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바라나를 국호로 하는 큰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국왕의 이름은 바라마달이었다. 그에게는 왕자가 두 명 있었는데, 모두 신체가 건장하고 얼굴 또한 무척 잘생겨서 국왕은 그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런데 왕자들 중 작은 왕자는 항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마땅히 형이 왕위를 계승하리라. 세상에 태어나 왕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도를 닦는 것이 더 나으리라.' 이에 작은 왕자는 부왕에게 가서 말했다.
"저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신선의 도를 구하려 하오니, 원컨대 허락해 주십시오."
바라마달왕은 처음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다가 작은 왕자의 뜻을 절대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승낙했다. 몇 년 후, 국왕이 서거하자 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형은 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몹쓸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형에게는 왕위를 이어받을 자식도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그때 한 나이 든 대신이 말했다.
"작은 왕자님이 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 분을 모셔와 왕위를 이어야 하오."
그러자 모두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신하들을 대표한 대신이 산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작은 왕자를 찾아가 왕위를 계승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작은 왕자가 말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오. 나는 이곳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조용하게 살고 있는데, 세상은 흉악하여 서로 죽이고 해치기를 좋아하오. 내가 왕이 되면 역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소.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그러자 대신이 말했다.
"국왕이 서거하시고 그 뒤를 이을 적자가 없나이다. 오직 왕자님만이 선왕의 혈통을 잇고 계실 따름입니다. 지금 이 나라 백성은 주인을 잃고 헤매는 소떼와 같습니다. 원컨대 그들을 가엾게 여기사 왕위를 계승해주십시오."
작은 왕자는 대신이 간곡히 부탁하자 어쩔 수없이 궁궐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작은 왕자는 어려서 입산했기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궁궐에 있는 수많은 궁녀들을 보자 자제할 줄 몰랐다. 급기야 작은 왕자는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심지어 작은 왕자는 이런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제부터 처녀가 시집을 가고자 하면, 먼저 짐의 숙소에서 하룻밤 지내고, 남편 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시집가는 처녀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첫날밤을 작은 왕자와 함께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처녀가 대로변에서 옷을 몽땅 벗고 서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처녀에게 말했다.
"너는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떻게 여자가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자 그 처녀가 대답했다.
"모두가 여자인데 그 앞에서 옷을 벗고 소변을 본 게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입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여기에는 남자들도 많은데..."
"아닙니다. 이 나라에 남자는 왕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여자들은 왕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남자라면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만 있단 말입니까?"
처녀의 말을 듣고 부끄럽다 못 해 얼굴이 빨개진 남자들은 그 말이 백번 옳다고 생각해서 몰래 백성들의 뜻을 모아 왕을 없애고자 했다. 왕이 성밖에 있는 맑고 깨끗한 연못에 자주 목욕하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신하와 백성들은 미리 그곳에 잠복해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왕이 연못에 이르자 뭇 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나타나 왕을 죽이려고 했다. 깜짝 놀란 왕이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그러자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당신은 정사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여색에만 탐닉하여 풍습을 망치고 온 백성들을 욕보였소. 이제 우리들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을 없애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오."
이리하여 바라나왕자는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현우경>
예순다섯번째 이야기 - 사람보다 옷이 먼저
먼 옛날의 일이다. 계빈국에 홀로 열심히 수행하여 경전에 통달한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스님이 커다란 사원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성대한 제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옷이 무척 남루한 모습을 본 사원의 문지기가 문을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스님의 행색을 보고 업신여긴 문지기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그 스님은 사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스님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친구 집에 가서 좋은 옷 한 벌을 빌어 행색을 그럴듯하게 꾸미고서 다시 사원으로 간 것이다. 이번에는 문지기가 스님을 막아서기는커녕 굽신거리며 안으로 안내했다. 사원안에 있던 사람들은 스님에게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권했다. 그런데 스님은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먼저 자신의 옷에 바르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물었다.
"맛있는 음식을 드렸더니, 어찌 옷에 바르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조용히 미소지은 뒤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예전에 이곳을 찾았으나, 문지기가 제 옷이 무척 남루한 걸 보고 문조차 열어주지 않습디다그려. 그래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나서야 이 자리에 앉아 여러 가지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옷 때문에 생긴 복이라, 먼저 옷에게 음식 맛을 보게 하려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