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1387-1456)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중장, 또는 대장이며 호는 단계, 또는 적촌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서 대궐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길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시강원과 경연석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그 당시 인재를 말할 적에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뒤 좌사간에 올랐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공실(왕실)을 강하게 하고 내치를 엄하게 하며 권문을 막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봉록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쌓아 두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그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은근히 타일렀다.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접 나와서 죄인들을세 차례나 단근질을 하였다. 드디어 하위지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였다. "이미 역적 이름에 올랐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음인데 또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조는 화가 났으나 단근질은 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성삼문과 같은 날에 죽음을 당했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하위지는 호와 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때 박은 채 스무 살도못되었다. 박은 조금도 떠는 기색 없이 금부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께 작별인사 드릴 시간을 주시오" 그는 꿇어 앉아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이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또한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몰수되어 노예가 되겠지만 여자의 의리는 마땅히 한 남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절대 개돼지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약을 받자 사람들은 과연 하위지의 자식답다고 말하였다. 하위지의 동생인 생원 강지, 기지는 형 하위지와 함께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였고 소지는 생원이었는데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박은 뒤에 지평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