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인(1445-149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극기, 호는 뇌계이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가 되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할 적에, 임금이 내시 한 사람만 데리고 밤에 임어하였다. 유호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임금이 사모만 쓰고 앉도록 하고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비단 이불이 해져 솜이 나오고 또 솜의 빛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임금이 칭찬하였다.
"네가 맑고 중요한 벼슬을 지내면서 청렴 검소함이 이러하니 가상하다" 임금은 곧 내시에게 이불을 가져오게 하여 덮어 주었다. 벼슬은 합천 부사에 그쳤다. 한번은 영남으로 어버이를 뵈러 귀향하는데, 임금이 내관을 시켜 중로에 따라가서 그의 시주머니를 뒤져서 가져오게 하였다. '조령에 올라서 읊은 시'는 이렇다.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멀리 떨어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머니와 가까워졌네
주상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충효가 모두 구비되었구나"
공이 일찍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산음현감을 자청해 나갔는데, 관리로서의 일처리가 미숙하여 일반적인 문서도 잘 처결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장을 올렸는데, 여러 날 지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자, 다시 호소하였다. "판결을 내려 주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고 오직 본 소장을 도로 찾아 가고자 할 뿐입니다" 유호인이 답을 못하여 우물쭈물하는데 통인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부임하던 날 올린 소장도 아직까지 판결하지 못하였는데, 네가 올린 소장은 겨우 닷새 밖에 안 되었다. 어찌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너무 심하다" 뇌계가 그 민첩함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 통인이 참으로 영특하고 매우 뛰어나다"
영남의 방백이 부임차 하직 인사를 할 적에 성종이 그를 인견하고 특별히 부탁하였다. "내 친구 유호인이 현재 산음현감으로 있으니, 경이 그를 보살펴 주구려" 그 방백은 왕의 뜻을 거행하지 않고 끝내는 '유호인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만 읊고 있다'는 죄목으로 파면했다. 한다. 당시 군왕들의 넓은 기상과 도량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