를 연상할지 모르나 원두막은 임시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옛날부터 한여름 '피서지'로 정평이 나 있는 곳, 모정과 누정으로 떠나가 보자.
모정과 누정.
모정은 농민들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이 딸리지 않고 마루뿐인 마을건물이다. 글자 그대로 초가를 얹은 소박한 정자로, 농민들의 휴식처이자 집회소이다. 반면에 누정은 누각과 정자에서 '누'와 '정'을 따온 말 그대로 정자식 건물이다. 쌓아올린 대위에 세운 건물을 누각이라 한다면, 누정은 밑에 대가 없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들여다볼 때 두 가지 병렬적인 문화현상에서 당시대 문화구조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정과 누정이 아닐까. 양자를 대비하면, 같은 시대에 어쩌면 그렇게 다른 문화가 병존하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게 된다. 당시대 신분구조는 물론이고 삶의 태도, 일상적 관습, 신분에 걸맞은 예우 같은 중세사회 풍속사 자체가 모정과 누정을 통하여 온통 드러난다. 물론 이 둘은 요즈음처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자기 식으로 혼자만의 별장을 짓고 사는 행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문화의 소산이기도 하다.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 누정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 먼 빛이 더욱 좋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춘사의 첫 구절이다. 고산은 탐라로 향하던 중에 해남에서 남쪽으로 70리 길, 기암절벽과 동백꽃이 어우러진 보길도에 매혹되어 그대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보길도에서 완성한다.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대개 시문을 드는데, 나는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시문학이 거둔 높은 격조를 폄하할 뜻에서가 아니다.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순전한 조선식 정원'인 부용동이야말로 조선 시대 선비문화의 최고 걸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한 지형 때문에 부용이라 이름했다고 하는 부용동. 소나무.대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세연정을 세웠으니 파도소리와 솔바람에 세상의 풍진을 씻음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부용동 제일의 절승은 동천석실이다. 누정을 세웠던 동천석실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서 굽어보면 보길도를 둘러싼 녹빛 남해바다가 늘 안개 속에 잠겨 있고, 비껴가는 구름 속으로 섬들이 드문드문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절경 속에 서면 나 같은 사람조차 시문이 절로 나올 것만 같다.
은둔거사를 자처했음에도 윤씨 가문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던 고산이었기에 남해바다 오지에 이 같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선비들만의 '전매특권'이었으니 누정문화는 그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시에 많은 누정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월출산 쪽으로 가 보길 권한다. 월출산 서쪽의 구림촌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촌락이다. 워낙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라 동네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누정의 보고'다. 솔밭과 대나무숲 사이에 정자 10개, 서원.사우 5개, 우산각 7개가 전해진다. 구림동을 구성하는 12동네는 간죽정, 총취정, 죽림정, 쌍취정 같은 누정들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림동의 으뜸 누정인 회사정은 1646년부터 무려 8년여의 세월이 걸려 완공되었다. 우리 나라 대동계의 으뜸으로 꼽히는 구림 대동계 모임터이자, 모든 정치.경제.문화의 토론 중심지였다. "나막신으로 벼를 모아서 상부상조의 자산으로 삼았다"고 하니 공동체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17세기 선비 조행립(?-1663년)은 시에 이르되, "복사꽃과 오얏꽃이 단정하고 물이 끼고 도는 마을에 우뚝 솟은 고각이 중장하구나" 하였으니 지금의 웅장한 건물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같은 것을 일러서, 누정이라 불러왔다. 이들 누정은 단순하게 선비들의 휴식터만은 아니었으니, 당대 양반층들의 '종합문화센터'였다고 할까.
양반 남성들만의 독과점적 종합문화센터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만 꼽아도 885개소에 이를 정도로 누정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누정을 경영하였고, 지방관들도 행정의 권위나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누정을 세웠다. 조선 후기에는 동성마을이 번창하면서 '뼈대 있는 가문'임을 과시하기 위해 자못 경쟁적으로 누정을 세웠다. 시쳇말로 빼어난 명승지에 누정을 세우지 못하면 못난 동네 취급을 받았다. 진주 촉석루, 부여 백화정, 울진 망양정, 밀양 영남루, 안주 백상루, 함안 와룡정, 담양 소쇄원의 대봉대, 간성 청간정, 그리고 대표적인 궁궐 누정인 창덕궁 부용정...... 일일이 꼽을 수 없이 많은 누정들, 그 뛰어난 경관과 신분사회에서의 사회적 기능을 연상해 보라!
향촌사회의 사대부들과 관리들이 모여서 친교를 도모하고 당대의 경세를 전론으로 펼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는 비판도 따른다. 어쨌든 누정은 가히 전국적인 규모로 정착하였다. 누정은 야트막한 구릉이나 산록, 계곡이나 경관 좋은 강변, 절경의 암반 위, 자연 연못이거나 아니면 인공으로 판 연못 가, 심지어 마을의 살림집 복판이나 논밭 가운데도 세웠다. 나는 음풍농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선비의 자연을 관조하는 격조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대로 녹아드는 누정의 건축 양식이나 위치를 보면 자연을 대하는 선조들의 뛰어난 산수관을 느낄 수 있다. 한국적인 산수화나 절창의 산수시들을 논할 때 어찌 누정을 빠뜨릴 수 있으랴! 동해의 그 유명한 관동팔경 중에 총석정, 청간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이 모두 누정일 정도였으니 그 높은 안목에 새삼 놀랄 뿐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누정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누정문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정은 풍광이 곱고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시가 빠질 수 없다. 모란봉 부벽루에 올라서서 차마 시를 끝내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고려 시대 김황원의 일화처럼 선비들은 누정에서 시를 겨루었다. 가히 '누정시단'이라 할 만한 세력이 나타났을 정도다.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등 누정에 뿌리를 둔 시가들은 수없이 많다. 듣기만 해도 쟁쟁한 문사들이 누정문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으니 누정은 선비문화 그 자체였다. 이름난 누정의 편액에는 지금도 당대 일류의 글씨와 문장이 전해져 오고 있다. 누정은 시문을 창작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토론하는 강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누정에 따라서는 인근 일대의 뜻 있는 후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는 큰 배움터, '마을에 세워진 사립대학'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누정은 향촌사회의 지방자치가 구현되는 정치집회소이기도 했다. 앞의 구림대동계가 태동했던 회사정의 사례에서 보듯이, 향촌사회의 질서를 잡고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중심지였다. 물론 긍정적 의미에서 자율적인 질서를 잡는다는 측면도 있지만, 양반들의 기득권을 확고부동하게 하기 위한 지방통치의 한 가지 수단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누정은 당연하게 '남성문화'의 중심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사회에서 어디든 여자들이 끼여들 자리가 적었지만 누정은 여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구역이었다. 남성들만의 '독과점 문화장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누정에 기생들이 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에 나타난 그 생생한 모습을 보라. 근엄한 양반들의 일탈된 모습이 너무나 해학적이지 않은가!
여름철에 모정이 없다면?
반면에 모정은 무지랭이 농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시정.유산각.농청.농정.동각.양청 같은 명칭이 두루 쓰이나 역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모정이다. 시정 같은 표현들은 후대에 모정문화와 누정문화가 일부 섞이면서 등장한 이름이지 순수 '모정혈통'은 아니다. 누정이 양반들의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라면 모정은 '노동의 문화'라고나 할까. 무더운 여름철 양반들은 누정을 찾아들어 죽부인을 껴앉고 오수에 접어들 수도 있지만, 농민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해마다 음력 2월 1일(머슴날, 혹은 하아드렛날) 모정에서 마을회의가 열리는데 이때 품앗이, 다리보수, 공동혼상구 준비 따위의 일년 대소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모정이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하는 시기는 역시 한여름철이다. 김 매던 농군들이 점심을 먹고 잠시 불볕 더위를 피해 눈을 붙이는 요긴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 구실도 하고, 모깃불이 사위어가도록 밤더위를 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모정이 없다면? 아마 한여름철 농촌문화 자체가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 아닌가.
드넓은 벌판지대에 가 보면 막상 쉴 만한 곳이 마뜩찮다. 오뉴월 뙤약볕에 세 벌 김매기로 허리를 펴지 못하다가 점심바구니가 들어오면 술푸념에 한시름을 잊는다. 점심 먹고서는 불볕 더위를 피해 차라리 한잠을 자야만 했다. 이때 모정이야말로 불볕을 가려주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모정은 당산굿을 치르는 종교 중심터이기도 했다. 호남의 넓은 들판마다 마을이 있고, 그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서 있다. 해마다 당산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풍물굿을 친다. 느티나무같이 가지와 잎이 많은 활엽수가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면 여름철의 피서지가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신성한 제의공간이 된다. 당산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경우도 많지만, 나무그늘에 모정을 지어서 여름을 나기도 한다. 성과 속이 계절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호남의 모정을 샅샅이 조사한 바 있는 최재율 교수(전남대)의 보고에 따르면, 모정이 민중의 문화였음이 분명해진다. 양반들이나 노약자들은 설령 모정에 나가고 싶어도 한창 농군들이 일할 때는 조심해야 했다. 일꾼들이 들로 나간 연후에야 잠시 쉬는 정도였다. 모정이 노동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모정은 글자 그대로 초가지붕이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모정에도 불어닥쳤다. '초가집도 없애고' 어쩌고 하는 마을회관 확성기 소리와 더불어 모정의 초가지붕도 날아가버렸다. 대신 슬레이트나 양철지붕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논 가운데에 슬라브 지붕 따위로 '완벽시공'하여 들판의 '분위기'를 망쳐버린 곳도 있다. 요즈음에 새로 짓는 모정은 기와를 올린다. 초가가 사라졌으니 '와정'이라고 부를 것인가. 자연과 어우러져 농사 현장을 지키던 모정의 옛 모습이 사뭇 그립기만 하다.
모정이 호남에만 있는 까닭은
모정과 누정, 어느 것이 먼저 발생했을까.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누각무늬 벽돌을 볼 수 있다. 호화스런 기와집 누정이 날렵하게 돋음새김되어 있어 당대의 화려했음직한 누정문화를 그대로 전해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연못을 파고 호화로운 누정을 지어 귀족들의 휴식처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누정이 모정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귀족층이 농민을 배려하여 쉼터를 만들어주었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중국에서도 누정문화가 발달하여 시인묵객의 시구에 오르내렸다. 우리 나라도 삼국 시대에 이미 호화로운 누정을 국가적으로 세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모정은 어떤 경로로 발전했을까. 먼저 모정의 전국적 분포상황을 알아보자. 모정은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호남,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모정 분포도가 높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모정문화 자체가 극히 희박하다. 가령 전북 익산지방에서 모정문화를 조사하다가 금강을 건너가 충청남도 부여로 접어들면 이내 모정이 사라지고 만다.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도 곡성에서 경상도 하동으로 접어들어도 마찬가지다. 호남에만 모정이 발달한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모정과는 구별되지만 다른 지역에도 모정에 준하는 공동체적 결집소는 있었다. 모정의 이명인 동청, 농청, 농정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집회소는 두레꾼들이 모여서 두레의 출범의례인 호미모둠을 이루거나 한해 농사의 대소사를 토론하는 회의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젊은 두레꾼들이 모여서 악기를 배운다거나 멍석짜기 따위로 소일하던 공간이다. 공동집회소는 이북지방에도 있었다. 함경도 북청 같은 지방에는 도가라 불리는 공공건물이 있어 마을의 제의.노동.놀이 따위를 관장하였다. 북청사자놀이도 도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도가라는 말뜻에는 공동집회소로서의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신도시를 건설하기 직전에 안양시에서 민속조사 의뢰를 받고 평촌을 조사한 적이 있다. 오늘날은 평촌 신도시가 들어서서 완벽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 곳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넓은 들이 펼쳐있던 서울 인근의 곡창지대였다. 그 평촌을 둘러싼 여러 마을에는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동청이 있어서 두레꾼들의 집회소로 기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두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정, 농청, 농정 같은 마을공동체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다가 일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촌락의 공동체적 행사나 모임이 이루어지던 결집소가 사라지고 호남의 모정만 남은한 것은 아닐까. 물론 들판에 모정이 서 있는 형식은 호남의 독특한 풍토가 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산조차 없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녘은 그야말로 햇볕 가릴 곳조차 없다. 마을 당수나무 그늘과 모정이라도 있어야 견딜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같은 농사지대라도 경상도에서는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평상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모정만을 놓고서 판단한다면, 호남 민중의 공동체적인 결집력만큼은 여느 지방에 비하여 단연 돋보인다. 같은 호남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도서나 산악지방에는 모정이 드물다. 평야지대가 모정문화의 중심권역이다. 또한 단결력이 강한 마을일수록 모정도 잘 이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호남사람들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단결력이 모정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백두에서 한라까지
누정은 멀리 두만강.압록강으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는 전국성을 보여준다. 박준규 교수(전남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뽑은 각도의 누정 수를 살펴보자.
경도 14/ 한성부 24/ 개성부 13/ 경기도 34/ 충청도 80/ 경상도 263/ 전라도 170/ 황해도 50/ 강원도 81/ 함경도 56/ 평안도 100/ 합계 885
전라도에 비하여 경상도의 누정이 압도적으로 많다. 경상도에서도 양반이 많이 살았던 안동이 으뜸을 차지하였던 데서 양반문화와 누정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다. 누정은 멀리 북방에까지 세워졌다. 변방으로 나간 장수들이 지은 시구를 보면 '전선의 밤'에 누정에서 느낀 정취가 다수 등장한다. 당대 '야전사령부'에도 누정이 있었다는 증거다. 성문에 문루를 올렸는데, 그들 누각은 전망이 좋게끔 높은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물로 뛰어든 '기생파티장'인 촉석루도 원래는 진주성의 지휘소였다. 서울은 어땠을까. 양반층이 밀집해서 살았던 만큼 서울도 단연 수위를 달린다. 흰 바위와 북한산 내린 물이 어우러진 세검정, 한강 뱃사장을 오고가던 백구를 바라보던 압구정...... 서울은 누정이 설 만큼 아름답기도 했지만 권문세가가 즐비하여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 되었으니 누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누정 창설자의 면면을 보면 중앙과 지방정치권력의 세력균형도 엿볼 수 있다. 가문이나 문벌을 내세워 누구누구 가문의 누정을 세워놓고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다 보니 공연히 거들먹거리는 부정적 요소도 없지 않았고, 민중의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비판의 대상만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조선 시대 선비정신이 구현되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모정과 누정의 21세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급문화와 서민의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몫이 있으므로 제 갈 길을 이어가게끔 도와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누정은 어떠한가. 누정은 엄밀하게 말하여 전통 시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하였다. 시인묵객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이제 인걸은 간 곳 없고 건물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 나는 누정이 지녔던 자연친화적인 교감을 굳건히 이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누정이 설 만한 전망 좋은 곳은 예외없이 호텔, 콘도 따위의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서 경관을 망치고 있다. 누정이 지녔던 자연 속의 자리잡음 방식만큼은 이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한 누정의 뛰어난 건축미가 지닌 전통의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이어져야 마땅하리라. 누정의 날렵한 처마, 숲 속에 그윽하게 들어앉은 자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빼어난 정감, 나무와 연못과 바위가 연출하는 선비정신 따위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 자산인 탓이다.
모정은 누정에 비하여 전통의 지속력이 완강한 편이다.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되고 있다. 초가는 기와로 바뀌었을지라도 모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 속의 민중과 더불어 유전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의 육모정도 바로 모정의 되살아남이다(단청 입힌 콘크리트 모정도 출현하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땅에 뿌리박은 농민의 문화가 가장 생명력이 강하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부용지와 부용정 출처 : "창덕궁 후원은 비원이 아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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