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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3 17:44

독서편지 - 제9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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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45호











2013.1.23 (음12.12) / 발송인:



nowmaster@nate.com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입으로 말하는 사랑은 외면하기 쉬우나,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랑은 저항하기 어렵다. - W.스탠리 무니햄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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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 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 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추수감사절에 찾아온 손님

 우리 식구가 돈과 먹을 것이 떨어진 어느 추수감사절 날, 누군가 찾아와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문을 열어 보니 한 남자가 음식 바구 니와 커다란 칠면조,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요리할 냄비까지 든 커다란 상자 를 안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그 남자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왔소?"
 그 낮선 사람이 말했다.
 "저는 당신 친구가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만 당신이 어떤 도움도 거절하리라는 걸 알고 저를 대신 보낸 겁니다. 즐거운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안 됩니다. 난 이런 걸 받을 수 없소."
 하지만 그 낮선 사람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전 다만 심부름꾼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총총이 사라져 버렸다.

 그 일은 내 삶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언젠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열아홉 살이 되어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나만의 추수감사절 의식을 시작했다. 그날이 되면 우선 수퍼마켓으로 가서 한 집이나 두 집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음식을 샀다. 그런 다음 배달부 차림을 하고 근처의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상자 안에다 나는 음식과 함께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추수감사절의 일을 설명하는 쪽지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쪽지의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들도 언젠가 형편이 나아 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실천하는 이 추수감사절 의식을 통해 나는 그 동안 내가 벌어들인 어떤 경제적인 금액보다 많은 것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사업 관계로 집을 떠나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온 식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된 것을 무척 마음에 걸려 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아내는 늘 집에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날은 단둘이서 호텔방에 갇힌 신 세가 된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오늘은 죽은 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매다는 것보다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장식을 하는 것이 어때?"
 아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가 매년 추수감사절마다 해 온 일을 고백했다. 아내는 무척 놀라는 표정 이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할렘가로 갑시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또 한 우리가 무얼 나눠 줄 수 있는가 알아봅시다."
 나는 마침 우리와 함께 추수감사절 파티에 참석한 사업 동료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들은 내 제안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떼밀며 말했다.
 "자 어서 갑시다. 할렘가로 가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몇명을 도와 줍시다. 우리는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하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그저 배달 온 사람이 되면 되는 겁니 다. 예닐곱 가구가 한 달 동안 먹을 충분한 음식을 삽시다. 우린 많이 가졌지 안 습니까. 자, 어서 가서 그렇게 합시다!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칠면조나 먹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감사를 주위에 나누는 일이지요. 어서 갑시다."
 나는 그 전에 라디오 인터뷰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업 동료들에게 승합차를 한 대 구해 놓으라고 부탁했다. 내가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자 그들이 말했다.
 "우린 그 일을 할 수 없게 됐소. 뉴욕 어디에도 승합차가 없고. 렌트카 회사 마다 모두 전화를 해 봤는데 승합차가 다 떨어졌다는 거요. 아무리 해도 구할 수가 없었소."
 내가 말했다.
 "우리가 어떤 걸 진정으로 원하면 우린 그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에요. 뉴욕에는 승합차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요. 단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을 뿐이에요. 나가서 한 대 구합시다."
 그들이 주장했다.
 "우리가 사방에 다 확인해 봤소. 승합차를 가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니까요."
 내가 말했다.
 "이리 와서 거리를 내려다봐요. 저길 봐요. 저 승합차들이 안 보입니까?"
그들은 보인다고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그럼 내려가서 한 대 붙잡읍시다!"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가서 지나가는 승합차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뉴욕 운전자들에 대해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가로막으 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속력을 더 냈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등에 막혀 정지해 있는 차들에게 시도했다. 우리가 다가가 서 유리창을 두드리자 운전자들은 유리문을 내리면서 수상쩍은 눈초리로 우릴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다.
 "안녕하시오! 오늘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려고 하는데, 우릴 할렘가까지 좀 태워다 주시겠소?"
 할렘가라는 소릴 듣자마자 운전자들은 재빨리 외면을 하고는 황급히 유리창을 닫고 달아나 버렸다. 그들은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더 솜씨 있게 부탁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운전자들이 유리문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린 부드럽게 말했다.
 "알다시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래서 혜택을 받지 못한 몇몇 가정들 을 도와 주고자 하는데,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뉴욕 시의 한 빈민 지역까지 우리는 태워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약간 효과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릴 태워다 주면 백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것은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하지 만 그래도 할렘가까지 태워다 달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당장 거절하며 차를 몰고 달아 났다. 그렇게 스무 대가 넘는 승합차에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내 사업 동료 들은 이제 계획을 포기할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
 "확률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누군가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 줄 겁니다."
 그때 우리가 바라는 완벽한 승합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와서 멈췄다. 다른 차 들보다 훨씬 커서 우리 모두를 소송할 수 있는 믿음직한 차였다. 우리는 다가가 서 유리문을 두드리고 운전자에게 말했다.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 태워다 주겠소? 그렇게만 해 주면 백 달러를 드리겠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한테 돈을 줄 필요는 없소. 당신들을 태워다 주게 되어 나도 기쁘오. 좋소. 내가 당신들을 이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로 데려다 주리다."
 그는 우리가 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운전석 옆좌석에 벗어 놓았던 모자를 집어들었다. 그가 그것을 머리에 쓰는 순간 나는 그 모자에 '구세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존 론던이었으며, 그는 사우스 브롱스 지역의 구세군 대장이었다. 우리는 다들 흥분해서 함성을 지르며 봉고차에 올라탔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지역으로 데려다 주겠소. 그런데 말 해 보시오. 당신들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소?"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며, 뭔가를 되돌려줌으로써 내 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론던 대장은 할렘가의 비벌리 힐즈라고 할 만한 사우스 브롱스 지역의 빈민가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먼저 수퍼마켓으로 가서 많은 양의 음식과 바구니들을 샀다. 일곱 가구가 30일 동안 먹을 충분한 양의 음식이었다. 우리는 그것들 을 하나씩 포장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배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문한 어떤 건물에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 다. 그들은 이 혹한의 계절에 무단 거주자들처럼 전기도 없고 난방시설도 없이 쥐와 바퀴벌레와 오줌 냄새에 뒤섞인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환 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일에서 오는 기쁨 또한 큰 것이었다. 당신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 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 기적은 이와 같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승합차가 한 대도 없는' 뉴욕과 같은 도시에서도

 앤소니 로빈스

 












문학자료 → 과학



이기적인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제7장 - 가족 계획 (1/2)

        애낳기와 애키우기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혈연 선택의 산물인 다른 이타적 행동과 별도로 취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다. 즉 자식의 보호는 번식의 일환으로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령 생질을 수혜자로 한 이타 행동 등은 번식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 양자간에는 실제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앞서간 사람들은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번식과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나로 묶어서 다른 이타적 행동을 이것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새로운 개체를 낳는 것과 현존 개체를 돌보는 것 사이에 바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 이 두 활동을 각각 애낳기와 애키우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하나의 생존 기계인 개체는 애낳기와 애키우기라는 극히 이질적인 두 종류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단이란 말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전략적인 조처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애키우기의 결단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것이다. "여기에 아기가 하나 있다. 이 아이와 아이와의 근친도는 그저 그렇다. 만일 내가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가 죽어버릴 확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나는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한편 애낳기의 결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 새로운 개체를 하나 낳기에 필요한 여러 단계를 밟을 것인가, 즉 나는 애낳기에 뛰어들 것인가?" 애키우기와 애낳기는 개체가 이용할 수 있는 시간 또는 다른 여러 자원을 둘러싸고 서로 어느 정도 경합하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즉, 개체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 "이 아이를 키울 것인가, 아니면 따로 하나를 낳을 것인가?"

      애낳기-안정된 전략
  종에 관한 생태학적 여러 특성의 세부에 따라 키우기와 낳기 양 전략의 여러 가지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애키우기이다. 만일 모든 개체가 현존하는 애키우기에 몰두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상태로 되어 버리면 이 개체군은 애낳기를 전문으로 돌연변이한 여러 개체에 의해 곧 제거돼 버릴 것이다 애키우기는 혼합 전략의 일부로서만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즉, 적어도 누군가의 애낳기는 필히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에게 가장 낯익은 동물들-포유류와 조류-은 애키우기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다. 여기서는 애낳기 결단에 이어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결단을 볼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애낳기와 애키우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양자를 혼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대로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어린 형제를 키우는 것과 어린 자식을 키우는 것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당신의 근친자이며, 당신과의 근친도는 어느 편이나 동일하다. 만일 당신이 양육 대상으로서 어느 한편의 아이를 선택해야 한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자식이어야만 된다는 이유는 유전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당신이 형제를 아기로서 낳는다는 것은 정의로 보아 불가능하다. 당신이외의 누군가가 그를 낳아 줌으로써  당신은 형제를 양육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앞 장에서 나는 기존의 다른 개체에 대해 개개의 생존 기계가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어떤가를 결정할 경우 이상적으로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개체를  출산할 것인가 아닌가를 정할 경우에  생존 기계가 어떤 식으로 결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개체수 조절과 인구 문제
  제1장에서 '그룹 선택'을 가지고 논쟁을 소개했는데, 그 논쟁은 주로 이 장에서 다룰 문제를 무대로 하여 전개됐다. 원인은 그룹 선택의 견해를 유포시킨 제1의 책임자인 윈-에드워즈에게 있다. 그 견해를 선포함에 있어 그는 '개체수 조절'의 이론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개의 동물이 집단 전체를 위해 의도적이고 이타적으로 스스로의 출생률을 감소시킨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이다. 그것이 인간 개개인의 직무에 아주 잘 합치되기 때문이다. 인류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가지고 있다. 개체군의 크기는 출생수, 사망수, 이출 개체수, 그리고 이입 개체수라는 네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세계 총 인구를 문제로 할 경우 이출과 이입은 있을 수 없다. 남는 것은 출생수와 사망수다. 한 부부당 아이의 평균수가 출산 가능시까지 생존하는 아이의 수로 하여 2인보다 많으면 신생아의 수는 매년 누진적으로 증가해 갈 것이다. 어느 세대를  보아도 인구는 일정한 수로 가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그때에 도달한 인구의 일정 비율로 증가해 간다. 각 시점에서의 인구 자체가 증가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응해 인구 증가수도 증대하는 것이다. 만약 저지되지 않고 증가가 계속되면 개체군은 잠깐 사이에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고 말 것이다.

      인구 조절
  여기서 인구 문제를 우려하는 사람들까지도 때때로 보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이를 몇이나 낳느냐뿐만 아니라 몇 살때에 출산하느냐에 의해서도 인구 증가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인구는 각 세대마다 그때의 전체수에 일정한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므로, 만약 각 세대의 간격을 전보다 길게 하면 매년  증가하는 인구는 완만하게 될 것이다. 즉, '부부당 아이는 2인까지'라는  표어 대신에 '아이를 낳는 것은  30세부터'라고 해도 거의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여하튼 인구의 가속적인 증가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이점을 분명하게 납득시킬 깜짝 놀랄 정도의 계산의 예를 아마도 우리는 모두 보아 왔을 것이다. 예를 들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재 인구는 약 3억이다. 그리고 현재 이미 그 많은 사람들은 부족한 영양 조건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비율로  인구 증가가 계속되면 직립 자세의 인간이 빈틈없이 도열하여 전 대륙에 인간 양탄자를 깔아 버리는 상태에 도달하는 데 50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뼈와 가죽만으로 되어 있다9이것은 결코 황당 무계한 상상이 아니다)라고 가정하여도 이 사태는 변치 않는다. 천년이 지나면 꽉 찬 인가들의 어깨에 각각 100만이 넘는 인간이 겹쳐 쌓이게 된다. 이 커다란 인간더미는 드디어 우주를 향해 광속으로 팽창하게 되어  2,000년 후에는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 저편에 도달해 버릴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것이 가정에 의한 계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위와 같은 식으로 인구 증가가 진해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저지하는 극히 유력한 현실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즉, 기아, 전염병, 또는 만일 운이 좋으면 산아 제한 같은 것이 그 이유의 일부이다. '녹색 혁명'이나 그 밖의 농학상의 진보에 의뢰해도 소용없다. 식량 증산은 인구 문제를 일시적으로 완화시킬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장기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음은 수학적으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의학의 진보가 인구의 위기 촉진에 일익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학의 진보도 인구 증가 속도를 촉진시켜 오히려 인구 문제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 매초 수백만 대의 비율로 로켓을 발사하여 우주로 대량 이민이라도 보내지 않는 한 무제한의 산아수는 필연적으로 사망률의 놀라운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진리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나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 목하고 효과적인 피임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봉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구를 '자연적인' 수단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들이 직면해 난처하게  될 수단이란 바로 하나의 자연적인 수단이다. 그것은 기아라고 하는 수단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먼 장래에 대한 계산에 의해 우리가 불안하게 되는 것은 그 전제로서 인류라는 종 전체의 장래 행복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인구 과인의 파괴적 귀결에 미리 주의를 주기 위한 의식적인 선견 능력을 인가(아니  일부 사람)은 서로 기다리고 있다. 한편 생존 기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되며, 게다가 이 유전자라는 존재는 장래를 선취하거나 종 전체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으로는 아마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이다.  윈-에드워즈가 정통적인 진화학의 이론가들과 구분되는 것은 이 점에서이다. 그는 진정한 이타적 산아  제한이 진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동물의 개체수 조절
  윈-에드워즈의 저작이나 그의 견해를 통속화한 아드리의 책이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논의의 대립없이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천문학적 속도로 증가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때로는 출생률과 사망률이 서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기도 한다. 또 유명한 나그네쥐의 경우와 같이 급격한 대번식과 급격한 개체수의 감소, 그리고 절멸에 가까울 정도의 개체수의 저하가 교대로 일어나 개체군이 대폭적으로 변동하는 식의 예도 많이 있다. 그 결과 가끔 적어도 국지적인 개체군이 완전히 절멸해 버리는 수도 있다. 캐나다 스라소니의 예-이 예에서는 H회사가  판매한 모피수의 경년 변화에서 개체수가 추정됐다-와 같이 개체군이 주기적으로 진동하는 수도 있다. 동물 개체군이 할 수 없는 일은 제한 없이 증식을 계속하는 일이다.

  야생 동물은 노쇠하여 죽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로 노화도 되기 훨씬 이전에 굶거나 병들고 또는 포식자에게 먹혀 버리게 된다. 최근까지는 인간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의 동물은 어린 단계에서 죽고 알의 단계에서 생을 마치는 개체도 많이 있다. 기아와 그 밖의 사망 원인이 궁극적 이유로 작용해 개체군의 무제한 증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에 인간이라는 종에 관해 검토한 것으로도 분명하듯이 사태가 이렇게 되어야 할 필연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기만 하면  기아가 생길 필연성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정확하게  이것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 윈-에드워즈의 저서를 읽고 상상할 정도로 큰 견해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유전자의 이기적 이론의 신봉자들도 즉시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을 취해도 한 둥지의 알 수(clutch-size) 또는 한배의 새끼 수(litter-size)는 어느 정도 일정한 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무제한의 새끼를 낳는 동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출생률이 조절되는가, 바꿔 말하면 자연 선택 과정에 의해 가족 계획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하는 관점을 가지고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물의 산아 제한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는 이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번식을 하고 있는 개체의 이익 때문에 실행되는 이기적인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의견의 차이는 이 중의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있다. 이 두 이론을 차례로 기술하기로 하자.

  동물들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한 출생률 이하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윈-에드워즈의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자연 선택에서 종의 이타주의는 진화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균 이하의 출생률이 자연 선택에서 선택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표현으로서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제1장에서 소개한 바대로 그룹 선택의 이론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는 구성원인 개체가 자기의 출생률에 제한을 가하는 식의 집단은 구성원의 증식이 빠르기 때문에 먹이 공급에 위태로움을 받게 되는 대항 집단에 비하면 절멸의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규제적인 번식자로 구성되는 집단이 자연계에 파급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윈-에드위즈가 생각하는 개체의 자기 규제는 광의로 하면 산아 제한과 같은 것이나, 그가 의미하는 것은 실은 더 특수한 것이다. 그는 동물의 사회 생활 총체를 개체수의 조절 기구로 보려고 하는 하나의 웅대한 착상을 제안하고 있다. 예컨대 제5장에서 이미 언급한 세력권제와 순위제는 많은 동물 종에 있어서 사회 생활의 두  중요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세력권
  많은 동물들은 어떤 범위의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박물학자들은 그 지역을 가리켜 '세력권'이라고 한다. 동물계에서 매우 흔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조류나 포유류, 어류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말미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세력권은 울새의 경우처럼 넓은 임야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역은 새끼를 키우고 있는 새가 먹이를 취하는 주된 장소로 되어 있다. 또 세력권은 검은등갈매기의 경우처럼 적은 면적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세력권 내에 먹이는 없으나 중앙에 집이 있다. 윈-에드워즈는 세력권을 가지고 싸우는 동물들이 한 조각의 먹이와 같은 현실적인 목적물 대신에 특권을 보증하는 표가 되는 대용 목적물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개의 경우 암놈은 세력권이 없는 수놈과는 부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귀던 수놈이 패하고 다른 수놈이 그 세력권을 차지하면 암놈은 얼른 그 승자쪽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성실히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서도 암놈은 수놈과 개체적으로 결합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수놈이 소유하는 세력권과 결혼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체군이 너무 커지면 세력권을 못 가지는 개체가 생겨 그들은 번식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윈-에드워즈에 의하면 세력권의 획득은 번식의 티켓 또는 허가증을 입수하는  것과 같다. 성립될 수 있는 세력권 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소위 번식 허가증 발행수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허가증을 누가  획득하는가를 가지고 개체는 서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개체군 전체가 낳을 수 있는 새끼의 총수는 성립 가능한  세력권 수에 의해 제한되고 만다. 홍뇌조의 경우와 같이 한 번 보아서 확실히 개체가 자기 규제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에도 몇 개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세력권을 획득 못한 개체는 단지 번식을 못 할뿐더러 세력권의 획득을 향해 싸우는 것까지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한 마리도 안 남고 아래와 같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 것과도 같다. 즉, 서로 경합하는 계절이 끝날 때까지 만일 네가 아직 번식을 위한 공인된 티켓을 입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너는 스스로 번식을 중지해야  하며, 또 번식 기간에는 행운의  친구에게 방해를 주지 않도록 하며, 그들이 종의 번식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운 순위제
  원-에드워즈는 순위제에 관해서도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동물의  많은 집단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발견된다. 개체가 서로 개체로서의 특징을 배우고 다시 누구와 싸울 경우에는 이길 수가 있고, 누구에게는 항상 패하는가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육 조건하의 동물 집단에서 특히 잘 볼 수 있는  것인데 야생 상태의 동물 집단에도 그 예가 있다. 제 5장에서 언급한 대로 어쨌든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박물학자는 순위제 또는 '세력순위(pexk order; 닭에서 최초로 기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를 다음과 같이 기재하게 된다. 순위제란 사회에 계 층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 질서 밑에 있는 모든 개체는 자기의 지위를 분별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물론 때로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어떤 개체가 바로 위의 지위에 있던 상급자를 이기고  승진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제5장에서도 언급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하위의 개체가 자동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움이 계속되는 일은 거의 없고, 심한 상처도 별로 입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막연한 그룹 선택론자적인 방법으로 이 사태를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윈-에드워즈는 훨씬 대담한 해석을 이것에 더하고 있다. 순위가 높은 개체는 하위의 개체보다도 번식의 가능성이 크다. 암놈이 상위의 개체를 선택하거나, 또는 하위의 개체가 암놈에게 접근하는 것을 상위의 개체가 힘써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에드워즈는 높은 사회 순위가 번식의 자격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티켓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암놈을 둘러싸고 싸우는 대신에 개체는 사회적인 지위를 걸고 싸워 만일 상위의 사회적인 지위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번식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자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위의 개체는 부단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해 애쓸 것이니까-'간접적'으로는 암놈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다-직접 암놈이 개입된 문제에 관해서는 자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에드워즈에 의하면 순위가 높은 수놈만이 번식할 수 있다는 규칙이 이와 같이 '감수' 되는 결과, 세력권 행동의 경우와 같이 개체수는 별로 증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과잉한 수의 새끼를 낳아 놓고서는 그것이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나서 괴로운 표정을 짓는 대신에 동물의 개체군은 순위와 세력권을 가지고 형식적인 다툼을 이용하여 실제로 기아에 의한 희생자가 나올 수준보다 약간 적게 개체수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나눔 → 고사성어



  鶴立鷄群 (학립계군)
  鶴(학 학) 立(설 립) 鷄(닭 계)  群(무리 군)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편의 이야기다. 서진(西晉) 초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혜강의 아들 혜연조(延祖)는 인물이 준수하고 차림이 의젓하였다. 그가 진나라 혜제(惠帝)인 마충(馬衷)의 시중(侍中)으로 있을 때, 도성(都城)에 변란이 발생하였다. 당시 혜연조는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궁으로 달려갔다. 궁문을 지키던 시위(侍衛)가 그를 향해 활을 쏘려고 하였다. 그때 시위관은 혜연조의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을 보고 활을 거두라고 명령하였다. 혜강의 친구이자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서 사도(司徒)의 직을 지냈던 왕융(王戎)은 사태가 수습된 뒤에 한 부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날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혜연조의 크고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들의 무리속에 서 있는 학처럼 위풍이 있어서,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延祖卓卓如野鶴之在鷄 ).
   鶴立鷄群은 군계일학(群鷄一鶴) 이라고도 하며,  재능이나 풍채가 출중한 인물 을 비유한 말이다. 정신없는 정치판과 경제판을 장악할 인물이 나타난다면, 바로 그는 한 마리의 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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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계일학(群鷄一鶴)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혜강의 아들로 혜소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에게 상주(常住)하였다.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秘書郞)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동의어】계군일학(鷄群一鶴)
  《出典》'晉書(진서)' 혜소전
 












문학자료 → 수필



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2편

 11. 그리스도 교도와의 교제

  다음날 한시에 나는 베이커 씨의 기도회에 나갔다. 거기서 나는 헤리스양, 갭양, 코츠 씨외에 여러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렸고 나도 따라 했다. 그 기도들은 각자가 자기 소원에 의하여 하느님 앞에 갖가지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보통 흔히 하는 것으로는 그날을 화평한 가운데 지나게 해달라,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들을 열어 달라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고는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더해졌다.

주여, 우리 가운데 온 이 새 형제에게 길을 보여 주옵소서. 주여,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그에게도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 예수께서 그도 구원해 주옵소서. 이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이 모임에서는 찬송가나 그외 어떤 음악도 부르지 않았다. 매일의 특별한 무엇을 구하는 간구가 끝난 다음에는 점심시간이었으므로 각각 헤어져 점심을 먹으러 갔다. 기도는 다해서 5분이상 걸리지 않았다. 해리스양과 갭 양은 둘 다 나이든 처녀들이었다. 코츠씨는 퀘이커파였다. 두여자는 같이 살고 있었는데 매주 일요일 오후 네시 다과시간에 그들을 집으로 청했다. 일요일에 모일 때는 나는 코츠씨에게 나의 한주일 동안의 신앙일기를 보여 주었고, 내가 읽은 책과 그들이 내게 준 인상에 대해 그와 토론을 했다. 숙녀들은 자기네가 겪은 귀한 경험들을 이야기하곤 했으며, 자기네가 발견한 평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코츠씨는 솔직한 심정의 강직한 젊은이였다. 우리는 같이 산책을 하기도 했고 그는 나를 다른 그리스도 교인 친구들에게 소개도 해주었다. 우리가 서로 가까워짐에 따라 그는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내게 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선반이 그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말하자면 책으로 내게 짐을 지운 셈이다. 순수한 신앙으로 나는 그 모든 책을 읽기를 승낙했고, 계속 읽어 가면서 우리는 토론을 했다.

  1893년 나는 그런 책을 여럿 읽었다. 그 제목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중에는 시립 교회당의 파커의 주석 , 피어슨의 수많은 참된증거, 버틀러의 비유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의 어떤 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은 내게 좋았고, 또 어떤 것들은 싫었다. 수많은 참된 증거는 저자가 이해하는 대로의 성경의 신앙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었는데, 그 책은 내게는 효과가 없었다. 파커의 주석은 도덕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이었으나,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할 책이었다. 버틀러의 비유는 매우 해박하고 어려운 책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마 네다섯 번은 읽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신론자를 유신론자로 개심시킬 목적으로 쓴 듯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그 책 속에서의 논리의 전개는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신에 대한 불신의 단계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느님의 단 하나의 화신이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토론은 나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코츠 씨는 쉽게 패배를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는 내 목에 툴라시 염주의 바이슈나바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고민했다.

 이 미신은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 이보셔요, 내가 이 목걸이를 끊어 버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가 주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나는 그 신비로운 의미는 모릅니다. 이것을 걸지 않는다 해도 어떤 해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이유없이, 어머니가 사랑과 이것이 내 행복에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내 목에 걸어 준 이 목걸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이것이 낡아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면, 그때 내가 새로 다른 것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코츠 씨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종교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무지의 심연에서 건져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설혹 다른 종교에도 어느 정도의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유일의 진리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나도 도저히 구원될 수 없으며, 예수의 중보 없이는 내 죄는 씻어질 길이 없고, 모든 선행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게 믿게 하려고 했다. 그가 내게 여러가지 책을 소개해 주었듯이, 그는 또한 자기가 확고한 그리스도교인이라 생각하는 여러 친구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중 하나가 기독교의 한 파인 플리머스 동포교회에 속하는 한 가정에 소개한 것이다. 코츠 씨로 인해서 시작된 이 교제들은 대개는 좋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이 가정과 사귀어 오는 동안 그 플리머스 동포교회의 한 사람이 나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논쟁을 가지고 나타났다.

   당신은 우리 종교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한다면, 당신은 일생을 어느 순간도 쉬지 않고 당신이 지은 죄만을 들여다보며, 또 고치고 또 속죄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행동의 되풀이로 어떻게 속죄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절대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도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요. 이제 우리의 완전한 신앙을 보셔요. 고쳐보고 속죄해 보려는 우리의 노력은 쓸데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 죄의 짐을 우리가 어떻게 견딥니까?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 뿐입니다. 그만이 죄없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그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속죄를 믿으므로 우리 죄가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전인류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그이의 속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얼마나 안정되지 못한 생활입니까? 우리 생활은 얼마나 평화의 약속을 가지는 것입니까?

  그 논박은 도저히 나를 확신시킬 수 없었다. 나는 겸손히 대답했다.

   만일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이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이라면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죄의 결과에서 속죄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죄 그 자체에서 속죄되기를, 또는 죄의식에서 속죄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는 안정 못하는 것을 감수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그 플리머스 동포교회 사람은 대답했다.

 나는 장담하지만, 당신의 노력은 헛됩니다.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자기말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알면서 일부러 죄를 범하고는 그 생각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친구들과 만나기 전에 이미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그와 같은 속죄의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츠 씨 자신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순결했고, 그는 자기 정화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두 부인들도 이런 생각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내 손에 들어온 책 중의 더러는 경건한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코츠 씨가 비록 내가 최근에 당한 일로 인하여 많이 걱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다시 확신시키고, 플리머스 동포교회의 왜곡된 신앙이 결코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나의 어려움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성서와 성서의 공인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0장 영웅의 등장

    1. 벨레로폰
  벨레로폰(Bellerophon)은 에퓨라(후의 코린트)의 왕 글라우코스와 에우퓨메데의 아들로, 아명은 히포누스라 하며 공적을 쌓은 후에는 벨레로폰(괴물을 죽인 자)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작가에 의하면 벨레로스라는 친형을 죽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는 친형이 죽은 후 아르고스 왕 프로이토스에게로 도피하였다. 그런데 뛰어나게 잘 생긴 벨레로폰을 본 왕비 스테노보이아가 반해 유혹하였는데, 연정을 멸시당하자 남편한테는 도리어 유혹을 당했다고 벨레로폰을 비난하였다. 프로이토스는 찾아온 손님을 죽인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그를 장인 리시아의 왕인 이오바테스에게 보내면서 따님에게 매우 불명예한 짓을 한 자이니 죽음의 벌을 내려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전하게 하였다. 이 경우 서한의 내용은 서한을 가져가는 당사자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소식인 것이고, 그 후부터 이 같은 서한을 '벨레로폰의 서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오바테스는 사위의 의향에 따라 벨레로폰을 카마이라라는 사자머리에 산양의 몸체, 뱀꼬리를 가지고 불을 뿜고 있는 공포의 괴물을 퇴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원정에서 비명에 죽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의 뜻으로 벨레로폰은 말의 재갈을 받고 코린트의 페이레네 샘터에서 물을 먹고 있는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서 괴물을 퇴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야만족 솔류미를 토벌하라고 하며 속으로 패배해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토벌에서도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마존족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였다. 세 번째 원정에서 돌아올 때는 이오바테스가 보낸 한 무리의 공격을 받는데 도리어 암살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결백한 사람은 항상 신이 돕는다는 것을 확신한 왕은 더 이상 죽음의 책략을 버리고 도리어 서한을 벨레로폰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해명을 듣고 결백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 딸을 주어 결혼시키고 아들이 없던 왕은 사위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작가에 따라서는 벨레로폰이 천마를 타고 천상으로 날아올라 올림포스 산에 오르려 하였는데 신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자 제우스 신이 곤충을 보내 말을 쏘도록 만들었다 한다. 이에 말이 요동을 치자 그 바람에 낙마한 벨레로폰은 땅에 떨어져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그 후 죽는 날(트로이 전쟁 한 세대 전)까지 지상을 홀로 방황하였다. 그 외에도 히포다메이아라는 그의 딸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사르페돈을 낳았다.

 












문학자료 → 수필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2 - 류시화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

  어떤 장소엘 가거나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도 꼭 한번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른바 데자뷔(기시감) 현상이다. 몇 해 전 올드 델리에서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신비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자전거 릭샤를 타고 옛 성곽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릭샤 운전사 샤부가 뜻모를 얘기를 중얼거리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찬드니 쵸크시장을 꾸불꾸불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샤부가 말했다.
  "난 당신을 압니다. 당신은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분명히 당신을 기억해요."
  처음에 나는 샤부가 하는 말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인도인들로 가득한 찬드니 쵸크 시장은 인파의 소음으로 일대 장관이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친 힌두교 상인들과 온갖 크기의 터번을 쓴 시크교인, 흰소가 끄는 마차에 바나나를 가득 싣고 좁은 길을 가로막는 노인, 야반도주라도 하듯 일가족과 함께 서너 개의 트렁크를 이고 떠나가는 남자, 아열대 지방의 새처럼 "짜이 짜이 짜이, 꼬삐 꼬삐 꼬삐!" 하고 외치는 차와 커피 파는 소년들이 한데 뒤섞여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영화 장면이 따로 없었다. 내가 듣든 말든 샤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인도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요. 그리고 전생의 만남들도 기억해요. 당신은 분명히 전생에 여기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곳엘 오게 된 거구요."
  인도 여행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 내가 그런 수작에 말려들 리 없었다. 날 기억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기 삼촌이 운영한다는 기념품 가게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전생의 어떤 인연이 있으니까 인도가 그토록 강하게 날 끌어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거도 없이 전생에 인도에서 살았다고 주장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농담하듯이 샤부에게 말했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인도에 온 수많은 외국 여행자들 모두가 한 번쯤은 전생에 인도에서 살았겠군. 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생의 인연에 이끌려 이리로 오게 되는 것 아니겠어?"
  스물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샤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을 우스개로 듣고 있군요. 그렇지 않아요. 난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가까운 전생에 분명히 이곳 델리에서 살았어요. 잘 생각해보면 당신도 알 겁니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잘 생각해봐서 전생을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내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샤부가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네 외국인들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죠. 전생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거든요. 내 말이 틀렸나요?"
  도로를 가로막은 소떼들 때문에 릭샤가 잠시 멈춰선 틈을 타서 수드라(최하층 계급) 여인이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다가왔다. 그녀는 굽은 손을 내밀며 내게 자비를 구했다. 1루피를 주자 또다른 여인이 뛰어왔다. 전생의 내 누이와 어머니도 여기서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을까?  밀려오는 소떼들 틈을 비집고 샤부는 요령있게 릭샤를 몰면서 말했다.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에서 인간을 '둘라밤'이라고 하죠. 둘라밤은 얻기 힘든 기회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매우 드문 기회니까요. 생물체가 인간으로 환생하려면 8천4백만 번의 윤회를 거듭해야 하죠."
  여든네 번도 아니고 8천4백만 번의 윤회라! 그 말을 들으니 유명한 인도 설화가 생각났다. 한 사람이 신전에 바치기 위해 염소를 끌고 갔다. 제사장이 염소의 목을 치려고 칼을 높이 쳐든 순간 염소는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제사장이 염소에게 웃는 이유를 묻자 염소는 말했다.
  "이제 난 서른 번만 더 죽으면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요."
  과연 인도의 염소다운 대답이 아닌가. 내가 진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선지 샤부는 입을 다물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회교도 통치 시절의 옛 수도 올드 델리의 거리는 이른 아침인데도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덧 바르샤(비의 계절)가 끝나고, 태양이 아름다운 샤라다(가을)가 찾아왔다. 만디(시장) 끄트머리에서 한 청년이 안다(달걀)와 팔(과일)과 사브지(야채) 등을 라따(손수레)에 싣고서 손님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물건을 많이 팔게 해 달라고 손수레 한 켠에 가네쉬(코끼리 머리를 한 신)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아가르바티(향)를 연기 가득히 피워 놓았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모든 힌두어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생생히 그 이름들이 생각났다. 만일 누군가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하면 힌두어 문장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위에서 인도인들이 쓰고 있는 언어가 외국어가 아니라 마치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모국어처럼 들렸다. 더구나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거리 풍경은 이전에 틀림없이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흰 옷에 흰 두건에 흰 콧수염을 한 고집센 관리, 주렁주렁 축제용 금잔화 꽃목걸이를 파는 아주머니, 물통을 손에 들고 철둑길로 똥 누러 가는 아저씨, 우유통을 머리에 이고 가는 가난한 처녀. 분명히 이 장면과 이 냄새와 이 소음 속에 나는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착각이나 데자뷔 현상이 아니었다. 나는 흥분이 되어 그냥 릭샤 위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릭샤에서 뛰어내린 나는 그만 샤부와 헤어지고 말았다. 차비를 건네줄 틈도 없었다. 머리에 자루를 인 한 무리의 인부들이 뒤에서 우르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며 샤부를 소리쳐 불렀지만 인부들에 떠밀려 샤부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부들은 내게서 릭샤 운전사를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현재에서 과거로,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휙 하고 나를 밀쳐냈다. 그렇다! 그때는 이 마을에 보리수와 바냔나무가 많았으며, 감미롭고 매혹적인 향기를 가진 마두말티나무도 있었다. 헤만타와 쉬쉬라(겨울)의 계절이 끝나고 베산타(봄)의 달이 찾아오면 마두말티나무의 가지마다에선 수천수만 송이의 꽃이 일제히 피어났었다. 거대한 나무 전체가 온통 흰 꽃으로 뒤덮이곤 했었다. 건조한 대기 속에 꽃들의 열기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내 어린시절이 흘러갔었다. 아, 난 분명히 이 거리를 지나갔었다. 여기는 분명 내가 존재했던 것이고, 한때 내가 살기도 한 곳이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커다란 회교 사원이 있을 것이다. 사원을 지나 몇 개의 골목을 통과하면 붉은 성곽이 나타나리라. 그곳에서 나는 전생에 도티(인도 남자들이 허리에 둘로 입는 옷)를 입고 성 안쪽의 낭하를 걸어다니곤 했었다. 아직도 거기에 낭하와 기둥들이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던 나디(강)는? 강과 성벽을 오르내리던 반다르(원숭이)들도 아직 그대로일까?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어제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인도인 얼굴을 한 청년, 그는 분명히 나였다. 모습은 지금과 달라도 그가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퀼라 키트네 두르 하이(성은 어디에 있죠)?"
  남자는 내가 예상한 대로 동쪽 방향을 손짓해 보였다. 이젠 누구에게 길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지리에 익숙한 그곳 사람처럼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담과 골목과 늙은 나무들이 내 기억속 풍경 그대로였다. 아직 문명의 뒤켠에 서 있는 그곳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저 뒤켠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우뚝 솟아 있는 붉은 성! 나는 한달음에 성곽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하루 종일 붉은 성 안을 돌아다녔다. 성루에 올라가서는 멀리 야무나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한때 너무나 자주 가보았던 곳이라서, 화랑의 모퉁이를 돌면 어떤 형태의 아치가 나타날 것인지조차 알아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에는 내가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언제나 나를 이해해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치 조금 전에 헤어진 사람을 찾듯이 열에 들떠 성 안을 돌아다녔다. 동쪽 복도를 지나 아랍풍의 무늬가 새겨진 문을 빠져나올 때였다. 한 무리의 인도인 관광객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앞에 가는 한 여성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미라, 이다르 아이예(미라, 이리 와 봐)!"
  그 소리에 한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계시와도 같은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 그렇다. 내가 전생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미라였다.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까지도,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과 웃는 모습까지도!  내 마음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미라!"
  그 이름이 성의 복도에서 메아리치듯 울려퍼졌다. 기둥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만지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현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생 속의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한 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환영 속의 미라와 함께 성의 복도를 달려가 다시 야무나 강이 내려다보이는 망루로 올라갔다. 오렌지색 석양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성벽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미라는 어디로 갔을까? 현생에서 그녀는 어떤 관계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을까? 아니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내 곁에 왔다가 다시 떠나갔을까? 그것으로 이생에선 우리의 만남이 끝이었을까? 나는 미라의 환영에 대고 그것들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미라의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야무나 강은 금방 밤의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강 아래쪽에서 물살 하나만 빠르게 달빛에 흰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날 밤 뉴델리의 숙소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 삶 자체가 그저 하나의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갑자기 목이 메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내 안에서 툭! 하고 풀어져버렸다. 인력거 운전사 샤부는 그 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번 생에서 그와의 인연은 그것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서 또 하나의 비늘을 벗겨준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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