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놈은 살기를 바라지 말라. 그러나 천하에 옳지 못한 자들을 훈계하기 위해서라도 너를 쉽게 죽이지는 않는다. 너를 우리 제나라로 데려가 남문 밖 광장에서 거열형(車裂刑)으로 다스리겠다."
거열이라고 하면 수레 다섯 대에다 죄인의 머리와 사지를 비끄러매고 수레의 소를 매질하여 다섯 수레가 일제히 각기 방향으로 달려가면 죄인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갈갈이 찢어지는 극도로 가혹한 형벌이다. 임치성 남문 광장에서 고거미를 처형하는 날이 되었다. 그 동안 임치성 곳곳에 방(榜)이 붙어 있었다.
-임금을 죽인 역신(逆臣)의 말로를 보아라.-
그러나 처형하는 날 막상 남문 밖 광장에 구경 나온 백성들은 별로 없었다. 그날, 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제양공은 매우 불쾌했다
"널리 알리라고 했거늘 어찌된 것인가?"
"참혹하기에 구경조차 민망스러운가 봅니다."
주위에서 얼버무렸다. 하지만 제양공이 모를 리 있으리오. 백성들이 아직도 자신을 무도한 임금이라고 욕한다는 사실을....... 제양공은 형 집행하는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우울한 기분으로 궁으로 돌아왔다. 맹양이 아뢰었다.
"이제 정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공의 광명 정대하심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우호를 맺도록 하십시오."
제양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로 제나라의 사자가 정나라로 갔다. 제나라 사자가 정나라에 가서 대부들을 모아놓고 제양공의 말을 전했다.
"천하에 역신을 벌하는 명분은 왕실(王室)의 위엄이라. 이번에 정나라 고거미가 주모하여 소공을 죽인 후 제멋대로 임금을 세우는 등 망녕된 거동을 하였기에 과인이 잡아죽였노라. 이제 정나라는 새로이 어진 임금을 세우고 주왕실에 충성하고 우리 제나라와 우호를 맺도록 하여라."
제양공의 분부는 마치 천자가 제후에게 하는 듯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를 내세우지 못했다. 이날 대부 원번은 연신 찬탄했다.
"과연 제족의 형안을 누가 따르리오. 그의 예측 그대로 되었도다."
이렇게 하여 정나라 대부들은 모여서 새 임금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숙첨이 의견을 내놓았다.
"지난날 임금으로 있었던 여공을 모셔오면 어떻겠소?"
제족이 반대했다.
"망해서 달아난 임금을 다시 모실 순 없소. 공자 의(儀)가 어지시니 새 군위에 모십시다."
이에 원번이 찬동하니 반대하는 대부가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에 망명해 있던 공자 의를 영접하여 군위를 세우고 조정의 기강을 새롭게 했다. 즉, 제족이 상대부가 되고 숙첨이 중대부, 그리고 원번이 하대부가 되어 정사를 담당하고 사자를 진.제나라 등을 비롯해 남방의 초나라에까지 보내 새 군위의 즉위를 알리고 우 호 친선을 도모했다.
소백의 충고
정나라 군위가 정해지고, 이를 알리는 사신이 제나라로 왔다. 정나라 사신은 제양공에게 크게 아부했다. 마치 주왕(周王)이라도 뵙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져온 예물도 황금과 비단, 옥구슬 등 상당했다. 제양공은 기분이 풀어져 지시했다.
"정나라 사신을 위해 큰 잔치를 열어라."
참석한 대부들이 이구 동성으로 제양공의 처사를 높이 떠 받들었다.
"이번에 정나라 군위를 바로잡으신 일은 천하에 뜻 깊은 일입니다. 이제 역신(逆臣)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모든 나라들 공자의 처신도 바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주공의 은덕입니다."
누구나 칭찬을 받으면 흡족해지는 법이다. 제양공은 크게 기뻐하며 좌중을 돌아보고 더욱 우쭐댔다. 제양공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공자와 공손들이 모여 있는 좌석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제양공은 더욱 우쭐대고 싶었다. 마침 막내동생 소백이 눈에 들어왔다.
"소백은 이 형후(兄侯)의 성취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소백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큰 성취를 하셨겠지요."
"누가 그걸 모르겠느냐. 그런데 너의 대답이 어찌 불경스럽게 그 모양이냐."
제양공은 속으로 샐쭉했다. 평소에도 어딘가 막내답지 않게 의젓하고 야무진 소백이 싫었었다. 그래서 늘 경계하고 있었다. '녀석은 나하고 다르다. 어딘가 위엄이 있다.' 소백도 제양공의 호색하고 문란한 생활 태도와 우쭐대는 모습이 애시당초 생리에 맞지 않았다. 자연히 대답이 퉁명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경스러운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고거미라고 해서 무조건 소공을 죽였겠습니까?"
"너는 고거미의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냐?"
제양공이 벌컥 화를 냈다.
"......."
소백은 대답을 하지 않고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 자세가 제양공의 눈에는 마치 무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쳤다. 그래서 제양공의 노여움은 더욱 꼬여들었다. 평소부터 꽁하고 맺혔던 감정도 더해졌다.
"네 놈이 군후를 능멸하는데 그 죄가 어떠한 줄 아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제양공은 말을 하면서도 소백을 노려보았다. 속으로 이런 정도의 반응을 기대하며 노려보는 것이리라. '형후는 노여움을 푸소서. 어찌 형후를 능멸하겠나이까. 용서하십시오.' 소백은 소백대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자신이 속으로 제양공을 군위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한 바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고거미는 정나라 신하입니다. 그와 작당한 사람도 정나라 신하입니다. 또 그가 죽인 군후도 정나라 임금입니다. 우리 제나라 임금을 해친 것이 아닙니다."
소백이 이렇듯 말한 것은, 당신은 노나라 군후를 죽이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제양공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곁에 있던 공자들이 재빨리 소백을 데리고 밖으로 피하고, 다른 이들은 제양공을 모시고 그 자리를 떴다. 그래서 잔치는 흐지부지 끝났다.내궁으로 돌아온 제양공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내 이 놈을......."
당장 소백을 처치하고 싶었다. 아니 그 자리에서 소백의 무례함을 멀건히 보고만 있었던 다른 이들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제양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더니, 심복 맹양을 급히 불렀다.
"그 소백이란 놈을 징벌하지 않고 이대로 놔둘 수는 없도다. 곧 붙잡아들여라."
맹양이 작은 목소리로 달래듯 아뢰었다.
"소백 공자의 일은 여느 신하의 경우와 다릅니다. 자칫하면 주공 집안의 내분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리고 소백 공자에게는 주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습니다. 신중하시는 게 좋습니다."
제양공이 의아해 물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 놈이 패거리라도 만들었다는 말이냐?"
맹양이 아뢰었다.
"소백 곁에 포숙아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매우 엄격한 사나이이지만 사람을 잘 다룹니다. 천성적으로 의리가 있고 사람을 잘 사귄다 합니다. 그 포숙아에게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중히 처리하시라고 여쭙는 말입니다."
제양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모두 잡아들이면 될 것이 아니냐?"
맹양이 대답했다.
"그래서 며칠 말미를 주시면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여 함께 잡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제양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맹양의 말대로 며칠 더 기다려 조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