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기(1457-1533)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이지, 호는 돈후재이다. 미천할 때에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은 허암 정희량과 교분이 깊었다. 허암이 예문관 검열이었을 때 하루는 조원기가 그를 찾아가 함께 잤다. 이튿날 높은 소리로 불러 대며 길을 메우고 찾아오는 명관달사가 매우 많았다. 손들이 떠나간 뒤 정희량이 물었다.
"명사의 무리들이 부러운가?" "빈한함이 이와 같으니, 관문을 지키는 낮은 벼슬도 나보다는 나은데, 하물며 저 금마문 옥당의 선비이겠는가" "그대는 부러워하지 말게. 저들은 다만 아침 이슬처럼 잠시일 뿐이네. 그대 같은 사람은 빈궁하게 40살 살고 영달하게 40살 살 것이니, 장수는 그 속에 있네"
정희량과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원기가 한강을 건너는데, 배가 부서져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조원기는 문득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다"는 정희량의 말을 떠올렸다.
"정희량군이 어찌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는 그대로 산발한 채 눈을 감고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에 도달하였으나, 그것이 육지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저 손발로 기어다니는 사람이 누구지?"
조원기가 드디어 눈을 떠서 살펴보니 이미 한강 모래톱을 건너온 것이었다. 조원기는 40살이 되어 문과에 처음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에 이르고, 나이도 80을 넘겼다. 시호는 문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