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복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자유, 호는 고암이다. 김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홍순복이 남원에 있으면서 행장을 차려 장차 떠나려는 참인데, 아내 김씨가 띠를 잡고 그를 말리므로 홍순복이 분연히 칼을 뽑아 띠를 끊어 버리고 떠났다. 드디어 관학유생과 함께 궐문을 지키며 소를 올렸는데, 체포되어 갇혔다가 곧바로 석방 되었다.
중종 15년(1520)에 이신이 "김식이 도망 중에 있으면서 문도를 거느리고 집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홍순복이 김식의 제자로서 연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할 때 승복하여 장류를 당하게 되었다. 대간이 "공사가 공손하지 않고 시정을 많이 헐뜯었다" 하여 사죄의 율로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그가 처형을 당할 적에 썩은 노끈이 두 번이나 끊어졌다. 홍순복이 감형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그대가 왕명을 받들어 처형을 감독하면서,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호통을 칠 적에 그의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암으로 신주를 쓰라"
홍순복은 타고난 자질이 개결하였다. 처조 김맹유가고을 수령이 되었는데, 홍순복이 우연히 그 고을에 들렀다. 김맹유가 물었다.
"그대가 그리도 궁핍한데, 어찌 하나도 구하는 것이 없는가?" "공이 관물을 주는 것도 부당하고 내가 받는 것도 부당합니다" "사소한 노자가 의리에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그만 둘 수 없다면 꿀 5합, 개가죽 반 벌이면 족합니다"
김맹유가 이 물건들을 싸서 주었다. 홍순복은 집에 돌아와서 다시 돌려주며 말하였다.
"개가죽은 말 안장이 끊어지는 근심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고 꿀은 먼 길에 갈증을 두려워한 것이었는데, 지금 다행히 면하였으니 그것을 집에 두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므로 돌려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