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이스람 신비주의
윌리암 잉게(W. R. Inge)는 그의 유명한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종교적 신비주의란 영혼과 자연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감정 속에서 영원 속의 순간과 순간에세 영원의 내재를 인식하게 되는 시도로서 정의될 수 있다고 했다. 신비주의에 대한 여타의 많은 정의가 간략하게 문장으로 표현하려 했으나 이들 정의 중 일부가 비판되고 날카로운 통찰로 재검토되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들도 신비주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는 데 쩔쩔맸다는 것은 상기할 만하다. 만약 일반적 신비주의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수피즘으로 알려진 특이한 형태의 이슬람 신비주의도 아마 개개의 무슬림들, 그리고 개인적 체험 속에서 알라의 실제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각기 체험을 기술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과 합일을 위한 추구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우선 먼저 숭배의 대상이고 최고의 모형이며 도달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다음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목적을 고찰한다. 신비적인 노력에 관한 예들을 위해 성자들의 생애와 신비주의자들의 서적을 뒤적일 수도 있다. 성례전과 주일성수, 금욕의 실천, 개인 묵상, 그리고 영적수련을 통한 신의 은총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슬림 신비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알라 사이를 중재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중재자가 없다. 사실 완전한 인간으로 이상화되었던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이 원하던 것을 부분적으로는 공급했지만, 신적 영광은 받지 못했다. 수피에게 로고스(logos)는 쿠란과 창조된 세계에 계시된 알라이므로 쿠란은 신앙과 목상의 초점이었고, 실제 우주는 활동하는 알라를 직접 관찰해 보는 현장이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처럼 공적인 의식이나 사적인 신앙생활의 규정된 규율도 따랐다. 이슬람의 초기 성자들은 최고의 모형이 신앙의 창시자, 무함마드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후 줄곧 많은 입문서가 신비주의자 교육을 위해 쓰여졌고, 공동의 금욕생활과 알라에 대한 기도를 위해 수도원이 세워졌다. 수피즘은 이스람 기원 첫 3세기(서기 7~10세기) 동안에 걸쳐 발생했는데 8~9세기에 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수피즘(Sufism:Tasawwuf)이란 용어는 수프(Suf,털)에서 파생됐다. 무슬림들은 조잡한 털옷을 입음으로써 기독교 관습에 관한 저항하고 기독교 세계에 관한 거부를 나타내었다고 말하고 사람도 있다. 금욕주의와 묵상주의가 이 운동의 첫 단계의 특징이 되었다. 그것은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정복지로부터 흘러 들어와 이슬람을 압도하고 이슬람의 원시적 단순성과 다른 세 속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배금사상과 사치에 대한 필연적인 반발이었다. 이런 저항에 대표적인 사람으로 하산 알 바스리(728년 사망)를 드는데, 무으타질라학파의 창시자이며 무슬림 신학자이다. 그는 칼리파 우마르 2세 앞에서 고위적의 부패를 날카롭게 질타함으로서 후대 수피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모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할 말을 했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에서 어떤 무슬림들은 그들 동료와 헤어져 레반트 지역에 가서 당시 흩어져서 은거하던 기독교인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전적으로 금욕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사막이나 동굴로 들어가 은둔했다. 다음은 시라아의 한 여자 금욕주의자가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묘사한 글이다.
그들은 모든 목적마다 신과 맺어져 있네. 그들은 높은 야망은 신께로만 상달되니 그들은 진실을 신께 맹세하네. 영원한 이를 위해, 오, 고귀한 추구여. 그대들은 명예도 자식도 부와 비싼 옷가지들. 모든 탐욕, 식욕, 이 세상의 쾌락을 위해 다투지 않네. 그대들이 도시에서 사는 편안함과 즐거운 생활을 소중히 여지기 않듯 저 건너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대들은 강렬한 목적 의식으로 조물주을 찾으려 애쓰네. 황량한 실개천이 헤매는 곳을 밟기도 하고 신꼭대기 높이 치솟은 곳에 그대들은 모이리. 대분분의 다른 사람들은 정직하고 합법적인 사고로 입에 풀칠할 정도이면 자신들의 개인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초라한 집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밤낮으로 알라에게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금욕주의 운동은 메디나에서 쿠파, 바쓰라,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그리고 후라산과 신드의 먼 지방까지 퍼져 갔다. 이내 곧 수피즘이 발달하여 두 개의 주요 중심지로 이슬람의 수도 바그다드와 페르시아의 북동부가 떠올랐다. 페르시아 북동부에서 선구자가 된 이브라힘 븐 아담은 왕국을 포기하고 국외로 떠돌아다녀 한때는 시리아의 정원사로 스스로 고용되기도 했다. 서기 9세기에는 단순한 금욕주의에서 복잡한 이론이 실린 신비주의적 고행으로 발전되었고, 이로부터 고도로 발달된 신지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초기단계으 주요한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오로지 간접적인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이러한 변화과정을 정확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더듬어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발흐 태생의 샤끼끄(Shaqiq, 810년 사망)는 ‘알라에 대한 믿음’을 신비적인 상태로 정의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자료는 비교적 최근에 근거한 것인데 그 당시에 이미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영적 상태(hal)와 영적 도달점(maqam)’의 구분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이후에는 수피운동이 활발했고 스피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영적 지도자(쉐이크)와 초심자(무리드) 사이의 관계는 권위와 무결점이 그 특징이었다. 수피즘 교육의 중심지는 수도원이었고 아직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종단으로는 창시자 압드 알 까디로 알 질라니(1165년 사망)의 이름을 딴 ‘까다리아’종단이 있다. 그는 원래 엄격한 한발리파였고,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순례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 뒤 까다리아 종단으로부터 많은 종단들이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종단으로는 압드 알 까디르의 조카인 아흐마드 알 리파이(1182년 사망)가 세운 리파이야 종단으로, 오늘날 터키, 시리아, 이집트에 퍼져 있다. 이 종단은 매우 광신적인 모습과 13세기 몽골이 이라크를 점령했던 시기에 영향을 받은 원시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요술은 물론 유리먹기, 불밟기, 뱀놀이 등과 금욕의 극단적인 수행이 두드려졌다. 두번째 종단으로는 샤피이학자이며 압드 알 까디르의 제자였던 알 수흐라와르디(1234년 사망)가 세운 수흐라와르디야 종단이 있다. 이스람 세계에서 이후에 세 명의 유명한 신비주의자가 등장했다. 그 중에 알 아라비는 1165년 스페인 남부 무르시아에서 태어나 세빌리아에서 수학하고 튀니지에서 스피즘을 주창했다. 1202년 그가 동쪽으로 여행을 시작하여 이라크, 아나톨리아, 시리아를 거쳐 메카에 이르러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마침내 다마스쿠스에 정착한 후 1240년 세상을 떴다. 그는 창의력이 풍부하여 순니, 시아 이스마엘파, 수피.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그리고 연금술에 의지하여 신비주의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의 교파을 요약하면 알라은 절대적이고 물질계를 초월하여 우주 어디나 존재하며 우주의 창조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은 무함마드으 실재라고 표현했다. 둘째 번으로는 이븐 알 파리드를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꼽는데 1181년 카이로에서 태어나 1235년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알 아라비와 달리 그는 여행이라고는 오직 메카순례뿐이었다. 그는 위식을 통해 알라와 세상 사이의 중재자 무함마드의 영혼과 합일된다고 생각했다. 셋째 번으로는 잘랄 알 딘 루미가 있는데 그는 1207년 발흐에서 태어나 그의 여생을 코냐에서 보냈고 수피교리와 훈련요령에 대하여 글을 썼다. 수피들은 알라를 염원하라는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 알라라는 단어를 반복했으며,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라는 신앙고백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의식적인 반복행위는 아랍어로 디크르(Dhikr)라고 하는데 이 디크르는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알라와 같은 구절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때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디크르에 수행과정의 도구로서 묵주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묵주는 본래 불교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인도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 아니고 동방 기독교 교회를 통해 수피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이 중동에서 이를 발견하여 서양에 소개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에 전래되었다. 수피종단에서의 수행과정은 각기 특징적인 디크르를 갖고 있으며, 이를 완전히 습득하기 위해 쉐이크나 피르(pir, 우르두어로 성인이라는 뜻)로 일컬어지는 스승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이런 영적과정을 아랍어로 따리까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피들의 수행자체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간의 교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수피종단은 기독교의 수도원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따라서, 종단의 핵심 멤버로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한는 쉐이크와 그이 제자(테르위쉬)들이 있었고, 일반신도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리까의 일부수행에 참여하였다.
신비주의자들은 전통이나 계시, 관찰, 논리적 사고와 명상 등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다만 신에 대한 참 지식은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심성은 거울과 같아서 그 내부에서 신의 영상을 볼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인간 심성으로서의 거울은 세속에 대한 욕심이 많아 먼지가 가득함으로 그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세속적 먼지(욕구)를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비주의자들의 수행과정에는 세속으로부터 이탈시키는 수도, 그리고 명상과 자기성찰을 통해 신의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것 등 두가지가 있다. 그 수행과정을 여행으로 묘사하여 궁극적으로는 알라 안에서의 자아소멸을 이루려 하였다. 수피들은 그 수행과정에서 수행 성취단계들을 구분지어 영적 도달점(station)와 영적상태(state)로 나누었는데, 그들의 정교한 이론에 속하는 이런 구분은 영적 도달점을 개인의 노력에 의해 획득되어진 정도로 정의하는 한편, ‘영적상태’를 은총에 따라 계속 변하는 전진을 정의했다. 수피즘의 유명한 이론가인 알 꾸샤이리(1072년 사망)는 ‘영적상태’를 선물로, ‘영적 도달점’을 자신이 일해서 얻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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