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정나라에서 새로 군위에 오른 공자 돌, 정여공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그 자신이 도망쳐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는 무리한 방법으로 군위에 올랐기 때문에 처음 약속한 대로 정사(政事)의 실권은 정경 제족에게 주고 자신은 명분상 임금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나라에서 부고가 왔다. 주환왕이 죽고 세자 타(陀)가 새로 즉위했다는 것이었다. 정여공은 이 기회에 선군인 정장공과 주환왕과의 원한을 씻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새 천자에게서 정나라의 임금으로 합법적인 인준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조상하고 새 천자의 등극을 축하하러 낙양으로 갈 생각이었다. 제족이 앞으로 나와서 간했다.
"죽은 주환왕은 우리 정나라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난 날 우리나라 장수 축담이 활로 그의 어깨를 쏘아 맞춘 적이 있습니다. 그후 주환왕은 우리 정나라를 크게 미워했습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상했다 해도 새로운 왕, 주장왕(周莊王)에게 욕이나 먹지 않고 돌아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친히 가신다면 자칫 험한 일을 당하실까 염려됩니다."
정여공은 제족의 반대하는 말에 마땅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쾌한 감정이 꼬여들었다 '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뭣이든 제 맘대로 하네.' 정여공은 모든 정사를 제족에게 맡겼지만 차츰 정사에 관여하고 싶어 했고, 제족은 정여공을 철저히 견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사한 자는 후사(後事)를 염려한다.' 꼭 그런 것인가? 제족은 궁궐 내에 세작을 정보원으로 심어 놓고 정여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엄밀히 감시했다. 제족이 주환왕의 문상을 만류한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정여공은 후원을 산보하고 있었다. 대부 옹규가 그뒤를 따르고 있었다. 후원 숲에서는 많은 새들이 훨훨 날아다니며 맘대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정여공은 그 모습을 살펴보고 있더니 처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가던 옹규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주공께서 어찌하시어 이 화창한 날씨에 한숨을 쉬시나이까? 이제 군위도 반석에 오르게 되었고 부귀 공명도 이루셨는데요."
정여공이 쓸쓸하게 웃으며 푸념했다.
"저렇듯 새들도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노래하는데 과인은 어찌하여 저 하늘의 새만도 못하더란 말이냐?"
옹규가 정여공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현재 정사(政事)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주공."
정여공은 아무런 대답을 않고, 뒤돌아서 옹규를 물끄러미 바라만보며 서 있었다. 옹규가 재빨리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듣건대 임금은 부모와 같고 신하는 자식과 다름없다 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근심하지 않으면 이는 곧 불효한 자며, 신하로서 그 임금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이는 곧 불충이라 했습니다. 주공께서 말씀만 하십시오. 이 옹규가 재주는 별로 없지만 송나라 시절부터의 정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공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제서야 정여공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은근한 목소리로 옹규에게 말했다.
"경은 제족의 사위가 아니던가?"
옹규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 관계로 말하자면 사위와 장인 사이이지만 따지고 보면 남과 다름없습니다. 주공도 아시다시피 제가 장가들게 된 것이 송후(宋侯)의 위협에 부딪쳐서 하게 된 일 아닙니까. 제족이 옹규를 진실로 어여삐 여겨 혼인한 것이 아닌데 어찌 사위고 장인이라 하겠습니까. 저는 주공께 일신을 바친 몸입니다. 그래서 송나라에서부터 따라온 것입니다. 저는 제족의 불충을 보고 항상 마음 속 깊이 아파했습니다. 단지 주공의 참뜻을 몰라 이제껏 속마음을 드러내 놓지 않고 있던 것뿐입니다."
정여공이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이 능히 제족을 죽일 수가 있다면 그 아니 좋겠느냐. 그리하면 경에게 제족의 자리를 물려 주겠도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책이 서지 않는구나."
옹규가 계책을 아뢰었다.
"동쪽 교외에 아직도 허물어진 성곽이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도 자리를 잡을 겸하여 우선 곡식 창고부터 수리하도록 사도(司徒)에게 명하십시오. 동시에 제족으로 하여금 곡식과 포(布)를 가지고 가서 그곳 백성들을 위로 하도록 주공께서 권하십시오. 그러면 신은 장인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 즈음 기회를 엿보아 독주(毒酒)를 먹여 제족을 죽이겠습니다."
정여공이 부탁했다.
"이제 과인은 모든 것을 경에게 맡기노라. 경은 자세히 알아서 빈틈없이 하라."
아비가 중하냐 남편이 중하냐
이날 옹규는 매우 들떠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내를 보며 옹규는 약간 당황해 했다. 제씨(祭氏)는 남편이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여느 때와 다름을 알고 문득 의심이 갔다.
"오늘 궁중에서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
"아아, 아니오. 아무 일도 없었소."
제씨는 남편의 기색이 더욱 달라지는 걸 보았다. 그녀는 더욱 의심이 나서 물었다.
"첩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마는, 안색을 뵈오니 오늘 조정에서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부는 한몸인데 일이 크든 작든 간에 첩이 알아서 몹쓸 건 무엇이겠습니까?"
옹규가 태연한 체하면서 대답했다.
"장인이 파괴된 동쪽 교외에 가서 백성을 위로하게 됐는데 나도 그곳에 가서 잔치를 열고 장인의 노고를 위로하기로 했소. 그외에는 궁중에서 아무런 논의도 있지를 않았소."
그러나 여자의 육감이란 게 어디 그런가. 제씨는 의심이 더 짙어졌다.
"우리 친정 아버지를 대접한다면서 하필 교외에 나가 하실 건 뭡니까?"
옹규가 궁해서 대답했다.
"이는 주공의 분부이시니 나는 그저 명에 따를 뿐이오. 그대는 자꾸 이상하게 묻지마시오."
제씨는 남편의 태도에서 의심을 굳히고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오히려 그날 저녁에 좋은 주안상을 차려 놓고 남편 옹규에게 술을 권했다. 옹규는 제족을 죽일 작정이었기 때문에 우선 아내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권하는 술을 덥석덥석 잘 받아 마셨다. 이윽고 그는 크게 취하여 쓰러졌다. 제씨는 정신없이 쓰러진 남편을 한참 굽어보다가 사내 목 소리를 지어서 물었다.
"주공은 너에게 제족을 없애라고 명하였거늘 네 이미 잊었느냐?"
대취하여 쓰러진 옹규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을 못하고 취한 소리로 중얼댔다.
"어찌 그 일을 잊었을 리가 있겠사옵니까?"
제씨는 새삼 놀랐다. 제씨는 더 이상 일을 벌이지 않고 살며시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이튿날 옹규는 일찍 일어났다. 제씨가 남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주공의 명을 받아 우리 친정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시지요? 다 알았어요."
옹규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제씨가 남편을 흘겨보았다.
"다 그만두세요. 어젯밤 취해 주무시면서 여러 가지 잠꼬대를 하십디다. 그러니 누가 모를까 봐서요. 그렇게까지 시치미 뗄 필요는 없어요."
그제야 옹규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 말대로 정말 그런 일이 있으면 그대는 어떻게 행동을 하겠소?"
"출가외인이라, 여자는 남편만 따를 뿐입니다. 다른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옹규는 비로소 찌푸렸던 이맛살을 펴며, 제족을 죽이기로 한 주공과의 자초지종을 다 말했다. 제씨가 남편의 말이 끝나자 걱정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시다시피 궁중 이외에는 잘 출입하지 않는 성미입니다. 그곳으로 갈지 안 갈지 걱정입니다. 그날이 되면 첩이 하루 먼저 친정에 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아버지를 꼭 나가시도록 힘쓰리다."
옹규가 말했다.
"이 일이 성공하면 나는 정경 벼슬에 앉아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오. 그대는 정경 부인이 되는 것이고......."
제씨는 하루 앞서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 당도한 제씨가 고민 끝에 모친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친정 아버지와 남편,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소중하다고 보세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둘 다 소중하지."
"아니 아버지와 남편을 딱 잘라서 선택한다면 어느 쪽이 더 소중하냐는 말씀이에요, 어머니."
어머니는 오랜만에 친정에 온 딸이 귀여워서 또 웃으며 대답했다.
"꼭 따져야 한다면 아무래도 아버지가 소중하지."
제씨는 그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자가 시집을 가기 전에는 남편이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있어야 세상에 태어나니 아버지만은 이미 정해진 바다. 또 여자는 시집을 갔어도 남편이 죽으면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꿀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남편을 어찌 아버지에 비할 수가 있겠느냐. 단연 아버지가 소중하다."
어머니는 무심코 한 말이었다. 그러나 딸에게는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제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이제 아버지를 위해 남편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제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옹규의 계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 놓았다. 어머니는 이 천만 뜻밖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 즉시 제족에게 고했다. 제족은 머리를 조용히 끄덕이며 간단히 말했다.
"너희들은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거라. 내가 알아서 잘 처분하겠다."
이튿날 제족은 태연하게 동쪽 교외에 가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곡식과 베를 준비시켰다. 제족은 이미 심복 부하인 강서(强鋤)를 시켜 용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각기 비수를 품고 뒤따라오도록 했다. 이때 공자 알도 제족의 지시를 받고, 가병(家兵) 100여 명을 무장시켜 교외에 매복하고 있었다. 마침내 부근에 이르자 옹규가 마중을 나와서 영접했다. 제족은 시치미를 떼고는 백성들을 위로한 후 옹규가 차린 잔치 자리로 갔다. 제족이 옹규에게 말했다.
"나랏일을 위해서 다니는 것은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데 어찌 사위는 수고롭게 이렇듯 잔치까지 베풀어 나를 대접하는가?"
옹규가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 교외의 봄빛이 한창입니다. 그저 약간의 음식을 준비한 것뿐입니다. 이 한잔을 받으소서."
그는 제족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큰 잔에다 술을 한잔 가득 부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잔을 바쳤다.
"백수(百壽)하소서."
제족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잔을 받는 체하다가 갑자기 옹규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옹규의 손에서 그 술잔을 번개같이 빼앗았다. 제족은 그 술을 연못에 부었다. 순간, 푸른 연못에서 검은 독이 피어났다. 제족이 크게 호령했다.
"이노옴! 네 어찌하여 나를 이렇듯 희롱하느냐!"
또 제족은 곧바로 좌우의 수행원을 돌아보며 호통을 쳤다.
"이 중에 나를 위하여 이 발칙한 놈을 끌어낼 사람은 없느냐!"
그때까지 제족 옆에 공손히 서 있던 강서는 대뜸 크게 노한 체하며 부하 용사들과 함께 옹규의 사지를 잡아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옹규를 결박했다. 강서는 곧 칼을 뽑았다. 순간 옹규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목이 땅바닥으로 굴렀다. 용사들은 연못에다 목 없는 시체를 발길로 차 넣었다. 한편 정여공이 보낸 무사들은 옹규를 도우려다가 매복해 있던 공자 알의 가병들에게 들켰다. 동쪽 교외에서는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한편 정여공은 궁중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도망온 병사가 말하기를 옹규는 잡혀 죽고 공자 알의 가병들이 기습해 왔다고 알렸다.정여공은 크게 놀랐다.
'제족이 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구나.'
정여공은 급히 채나라로 도망쳐 달아났다. 얼마 후, 정여공은 그 일이 실패한 것은 옹규가 그 아내 제씨에게 비밀을 누설해서 제족이 미리 알고 대응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때 정여공은 탄식했다.
"국가 대사를 여편네와 상의하다니.......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
제족은 정여공이 이미 달아났다는 걸 알고 서둘러 사신을 위나라로 보내었다. 그는 망명중인 정소공을 모셔오게 할 작정이었다. 마침내 정소공이 돌아와 다시 군위에 올랐다. 제족은 지난번 비밀리에 바친 장계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소공은 제족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