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프로이트 - 김정일
1장 진료실에서 쓴 프로이트 심리학
프로이트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 길고 먼 정신과 전문의 수련 과정에 배운 것보다 오히려 대학 시절 내 스스로 찾은 교양 서적을 통해서 탐독했던 것들이 내 정신이나 환자 치료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수련과정에서는 분명 많은 지식을 습득 했지만 정작 환자 치료에 자주 적용하는 것은 예과 때 방황하면서 읽었던 교양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우연히 접했던 책들이 강한 흡인력을 갖고 나의 정신을 순수하게 고민시켰기에 그렇게 오래까지 남지 않았나 생각된다. 프로이트 또한 그러했다. 복잡한 원서를 통해 습득했던 것들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고, 대학 시절 우연히 헌 책방에서 구한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책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정신에 물리학을 적용한 부분이었다. 프로이트는 그 비범한 재능으로 '역학의 법칙은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퍼스낼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하여 그는 퍼스낼리티 내부에서의 에너지 변형과 교환을 연구하는 역동적 심리학의 창울에 착수했다. 이 점은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현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달성 중 하나이다. 이는 실로 심리학사의 결정적인 사건이다.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칼빈 s. 홀 저, 황문수 역, 범우사, 1984.
그후, 프로이트는 내 의식의 한편에서 떠나지 않았고, 또 주위에서도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면서부터는 물론 더욱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융 심리학에 접하면서 내 인생은 커다란 격변을 겪게 되었다. 내 인생에 세 번의 전환기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융과의 만남을 그중 하나로 들 것이다. 융은 기존의 경직된 여러 가지 틀에 갇혀 있던 내 사고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내 속의 모호한 많은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정리해 주었다. 특히 꿈과 만나게 해준 것은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만나 겪는 변화만큼이나 큰 변화를 나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융도 멀리하게 되렀다. 융 학설이 아무리 뛰어난 것일지라도 결국 시시각각 새롭게 닥쳐오는 미래의 순간들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프로이트와 융을 공부하기보다는 내 눈으로, 내 안에서 떠오르는 느낌으로 새상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새롭게 만나게 된 혹자가 라캉이었다. 글을 쓰면서 라캉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라캉 연구학회에 들어가 라캉의 이론과 접했으나 아직 라캉의 속살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의 논리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아 선뜻 가까이 하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나는 내 안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이론이라도 내 안에서 당위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이론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신과에서 후배 레지던트들과 융의 저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을 함께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것은 맹목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융의 탐구는 존중하되 앵목적으로 따를 이유는 없다. 각자가 읽으면서 자기 마음에 와닿는 것을 찾고, 그리고 자기가 평소 느낀 것들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을 다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융은 초기에는 프로이트를 벗어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고, 서양의 과학이 대개 그러하듯이 불필요한 반박과 증명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우리 동양의 석학들은 그렇게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자기를 받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책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정신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의 방식과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양 사상에는 서양 정신의학으로서는 따라올 수 없는 무수한 수준의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들은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과거의 것이나 서양의 양식만을 이해하려고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프로이트와 융, 라캉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이론 중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부분만을 내가 소화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리라.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들
전라도 깊은 산골에 어떤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어떤 기자가 설마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의문을 품고 아내와 함께 그 스님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아내는 그 스님을 보는 순간부터 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줄곧 눈물을 흘렸고, 그 기자도 울음이 두 눈에 꽉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스님이 한 이야기는 단 두 마디였다고 한다.
"먼길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착하게 살아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신을 접하는 동양의 자세와 서양의 자세는 어떻게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동양의 스님들은 화두를 던져 주고 스스로 고행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는 반면, 서양의 정신분석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세세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 치료하려고 한다. 동양은 정신을 커다란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한편, 서양은 정신을 그 밑바닥까지 세세하게 해부해서 드러내 보려고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서양에선 학자마다 전집이 나올 정도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현대에서 어느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동양적인 정신치료 방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동양의 선각자들은 그것을 다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 놓았을 뿐,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명한 길은 정립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느 일정 부분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개개인의 길은 모두 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양의 정신치료 방식에는 분명한 주장이 참 많다. 그들의 주장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어떤 때는 예외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을 보면 이러하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창시하고 그후의 추종자들이 계속 발전시킨 것으로 심리탐구, 인간 행동에 관한 종합적 지식 체계, 심리적 질환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정신분석은 의식 외에 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는 역동적 무의식(the dynamic unconscious)의 존재를 강조한다. 정신분석이 정신을 하나로 보는 동양과는 달리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해서 본 것은 서양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성향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신의 무한함을 하나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가 용납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신결정론(psychic determinism)이 있다. 이 이론은 현대의 모든 사건들은 과거에 의해서 영향받고 결정지어진다는 것이다. 동양 사상에서 찾으면 자업자득이나 인과응보가 아닐까. 프로이트의 정신결정론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훗날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인과 관계이지만, 부교의 인과응보는 전생과 후생까지 따지니 이 둘의 성질은 다소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빨라져서 인과응보가 당대에서 일어난다고 하니까 둘은 근사할 것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은 성인기에서 아동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곱 살 때까지의 경험이 일생을 두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발달 과정을 구순기 (oral stage;출생 후 18개월까지), 항문기(anal stage;1-3세까지),성기기(phallic stage;4-5세)로 나누고 각각의 특징을 세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목표는 어린 시절의 병적인 갈등을 찾아내어 그 갈등을 야기시킨 마음의 힘들(이드, 자아, 초자아의 불균형)을 보다 건강하고 성숙한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아동기론은 인생의 전반기, 즉 30대 후반까지만 맞고 그 이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의 후반기를 설명하는 데는 다른 중년의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융 심리학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중요한 구분 요건이 될 것 같지 않다. 정신 연령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어서 애늙은이도 있고 늙은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당돌한 신세대가 많이 노오고 그들의 젊은 생명의 힘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나고 있으므로, 아동기 심리학이나 중년기 심리학과는 또 다른 신세대 심리학이 필요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의 주요 개념으로는 리비도가 있다. 이는 단순히 성 에너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분능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 에너지로 정립되었다. 이 리비도는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은 다양한 치료 기법을 제시했는데, 그 애표적인 방법이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다. 이는 르로이트가 압박법(환자의 이마에 치료자가 주먹을 눌러서 집중해 말하게 하는 것), 제반응(J. Breuer가 처음으로 시도했던 츠료 방법으로,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상기하거나 또는 재연시킴으로써 그러한 경험과 결부되어 있던 억압된 감정을 방출하고 해방한다는 것) 등을 써보다가 발견한 방법으로, 환자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다. 자유연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비스듬한 침대인 카우치(couch)를 고안해, 분석가는 침대에 누운 환자의 머리 뒤쪽에서 분석하도록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은 전이와 저항을 다루는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전이(transference)란 자라면서 의미가 있었던 사람(부모를 비롯한 권위자)과 유사한 감정을 현재의 사람, 특히 분석가에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저항(resistance)은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려는 검정을 표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환자는 분석가에게로의 전이를 통해 반복되는 아동기 감정 양식을 드러내고, 분석가는 과거와는 달리 그것에 성숙하게 대처해줌으로써 환자가 과거의 병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건강한 패턴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를 위해 분석가는 거울 같아야 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분석가라는 거울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굴곡이 없으면 없을수록 환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분석가에 대해 사적으로 아는 것이 없을수록 좋으며, 진료실을 벗어난 사회적인 접촉도 없을수록 좋다고 한다. 또 분석가는 환자의 말에 비판적이어서도 안 되고 가급적 반응을 해서도 안 되고, 환자의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그것을 분석 자료로 다루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는 기본적으로 분석가에게로 향한 전이가 좌절되는 것(transference frustration)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힘이 요구된다. 그래야 분석 상황에서 자아가 경험하는 것을 관찰해 자아로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이롸 저항을 적절하게 다루고, 어렸을 때 잘못 받았던 부모로부터의 영향을 건강하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 5회 면담을 7년 정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 말기에는 주 2-3회로도 가능하고, 7년이 너무 길면 4, 5년 정도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통 정신분석은 미국에서도 60년대부터 퇴조하고 있다. 아무래도 현실성이 너무 없기 때문이리라. 그 긴 기간, 그 엄청난 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분석해서 효과적일까 하는 회의도 든다. 정신분석은 이렇게 치료하면 약을 안 써도 스스로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건강한 인격체로 바뀐다고 하지만 글쎄다. 아무리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롭고 건강한 인격체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수많은 변수와 스트레스를 다 이겨 낼 수 있을까?
이렇게 매일같이 진료실에 한 시간씩 틀어박혀 아동기 감정양식만을 찾고 교정하느니 차라리 큰스님으로부터 화두를 하나 받고 속으로 되씹으며 열심히 현실의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특히 요즘같이 발빠른 적응이 요구되는 세상에서는... 그래서 나는 요즘 아동기가 성인기를 결정한다는 프로이트 이론보다는 이런 제언에 골몰하고 있다. 사람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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