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붕(1495-1554)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경유, 호는 신재이다. 중종 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3년 뒤에는 헌납으로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주세붕이 그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흰 실 여덟 타래를 주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정말 어머니의 병이 낫고 80일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제야 그 여덟 타래가 80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준 징조였음을 알았다.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의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주세붕이 홍문관에 있을 때에 직제학이 바르지 못한 의논을 하므로 주세붕이 면대하여 공박하기를, "귀하는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오" 하니, 그 사람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가 되어 문성공 안유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을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과 사기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년(1550)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라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송나라 백록동 서원 학규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을 써 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 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감사 심통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 주고,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 기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와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 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룸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죽었으며, 벼슬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죽계지'와 '무릉지'가 있고 합천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형의 아들 주박을 후사로 삼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