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거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 배극렴
배극렴의 자는 양가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여러 번 문하좌시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조준, 정도전 등 대소신료들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또 둘째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평화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우선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진언하였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신덕왕후가 이 말을 엿들었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배극렴이 또 태조에게 불려 갔는데, 이때엔 맏아들이 우선이니 공로가 우선이니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물러 나와 여러사람들과 상의하였다.
"강씨가 자기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방번은 무절제하니 막내를 세우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배극렴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조에게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도록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시중으로서 개국 공신 일등에 영의정으로 특진되었으며, 성산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