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한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연화였다. 그녀는 그림 같은 눈매에 복숭아 꽃 같은 얼굴을 가진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마음씨가 곱고 슬기로웠으며 예의를 알았다. 그런데 남편인 바라문은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완벽한 미인인 연화보다는 조금은 천박해 보이는 계집종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온종일 계집종과 더불어 희희낙락했으며, 계집종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바라문은 계집종에게 눈이 먼 나머지 연화를 집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바라문은 연화에게 소풍을 가자고 했다. 연화는 남편의 마음이 돌아선 줄 알고 기뻐하며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은 한 동산에 올라 열매가 가득 열려 있는 나무를 보게 되었다. 바라문은 나무 위로 올라가 잘 익은 열매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덜 익은 열매를 연화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연화가 말했다.
"여보, 당신은 잘 익은 열매를 드시면서 왜 저에게는 덜 익은 열매를 주시는 거죠?"
"잘 익은 열매를 먹고 싶으면 직접 나무 위로 올라와보시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올라가겠어요."
바라문은 연화가 나무 위로 올라오자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얼른 나무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가시덩굴을 잔뜩 가져다가 나무 밑에 깔아놓았다. 당황한 연화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여보,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그렇게 하면 제가 나무에서 내려갈 수 없잖아요?"
그러나 바라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시덩굴로 나무 밑을 발디딜 틈도 없이 에워싸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하면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겠지? 이제서야 눈엣가시를 뽑겠구나.'
연화는 나무 위에서 남편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며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때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던 그 나라의 국왕이 우연히 그 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국왕은 나무 위에서 웬 여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발을 멈추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인의 자태는 마치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국왕은 말을 몰아 나무 근처로 다가가 연화에게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슨 일로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 나무 밑에 가시덩굴을 깔아놓았는가?"
연화는 울먹이며 계집종에게 홀린 남편이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국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선녀와 같은데, 그 남편이라는 작자가 도리어 죽이려 들다니? 천하의 보배를 몰라보는 그 자는 정녕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다!'
국왕은 신하들을 시켜 가시덩굴을 치우고 연화를 나무에서 내려주었다. 연화는 자신을 구해준 국왕과 신하들에게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시했다. 국왕은 연화가 미모 뿐만 아니라 예절까지 갖춘 것을 보고 궁궐로 데려가 후궁으로 삼았다. 연화가 그곳에 온 이후 궁궐 내에는 연화의 지혜와 재치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녀는 도박을 무척 잘했다. 그녀와 도박을 해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연화의 미모와 신기한 도박 기술에 관한 소문이 궁 밖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연화의 전 남편이었던 바라문 역시 그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미모가 출중하고 도박 기술이 신기에 가깝다? 그러면 그 후궁은 혹시 전처 연화가 아닐까?' 그 바라문 역시 도박에는 정통했으므로 후궁을 찾아가 한 판 겨뤄보고 소문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집을 나섰다. 궁궐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후궁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바라문을 살펴 본 후 연화에게 가서 그 생김새를 보고하였다. 그녀는 그 얘기를 듣자 그가 곧 자신의 전 남편임을 알 수 있었다. 후궁과 도박을 겨루어보겠다고 기다리던 바라문은 후궁이 나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궁은 역시 짐작한 대로 전처 연화였던 것이다. 바라문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말했다.
"본 지도 한참 되었구려. 당신은 정말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도박 기술도 훨씬 나아졌다고 들었소. 나는 당신이 과거지사를 모두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오."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나무 위에서 있었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당신과의 인연은 이미 다했으니, 나는 나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그리고 더 이상 나눌만한 이야기도 없는 것 같군요."
바라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궁궐을 나왔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