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1510-1560)의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 호는 하서이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9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가 학업을 닦은 뒤 정자 겸 설서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김인후를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은사와 예우가 날마다 융숭하였다. 그래서 간혹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조용히 어려운 데를 묻기도 하고 특별히 서책을 내려 주기도 하였으며, 또 대나무 묵화를 그려 주어 은미한 뜻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김인후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옥과현감이 되었다. 그 무렵 인종이 승하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김인후는 놀랍고 슬퍼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그 일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어떤 관직에 임명되어도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선산 곁에다 재실을 짓고 '잠재'라 편액하고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송강 정철이 시를 지었다.
동방에 처세하는 근본이 없더니 유독 잠재옹이 있구려 해마다 7월이 오면 깊은 산중에서 통곡하도다
이 시는 김인후가 매년 7월 1일 인종의 기신을 당하면 번번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밤새도록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환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시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