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홍대에 문학행사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는데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신도림역에 내려 인천행 승강장으로 올라가는 데, 계단 중턱에 어떤 할머니가 신문지 한 장 깔고 더덕을 손질하고 계셨다. ‘한 봉지에 오천 원’이라고 종잇조각에 삐뚤빼뚤한 글자로 써 넣고는 안방마냥 차분히 앉아 손질 중이셨다. 퇴근시간이라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공간 한편에 앉아서 온갖 먼지를 마셔가며 한 봉지라도 팔아보려 더덕봉지를 들고 손 젓는 모습에 어머니가 생각났다.
난 어머니를 웃겨드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숨이 찰 정도까지 웃겨드리는 데는 특별한 대본이나 긴 시간 따윈 필요 없다. 소재도 다양해서 의무감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웃겨드린다. 그런데, 올 추석 때 찾아 뵀다가 쩌렁쩌렁 고함소리에 집안이 들썩거린 적이 있었는데, 너무 화가 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밭에서 깻잎을 따다가 한 짐 짊어지고 경동시장이라는 먼 곳까지 가서 깻잎을 팔아보려 했었는데, 시장관리인이 깻잎보따리를 걷어차더란 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 숨어 다니며 팔았다는 말에 나는 울분이 터졌었다.
“몇 푼이나 번다고 그런 델 다녀요 다니기를. 엄니가 거지여?”
“아 한 푼이라도 나오믄 느그집 가스비라도 대지 않것냐? 뭐 워떠냐. 다른 할마니들도 다 댕기는 디.”
“그래서 또 나가시것다는 말요? 시방?”
“아녀. 힘들어서 이잔 안 갈라고. 버스시간 못 맞추면 집에 돌아오도 못혀. 안혀. 안혀.”
“한 번만 더 가기만 가봐요. 아주 그냥 그때는 나 죽는 꼴 볼 것이여.”
“아 안 간다니께. 젊었으면 모를까 힘들어서 못혀.”
문을 박차고 나오니 추석 보름달이 온 산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도 밝아 냇물이 미리내 흉내를 내며 반짝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 물고 씩씩거리다 눈물이 났다. 모시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홀로사시며 아들 가스요금 대러 경동시장까지 가서 모욕을 당한 어머니 생각에 가슴 속 응어리가 터져 울어댔다. 속으로 ‘못난 놈, 못난 놈...‘하며 나를 원망했던 생각이 난다.
추석연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올 땐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무겁게 반찬과 음식들을 가방 한가득 싸주셨다. 몇 달간 모아온 고기들이라며 말이다. 기차에 올라 싸주신 음식가방을 보면서 싸주시는 족족 들고 오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젠 한 달에 두 번은 올게요.”
“참말이여? 바쁠것인디... 일 있으면 안 와도 되야. 한가할 때만 와. 알것재?”
“걱정 붙들고 계시쇼. 알아서 올텐게.”
“그라고 이잔 데모허는디 가덜 말어. 모조리 잡아 간당께? 뭔 소린지 알재?”
약속대로 내일 어머니께 간다. 말벗도 친구도 돼드리러 말이다. 해 드릴 수 있는 효도라곤 못난 내 얼굴 보여드리는 것뿐 내겐 별 신통한 효도법이 없으니 말이다. 어제 술잔을 비우며 문득 ‘외롭고 힘들게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그대로 두는 건 살인미수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평생을 걸고 갚는다 해도 못 갚는 것이 어머님은혜다. 오늘날 백발의 어머니들은 한(恨)으로 살아 오셨다. 격동의 세월을 품고 나신 산 증인들이시다. 대한민국이 단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폐허 속에서도 칠전팔기로 일어나 애들 학교 보내며 자식 잘되기만 빌며 교육시켰던 어머니들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해 이룬 것처럼 떠들기 전에 어머니를 살핀다면 고개 숙이지 못할 자식이 어디에 있는가.
겨울로 들어가는 문턱을 지나는 요즘, 방은 따뜻한지도 볼 겸 어머니께 간다. 다음번엔 꼭 내복을 사들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짠하기도 하고, 다치거나 아프지 말자는 생각도 든다. 난 요즘 유일한 내 가족, 단 한 사람을 위해 강도 높게 내 마음을 채찍질 하고 있다. 시나브로 꼭 채찍의 효과가 나오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