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해 뭘 도왔을까? 자기합리화 중이던 모습도 떠오르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도 도움이라 생각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남을 돕는 일엔 특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도움은 조금의 감동이 포함되어야 참 맛이 아닌가 한다. 도움의 내용 속에 물리적으로 직접 돕는 것보단 간접적일 때 감동(感動)이 더하다고 느낀다. 한편의 글이나 시가, 읽는 이에게 감(感)을 주고 마음을 동(動)하게 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본다. 좋은 글은 혜안을 넓혀주거나,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감동스런 도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으며 어떤 감동을 주며 살았는가. 생각해보면 어쭙잖은 어설픈 사상으로 도움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남을 움직일 만한 선(善)을 갖추고 있는지, 역으로 나는 위에서 말한 감동을 타인으로부터 직접 받아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남에게 감동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말로만 글로만 떠들고 있지 않은가. 성찰할 일이다.
감동은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다. 내가 받든 남이 받든 감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글을 보고 내 인생이 바뀌었소.”, “그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다른 삶을 삽니다.”, “그 시 한편이 내 인생을 뒤집어 놓았소.”라는 말들은 모두 간접 체험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몇 단계를 거친 감동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별 답은 없다. 감동은 그냥 감동 스스로다. 그렇다면 직접 마주보며 주는 감동은 뭘까? 마주한 채 줄 수 있는 감동 말이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내가 지금 당장 만난다고 하자. 대 놓고 나에게 감동을 달라면 나는 당신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의 사상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동은 추적 끝에 얻는 탐미다. 가끔 우연한 기회에 얻는 감동도 있지만 감동을 추구하면서 얻기도 한다. 감동은 은근한 바람이자 희망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을 겪고 감동을 받아 어려움을 벗어났고 그 후로 삶이 변했다.”
이 말은 우연히 받은 감동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살기에 뭔가 바랐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다가 만난 감동이다. 고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면서 얻는 감동인 것이다. 어려움에 어둡고 포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감동이 지나가도 모른다. 감동할 마음 속 공간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직접 받는 물리적인 도움이나 깜짝 감동에 민감하며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연히 받은 감동이든 희망하며 얻은 감동이든 그 감동으로 삶에 변화가 일어 행복감을 만난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감동이 된다. 좋은 감동은 오래 기억하며 삶을 바꿀 정도의 감동은 잊히지 않는다. 정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있다.
“돌아보건대 과매(寡昧)한 내가 어찌 하늘에 미더움을 얻어 감동시킬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어제는 자못 비가 내릴 가망(可望)이 있었는데 오늘은 다시 막연하기만 하다. 따라서 마음속에 계구(戒懼)가 엇갈리는 것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허물은 나 한 사람에게 있으니, 만백성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5일 동안 감선(減膳)하겠다.” - 정조 1년(1777 정유 / 5월 9일 계유 2번째 기사 )
내가 덕이 없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 가뭄이 들어 백성이 힘든 것은 모두 내 탓이니, 이에 근신하여 5일 동안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을 줄이겠다(減膳)는 임금의 뜻이다. 감동은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주인을 살리려고 목숨을 내놓으며 은혜 갚는 여러 동물이야기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늘을 비롯한 천지간의 모든 것은 감동한다고 믿어왔다.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이 희망하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늘이 느껴(感) 비를 내리는 움직임(動)은 백성뿐만 아니라 천하에 모든 생명이 감동할 일 아닌가. 따라서 하나의 감동은 그 감동을 보는 이들 모두에게 나누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감동을 전하는 큰 역할은 예술(藝術)이 하고 있다. 책이든 영화든 사람이 만든 것이며 예술을 접하는 것도 사람이다. 예술은 좋은 감동매개체다.
감동은 인간 행복추구에 원인이 있다. 모든 인간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본능이 있다. 행복해 지고 싶고 만족을 원하며 고통을 멀리하려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일수록 감동을 원한다. 심리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감동을 원한다. 스스로 원해 자기합리화가 되는 감동도 있고 마음이 뭉클해지며 큰 요동 뒤에 삶이 바뀌는 감동도 있다. 모든 감동은 인간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본능에 따른다. 불행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거부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시선을 약간 비틀어, 고난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한 삶을 감동으로 받아들이며 빈곤함과 없음을 행복으로 누린다. 수도자들이 고난이나 소유 없음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모든 수행이 감동을 위한 절차라 믿기 때문이다. 수도하는 모습을 세속의 눈으로 보면 안타까울 수 있지만 수도자의 눈에는 되레 수도생활을 안타깝게 보는 세속의 눈을 안타깝게 본다.
감동으로 목적을 이루든 목적을 이루고 나서 감동스럽든 중요하지 않다. 감동은 삶의 방식을 바꿀 만한 벅찬 기(氣)다. 감동을 받고 나면 작은 습관하나라도 스스로 변하며 순간일지라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적응력에 있어서 강한 생명체인 인간의 약점 중 하나는 겪은 감동이 다시 찾아 올 때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소소한 감동을 우습게 여기거나 별 것 아닌 듯 잊어버리거나 홀대한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이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스치는 감동을 못 알아보는 데에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를 거창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만해야 감동으로 인식하며 작은 감동을 보지 못하는 감동맹인이 되고 만다. 자연이 주는 소소한 감동을 우습게 여기다보니 지구가 하루하루 급속도로 늙어가는 것이다.
늘 보니까 아니면 흔해빠진 것들이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며 살지 않나 성찰해볼 일이다. 되레 가족들에게 투정이나 부리고 화내고 죄 없는 들꽃이나 밟고 다니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내 주변에서 작은 감동들을 찾아내다보면, 그래서 감동 받으며 살게 된다면 그 즐거움에 새롭고 색다른 감동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것이 꿈이고 희망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감동하는 것도 이룬 후에 감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수반된다면 그리고 내 감동이 나눌 수 있는 감동이라면 더욱 큰 감동으로 올 것이다. 감동을 겪고 삶의 변화를 맛 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둘 이상의 이야기다. 나 이외의 그 어떤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감동한다. 글, 사람, 종교, 자연, 물건 등 만나는 감동매개체가 있다. 혼자서 스스로 감동하는 일은 없다. 책을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반드시 감동매개체가 있다. 감동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삶을 감동 속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이 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라면 나 역시 그들을 내게 감동을 주는 존재로 자연스레 인식하고 있어야 맞다. 시나브로 모든 사람들이 감동매개체가 된다면 지상낙원이 아닐까? 서로 나누려하는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나부터 시작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감동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전파 되는 특성이 있다.
이 글을 읽으며 글이 좋든 아니든 당신이 숨 쉬는 것에 감동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음에 감동을 받는 중이다. 가족들, 친구들, 선후배들 얼굴을 찬찬히 떠올려 본다. 나를 낳았고 나를 알며 나와 함께함이 얼마나 감동인가. 공원을 걷다 흔한 개망초나 제비꽃 같은 흔한 들꽃들을 보다가 지구 위에서 저 꽃과 내가 만날 확률을 떠올려 본다. 하물며 인연(人緣)의 확률은 어떻겠나. 감동 아닌가? 이 글을 당신이 읽을 확률에 나는 감동하며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