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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5:13

독서편지 - 제9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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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44호











2013.1.21 (음12.10) / 발송인:



nowmaster@nate.com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꿈을 단단히 붙들어라. 꿈을 놓치면 인생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 - 랭스턴 휴즈(美 시인, 1902~1967)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어떠태?


늦은 밤 귀갓길에 탄 택시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1977년에 발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지금도 여전히 노래방에서 인기있는 노래였다. 뒷자리에 몸을 파묻듯 기대어 앉아 그 노래를 듣자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옛 기억, 머리를 맴돌며 좀체 가시지 않는 상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를 잠깐, 어느새 내가 그 노래를 읊조리듯 흥얼대고 있었다. ‘나나나나…’ 가락에 맞춰 부르는 택시 기사의 노랫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이 노래는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곡이다.

이 노래를 부른 그룹 이름은 ‘샌드페블즈’이다. ‘발음이 명확하고 전원적인 느낌이어서 농과대학 그룹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만장일치로 정했다’는 게 제1기 멤버인 가톨릭대 주대명 교수의 증언이다. ‘모래·자갈’(sand pebbles)이라니 그럴 법한 작명이다. 이 노래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프로그램 영상을 찾아보았다. 부연 흑백 화면 중간에 들어간 손으로 쓴 흰색 자막 문구는 ‘나 어떻해/ 창작곡’이었다. 맞는 제목은 ‘나 어떡해’이니 ‘나 어떻해’는 제작진의 착오로 생긴 생방송 때 실수였다.

‘어떻게’[어떠케]와 ‘어떡해’[어떠캐]는 발음이 비슷해 헷갈릴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말이고, ‘어떻해’는 어법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어떻게’는 ‘어떠하다’가 줄어든 ‘어떻다’에 접미사 ‘-게’가 붙은 말로 ‘어떻게 된 거니’처럼 부사적으로 쓰여 다른 말을 수식하지만, ‘어떻게 해’의 준말인 ‘어떡해’는 용언을 수식하지 않고 ‘안 오면 어떡해’처럼 서술어로만 쓸 수 있다. 인터넷 검색(구글)을 해보면 잘못 쓴 ‘나 어떻해’(1480만건)가 제대로 쓴 ‘나 어떡해’(480만건)보다 3배 가까이 많이 나온다. ‘어떻해’의 어줍은 소리를 밝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떻해’의 발음은 (굳이 발음하자면)[어떠태]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간 안해에게 - 변영로

기나긴 二十餘年 하로같이 사라오다
가는곳 가른냥 허황이도 난호이네
생심채 꿈만같아야 어리둥절 합니다.

지난날 돌아보니 뉘우침이 밤넘언데
슬품은 일다가도 춤해질때 있건마는
뒤우침은 고집스레도 처질줄만 압니다.

철몰은 어려부터 나나지내 그랬든지
남다른 그무엇을 감감이도 모룰너니
오날엔 이어인일도 이대도록 슬푼가

연락도 없는 일이 가진추억 자어내어
되붓는 불같이도 와락이는 그슬품야
쇠아닌 마음이여니 아니녹고 어이리

몸구지 가려거든 기억마저 실어가오
애꾸진 몸만은 뿌리치듯 가면서도
무삼일 저진옷같이 기억만은 감기노

몸소리 가운데에 괴괴함이 떠러지어
귀만은 시끄러나 마음홀로 호젔코나
눈감고 있든날음성 들어볼가 합니다.

고요한 불빛나 감은 눈엔 흔들린다
꿈두 아니지만 생시 또는 채는아니
희미한 그길이나마 걸어보면 어떻료.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모두에게는 꿈이 있다

 몇 해 전 나는 남부의 한 도시에서 정부의 생활 보조금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 는 빈민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러차례에 걸친 공개 강좌를 열 기회가 있었다. 난 참석자들 모두에게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능력을 갖고 있으 며, 우리가 할 일은 그 능력을 되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계획이었다. 나는 시 관계자에게 생활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가능하면 다양 한 인종과 다양한 가정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개 강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내가 첫 번째로 던 진 말은 이것이었다.
 "난 먼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인생의 꿈이 뭔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참석자 대부분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들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꿈이라구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여러분들이 어렸을 땐 어떠했습니까? 어렸을 때 장차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한 여성이 말했다.
 "당신이 꿈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쥐들이 우리 애들을 갉 아먹는 판국에 말예요."
 내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매우 끔찍한 일이군요. 부인께선 쥐들과 애들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오시겠군요. 어떻게 하면 그 쥐들을 퇴치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서 쥐들이 들락거리니까 새 방충망을 달면 해결되겠죠."
 내가 모두에게 물었다.
 "그럼 여러분들 중에 방충망을 새로 달 줄 아는 사람이 누구 없습니까?"
  한 남자가 일어나 말했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그런 일들을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몹시 약 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답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보겠어요."
  나는 그 남자에게 내가 약간의 돈을 줄 테니 철물점으로 가서 재료를 사다가 그 부인의 방충망을 갈아 주라고 부탁했다. 내가 재차 물었다.
 "정말로 이 일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물론이오. 한번 해 보겠소."
 그 다음 주에 다시 모였을 때 내가 그 여성에게 물었다.
 "부인 댁의 방충망은 잘 손질됐습니까?"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주 훌륭하게 수리됐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다시 꿈을 갖기 시작해도 되겠군요. 안그런가요?"
  그녀는 내게 미소를 보냈다. 나는 방충망을 수리한 그 남자에게 물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까 기분이 어떠신가요?"
  그가 말했다.
 "네, 아주 좋습니다. 이상하게도 전보다 허리가 더 좋아진 느낌이군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참석자 전원이 하나씩 인생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아주 사고한 성취 같지만, 이 일을 계기로 꿈을 갖는다는 것이 미친 짓 이 아님을 모두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작은 첫걸음 덕분에 사람들은 어떤 일 이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참석자들에게 한 사람씩 일어나 자신들이 가진 꿈을 말하게 했다. 한 여성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꿈이 회사의 비서직을 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이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죠?"
 이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던지곤 하는 질문이다. 그녀가 대답했다.
 "전 애가 여섯 명이에요. 제가 직장을 나가면 그 애들을 돌봐 줄 사람이 아 무도 없어요. 그러니 제가 가진 꿈을 이루기엔 틀린 셈이죠."
  내가 말했다.
 "그럼 그 애들을 돌봐 줄 사람을 한번 찾아봅시다."
  나는 다시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이 부인의 여섯 아이들 을 돌봐 줄 분이 혹시 안 계십니까? 그렇게 하면 이 부인이 교양대학에 다니며 비서직에 관련된 교육을 받을 수가 있을 겁니다."
 한 여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내게도 애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내가 잘 할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곧바로 이 계획은 실천에 옮겨졌고, 그 부인은 비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 었다. 모두가 뭔가를 발견했다. 방충망을 수리해 주었던 그 남자는 실내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아이들을 돌봐 주겠다고 나선 여성은 보모 자격증까지 갖춘 간병인이 되었다. 석달 만에 나는 세미나 참가자 전부를 생활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난 이런 일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 다. 지금까지 수없이 해왔다.

 - 버지니아 스테어

 












문학자료 → 과학



이기적인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제6장 - 유전자의 친족 관계 (2/2)

      손실과 이득의 예측
  여기서 주관적인 예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 잠깐 유전자 용어로 돌아가자. 살아 있는 몸은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생존하고 있는 유전자는 과거에 '평균하여' 그 종의 환경을 특징지우는 경향이 있던 조건으로  생존해 왔다. 따라서 손득의 '예측'은 인간이 결단을 할 때와 같이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에는 유전자의 경험,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유전자의 생존 조건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다(유전자는 생존 기계에게 학습 능력을 주고 있으므로 손득의 평가가 있는 것은 동시에 개체의 경험에 기초하여 행해진다고도 함). 조건이 터무니없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평가는 틀림없고 생존 기계는 평균적으로 빠른 결단을 내릴 것이다. 조건이 극변하면 생존 기계는 틀린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져서 그 유전자는 벌금을 내게 될 것이다. 낡은 정보에 따른 인간의 결단이 틀리기 쉬운 것과 같다. 근친도의 평가에도 역시 오류와 불확실함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매우 단순화된 계산에서는 마치 생존 기계가 누가 자기의 친족이고 어느 정도 가까운 혈연인가를 알고 있는 양 말해 왔다. 균치로 추정하는 데 불과하다. 가령 A와 B가 양친이 같은 형제인가 배다른 형제인가를 모를 때를 생각해 보자. 그들간의 근친도는 1/4이거나 1/2인데 양친이 같은 형제인지 양친 중 아버지가 다른 형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유효하게 쓰이는 수치는 평균하여 3/8이다. 그들의 모친이 같다는 것은 확실하나 부친이 같다는 확률이 1/10이라면 그들이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것은 90% 확실하고 같은 양친을 가진 형제라는 것은 10% 확실하다. 이때 유효한 근친도는 (1/10)*(1/2)+(9/10)*(1/4)=0.275이다. 그러나 '그것'이 90% 확실하다고 말할 때 무엇에게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랜 야외 연구를 한 박물학자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물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다행히 이들 내용은 둘 다  거의 같다. 이것을 알려면 실제로 동물이 누가 자기의 근친인가를 어떻게 판단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누가 친족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듣고, 이름이 있으며,  결혼이라는 형식, 사실의 기록과 뛰어난 기억력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 인류학자는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사회의 '친족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유전적 혈연이 아닌 친족 관계라는 주관적 문화 개념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관습이나 종족의 의식은 친족 관계를 크게 강조하는 데 필요하다. 조상 숭배가 퍼지고 가족의 의무와 충성이 생활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피로 갚는 복수나 씨족간의 싸움은 해밀턴의 유전학 이론에 따라 용이하게 설명된다. 근친 상간의 금기는 인간의 위대한 친족 의식을 증명하고 있다. 근친 상간 금기의 유전적 이익은 이타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근친 상간에 의해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의 유해한 효과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몇 가지 이유에서 많은 인류학자는 이 설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야생 동물은 누가 친척인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어떤 행동 규칙에 그들이 따랐기에 그들은 마치 혈연 관계를 알고 있는 양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친척에게는 친절히 하다."라는 규칙은  실제로 친척이 어떤 방법으로 인지되는가라는 문제를 회피라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에 의해 활동을 위한 단순한 규칙을 부여받았다. 그 규칙은 행동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지는 않으나 적어도 평균적인 조건들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필요한 규칙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규칙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별로 그러한 느낌이 없어도, 자기와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규칙 그 자체에 순종할 정도로 규칙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일부 정통파 유대 교도와 회교도는 비록 굶을망정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킨다. 동물이 따르는 단순하고 실제적인 규칙은 어떤 규칙일까?  그것은 정상 조건하에서는 그들의 친척에  이익을 준다는 간접적 효과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동물이 육체적으로 자기와 닮은 개체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간접적으로 자기의 친족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일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해당 종이 나타내는 여러 특성이 크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규칙은 통계적 의미로 '빠른' 결단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조건이 변하면, 예를 들어 한 종이 훨씬 큰 집단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단으로 이끌지 모른다. 자칫하면, 인종 차별이란 육체적으로 자기를 닮은 개체를 인지하고 외견상 다른 개체를 싫어하는 성질이 혈연 선책에 의해 진화하여 그것이 비이성적으로 일반화된 결과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숭이와 고래의 이타적 행위
  구성원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종이나 구성원이 작은 그룹을 이루고 돌아다니는  종에서는 자기가 종종 만나는 개체가 누구이든 자기와 친척일 공산이 크다. 이 경우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규칙은 유전자의 소유자를 이 규칙에 따르려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늘어난다는 의미로 '플러스 생존가(survival value)'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원숭이 무리와 고래 무리에서 이타적 행동이 자주 보고되는 이유일 것이다. 고래와 돌고래는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기고래가 상처를 입어 수면까지 뜨지 못하면 동료 무리들이 도와서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래에게 누가 자기의 친척인가를 아는 수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무리가 종종 만나는 구성원이 친척일 공산이 매우 높으므로 이타주의가 손실을 맛보게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돌고래에 의해 구출됐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적어도 그 하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이것은 무리가 빠지고 있는 구성원의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면 가까이에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고 있는 기다란 물체"가 그것이다.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 같은 포식자로부터 무리 중 나머지 구성원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고 한다. 보통 성숙한 수놈은 무리 중 다른 구성원 속에 연결되어 있는 한 다수의 유전자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신체야, 네가 성숙한 수놈이라면 표범으로부터 무리를 지켜라."라고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그 수를 늘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잘 인용되는 예를 마치기 전에 적어도 한 권위 있는 학자가 보고한 전혀 다른 사실을 이야기하는 셈이 공평할 것 같다. 그녀에 의하면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이 출현하면 맨 먼저 지평선 저쪽으로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다.

      병아리의 이타적 행위
  병아리는 가족 무리 속에서 모이를 쪼으며 모두 어미의 뒤를 따라 다닌다. 병아리에게는 주로 두 종류의 울음소리가 있다. 전술한 크고도 예리한 삐약삐약 소리와 먹는 중에 내는 짧은 노래와 같은 지저귐이 있다. 어미의 도움을 청하는 효과적인 삐약삐약 소리는 다른 병아리에게 무시된다. 그러나 지저귀는 소리는 병아리에겐 매력적이다. 즉, 한 마리의 병아리가 먹이를 찾으면 내는 지저귀는 소리가 다른 병아리를 먹이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 이전의 가설적 예로 말하면 이 지저귐은 '먹이가 있다'라고 하는 소리이다. 이 경우와 같이 병아리의 겉보기의 이타주의는 혈연 선택에 의해 용이하게 설명된다. 자연계에서 병아리들은 같은 양친의 형제 자매이므로 지저귀는 병아리의 손실이 다른 병아리의 순이익의 1/2보다 적으면 먹는 동안의 지저귐에 관한 유전자는 분포를 넓힐 것이다. 이익은 그룹 전체에 분포된다. 그룹은 보통 둘 이상으로 구성되므로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은 상상하기 쉽다. 물론 가끔 암탉이 자기 것이 아닌 알을 -칠면조나 오리알을- 품고 있을 경우, 이 규칙은 부당하다. 그러나 암탉과 병아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계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조건 아래서 형성되는 것이고, 자연계에서는 보통 자기의 집 속에 낯선 것이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자연계에서 때때로 일어난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종에서는 고아가 된 새끼가 다른 어미, 대개는 자기 자식을 잃은 어미의 양자가 되는 수가 있다. 원숭이 관찰자는 때때로 양자를 가진 어미에게 '숙모'라는 말을 쓴다. 대개의 경우 그 어미가 실제로 숙모라는 증거는 없고 어떤 친척이라는 증거마저 없다. 원숭이 관찰자가 유전자의 논리에 주의했따면 '숙모'와 같은 중요한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양자를 키우는 행동은 수고스럽게 보일지도 모르나 짜여진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관대한 어미는 고아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인해 자기의 유전자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의 친족, 특히 장래의  자기 아이들의 양육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모성 본능이 잘 선택 되도록 하는 규칙 개정을 만들어 왔던 자연 선택에서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류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양자 결연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대개 고아는 죽는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
  단순한 오류가 아닌,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을 부정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극단적 오류의 예가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다른 어미로부터 새끼를 훔쳐서 그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중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양모는 자기의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암놈이 새끼를 키우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또한 보다 빨리 다음 새끼를 낳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조사할 가치가 있는 중대한 예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일어나는가. 양모와 양자 사이의 평균 근친도는 어느 정도인가. 자식을 잃은 진짜 어미의 태도는 어떠한가. 새끼를 양자로 뺏기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진짜 어미의 이익이다. 어미들은 일부러 미숙한 젊은 암놈들을 속여서 자기 새끼를 양육시키려고 할 것인가?(양모와 새끼 도둑이 중요한 양육 기술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류의 이기성
  고의로 기도된 모성 본능의 오용의 예는 다른 새의 집에다 산란하는 뻐꾸기 같은 '탁란조'에서 볼 수 있다. 뻐꾸기는 어미 새에게 인식된 "자기  둥지 속에 있는 새끼 모두에게 친절하다."라는 규칙을 악용하고 있다. 뻐꾸기를 제외하면, 이 규칙은  본래 이타주의가 근친에 한한다는 바람직한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자기의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기 새끼라고 할만큼 둥지와 둥지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검은등 갈매기의 어미는 자기의 알을 구별하지 못해 다른 갈매기의 알을 기꺼이 품으며, 인간이 실험용 나무 모형과 바꿔치기 하면 그 모형의 알을 품는다. 자연계의 갈매기에게 있어 알의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이 몇 미터 떨어진 옆집까지 굴러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매기는 자기 새끼를 인지한다. 알과는 달리 새끼는 걸어다니고, 결국은 옆집 가까이 까지 가서 제 1장에서 말했듯이 종종 생명이 걸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편 바다오리는 자기 알을 표면의 반점 모양으로 구별하고, 알을 품고 있는 도중에는 그것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룬다. 이것은 아마 그 새들이 평탄한  바위 위에 집을 짓기 때문에 알이 굴러서 섞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왜 일부러 자기 알만 구별하여 품을 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확실히 모든 어미가 덮어놓고 어떤 알이든 품는다면 각각의 어미새가 자기 알을 품거나 다른 알을 품건 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룹 선택주의자의 논거이다. 지금 탁아 서클과 같은  집단이 조성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바다오리의 한 배의 알은 평균 한  개다. 이것은 공동 탁아 서클이 잘  되려면 모든 어미가 평균 한 개의 알을 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누가 게으름을 피워 알품기를 포기했다고 하자. 그 암놈은 부화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산란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점은 더 이타적인 다른  어미새가 그 암놈을 위해 알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집 옆에 흩어진 알을 발견하면  끌어당겨서 그것을 품어라."라는 규칙에 충실히 복종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이 시스템을  잘 피하기 위한 유전자가 개체군 속에 퍼져 아주 우호적인 탁아 서클은 붕괴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직한 새가 유유낙낙함을 거부하고 보복하여 알을 단 한 개만 품는다고 결단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게으르고 못된 새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자기의 알이 누구에게도 품어지지 않고 바위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므로 그들은 곧 협력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이 경우 새끼를 돌보는 새들이 개개의 알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령 정직한 새가 이 작전을 실행하여 게으름뱅이에게 대항했다고 해도 결국 소외된 알이 자기의 알인지 게으름뱅이의 알인지 몰라서 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으른 새는 그래도 이익을 받고 있다. 그들이 많은 알을 낳고 따라서 더 많은 새끼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바다오리가 게으른 개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알을 잘 보살피는 것이다. 즉, 이타적인 것을 멈추고 자기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메이나드-스미스의 말을 빌면 이타적인 양자  키우기 '전략'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이 전략은 정당한 할당보다 많은 알을 낳고 그것을 품는 것을 거부한다는 경쟁자의 이기적인 전략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불안정하다. 이 후자의 전략도 역시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이용하는 이타적 전략이 불안정하여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다오리에게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일한 전략은 자기의 알을 인지하고 전적으로 자기의 알만을 품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뻐꾸기 알을 대신 품는 명금류는 자기 알의 외관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에 특유한 모양이 있는 알을 본능적으로 잘 보살피는 것으로 맞서 왔다. 그들은 자기 종의 알을 품을 염려는 없으므로 이 방법은 유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뻐꾸기가 자기의 알의 색, 크기, 그리고 모양을 대리모의 알에 더욱더 비슷하게 만들어 이에 응했다. 이것은 거짓의 예이고, 종종 성공한다. 이 진화적 군비 경쟁의 결과, 뻐꾸기의 알에는 완벽한 의태가 생겼다. 뻐꾸기의 알과 새끼는 어떤 비율로 '발견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발견되지 않은 알과 새끼가 살아서 차세대의 뻐꾸기의 알을 낳는다. 이 때문에 보다 효과적으로 속이는 형질의 유전자가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퍼진다. 이와 같이 뻐꾸기 알의 의태에 어떤 근소한 불완전성이 있어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눈을 가진 다른 종의 새는 동종의 유전자 풀에 크게  공헌하는 개체이다. 그렇게 하여 의심 많고 예리한 눈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  선택이 어떻게 해서 식별 능력을 키울 수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예이다. 이 경우 식별 능력은 다른 종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 다른  종의 구성원이 식별하는 능력과 방법을 감추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자의 생식 습성
  그러면 동물 자신에 의한 다른 그룹  구성원과의 근친 정도의 '추정'과 야외 연구  전문의 박물학자에 의한 같은 식의  추정을 비교해 보자. 버트람(Brian  Bertram)은 세런게티 국립 공원에서 수년간 사자의 생태를 연구해 왔다. 그는 사자의 생식 습성을 기초 지식으로 하여 전형적인 사자 집단의 개체간의 평균적 근친도를 추정하고 있다.  그가 추정하는 데 사용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형적인 집단은 암놈 일곱 마리와 수놈 두 마리로 되고,  암놈은 보다 영구적인 구성원이고 수놈은 이동성이 있다. 암놈의 반수는 동시에 출산하여 동시에 양육하므로 서로간에 새끼를 분별하기 곤란하다. 전형적인 한 배의 새끼 수는 세 마리이다. 사자 무리의 성숙한 수놈 사이에서 한 새끼의 아비일 가능성은 같다. 젊은 암놈은 그 무리에 있는 늙은 암놈이 죽거나 하면 그 후계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젊은 수놈은 청년기에 쫓겨난다. 이들은 성장하면 두 마리 내지 서너 마리의 혈연 집단을 이루어서 무리에서 무리로 이동하는데 태어난 가족 무리로 되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이런 저런 여러 가정을 이용하면 두 개체간의 평균 근친도를 알 수 있다. 버트람은 무작위로 뽑은 수놈 두 마리에  대해서는 0.22, 암놈 두 마리에 대해서는 0.15라는 수치를 산출했다. 즉, 무리 속에서  수놈끼리는 평균하여 한쪽 부모를 가진 형제보다는 좀 유연 관계가 멀고 암놈끼리는 사촌보다 조금 유연 관계가 가깝다. 물론 어떤 두 개체는 양친을 같이 하는 형제이기는 하나 버트람은 이 것을 알 방법이  없었고 사자도 그것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버트람이 추정한 평균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자 자신으로서도 이용이 가능하다. 이들 수치가 실제로 평균적인 사자  무리에 전형적인 것이라면 다른 수놈에 대해 마치 한쪽  어버이의 형제처럼 수놈을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는 플러스 생존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놈의 이타적 경향을 과하게 하는 유전자, 가령 다른 수놈을 완전히 형제로 대하도록 행동 할  것을 지시하는 유전자는 다른 수놈에게  친밀감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다. 예컨대 육촌을 대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밖에 생가하지 않는 유전자와 같이 평균하여 벌을 받을 것이다. 사자의 생활이 실제로 버트람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리고(중요한 것인데) 그들이 몇 세대에  걸쳐 그러했다면 자연 선택은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평균적 근친도에 맞는 정도의 이타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것이 동물에 의한 근친도의 평가와 훌륭한 박물학자에 의한 평가가 대체로 같다고 말한 의미이다.

  이러한 이치로 이타주의 진화에 있어서는 '진짜' 근친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동물이 어느 정도 근친도를 예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실은 아마도 자연계에서 어미에 의한 보살핌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비하여 왜 그렇게도 빈번하고 게다가 헌신적일까, 또 동물이 왜 자기  자신을 몇 명의 형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는가라는 의문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요점은 근친도에 더하여 '확실도 지수'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자 관계는 유전적으로 형제 자매 관계 이상으로 가깝지는 않으나 확실도는 훨씬 높다. 보통은 누가 자기의 형제인가라기보다는 누가 자기의 새끼인가라는 편이 훨씬 확실하다. 그리고 누가 자기 자신인가라는 것에는 더욱더 확신이 가는 것이다.

  앞에서 바다오리의 게으른 개체에 관해 고찰했지만, 다음 장에서는 사기꾼, 게으른 놈, 그리고 착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다른 개체가 혈연  선택된 이타주의를 악용하여 자기 목적을 수행하고자 부단히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세계에 있어 생존 기계는 자기가 누구를 신용할 수 있나, 누구에게 진짜 확신을 가질 수 있나를 고려해야 한다. 만일 B가 정말 나의 어린 동생이라면 나는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절반만큼 그를  위해 돌보아 줄 것이고, 내 자식을 돌봐 주는 만큼 그를 돌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를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나의 동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C와 내가 일란성 쌍생아라면 나는 내 자식보다 2배로 그를 돌봐 줄 것이며 확실히 나는 내 생명과 똑같이 그의 생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그의 용모는 그럴듯하게 나를 닮았으나 단지 얼굴의 특징에 관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를 위해 내 생명을 내던질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유전자를 100% 갖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나 또한 그의 유전자를 100%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어느 것이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이다. 이론상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적어도 일란성 쌍생아의 한쪽 자식이나 형제 둘 또는 손자 넷 등을 이타적으로 구하기 위한 유전자에게 배제될 수 있는데,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개체의  정체성의 확실성이라는 점에서 훨씬 유리하다. 경쟁자의 혈연 이타주의의 유전자는 전혀 우연히  또는 게으른 개체나 기생자에게 꼬임을 당하여 정체성을 착각하는 위험을 범한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유전자 혈연 관계를 고려하여 예언했을 때보다 개체의 이기주의가 많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친자 관계
  많은 종에서 어미는 아비보다 자기 자식을 확신할 수 있다.  어미는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알이나 새끼를 낳는다. 어미에게는 자기의 유전자의 지참자를 확실히 알 좋은 기회가 있다. 불쌍한 아비는 속기 쉽다.  그래서 아비는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있으나 그에 관해서는 암수간의 다툼의 장(제9장)에서 기술하기로 하자. 이와 같이 외조모는 친조모에 비해 자기 손자에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친조모보다 강한 이타주의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조모가 딸의 아이에게는 확신이 가나 아들은 처에게 배신당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조부는 친조모와 동등하게 손자에게 확신이 간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확실한 1세대와 불확실한 1세대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외삼촌은 친삼촌에 비해 생질의 행복에 더욱 관심이 있어 일반적으로 숙모와 동등하게 이타적일 것이다. 실제로 남편의 외도가 매우 흔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부친'보다 이타적임에 틀림없다. 외삼촌 편이 그 아이와의 근친도에 대한 확신에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아이의 모친이 적어도 자기의 아버지가 다른 자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법률상의 부친'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이들의 예언을 지지할 증거가 있는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가 증거를 찾기 시작할 것을 기대하여 여기에 기술해 보았다. 특히 사회 인류학자는 이 흥미 있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이타주의가 형제간의 이타주의보다 더 흔하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돌리면 '동일성의 문제'에 의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 자식 관계의 기본적인 비대칭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부모 자식의 유전적 관계는 대칭적이고 근친도의 확신은 어떤 입장에서 상대를 본 경우에도 똑같은데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자식의 시중을 잘 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쪽이 나이도 많고 매사에 더 능숙해서 자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기가 부모에게 먹이를 주려고 해도 아기는 실제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친자 관계에는 형제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아이들은 항상 부모보다 젊다. 이 사실이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개의 경우 자식의 평균 여명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평균 여명은 동물이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단할' 때에 가급적 정확히 '계산'에 넣어야만 할 중요한 변수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평균 여명이 큰 종에서는 자식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타주의자 자신보다 노쇠사에 가까운 개체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 자기 희생을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그 계산식의 평균 여명의  항에 관한 한 그것에 상응하는 분량만큼 유리할 것이다.

  흔히 혈연 선택은 학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으나 그 실제 예는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비판은 혈연 선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아이를 보호하거나 부모에 의한 시중의 모든 예, 그리고 젖샘이나 캥거루의  주머니 등 그 육체적 기관이 사실상 혈연 선택 원리가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예이다. 비판자들은 물론 부모의 시중이 널리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부모의 시중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뒤지지 않는 혈연 선택의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예를 들어 보라 할 때는 부모의 시중 이외의 예를 제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제시했다.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의 예를 들라고 하면 그것은  된다. 아주 적지만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혈연 선택이 친자 관계 '이외'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전술한 바와 같이 윌슨이 좋아하는)을 강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잘못이 커진 이유는 대체로 역사적인 것이다. 부모의 시중이 진화상 유리한 것은 너무도 명백하고 해밀턴의 지적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다윈 이래 이해되어 왔다.  친자 이외의 관계가 유전적으로 그것과 등가이며, 또 그것이 진화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시함에 있어 해밀턴이 친자 이외의 관계를 강조해야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앞으로의 장에서 말하는 대로  자매 관계가 특히 중요한 개미나 꿀벌 등 사회성 곤충의 예를 들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점을 오해하여 해밀턴의 이론이 사회성 곤충 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도 있을 정도이다. 부모의 돌봄이 혈연 선택의 작용의 작용의 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이들은 부모의 이타주의만을 예언하고 다른 친족간의 이타주의를 예언하지 않는 자연 선택의 일반론을  정식화해 보일 책임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나눔 → 고사성어



  予取先與(여취선여)
  予(나 여) 取(취할 취) 先(먼저 선) 與(줄 여)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의 이야기. 진(晋)나라에 지백(知伯)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귀족인 위환자(魏桓子)에게 영토를 강요하였다. 위환자는 후에 위나라의 선조(先祖)가 된 사람인데, 그도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였으므로, 지백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이에 임장(任章)이라는 사람이 위환자에게 지백의 요구대로 땅을 떼어 주도록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백에게 땅을 떼어준다면, 지백은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자만하여 적을 얕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도 이러한 피해를 입게 될까봐 단결하여 공동으로 지백을 상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백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주서(周書)에서는  상대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그를 키워주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게 미리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故予之)라고 했습니다.

  위환자는 임장의 말대로 하였다. 지백은 과연 교만과 횡포, 그리고 탐욕 때문에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불렀다. 予取先與란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함 을 뜻하며, 사회생활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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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2편

10. 프리토리아의 첫날

  나는 다다 압둘라의 법률 고문 대리로 누군가 프리토리아 역으로 마중을 나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인도인이 나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특히 인도인 집에 유숙하지는 않겠다고 미리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법률 고문은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도착한 것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부탁할 수가 없어 못 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어떤 호텔도 받아 주지 않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1893년의 프리토리아 역은 1914년의 역과는 아주 달랐다. 불빛은 어두컴컴하고, 여행객도 퍽 적었다. 나는 모든 승객들을 다 내보내고 차표 받는 역원이 좀 한가해진 다음 표를 내주며 그에게 혹시 내가 묵을 만한 조그마한 호텔이나 그밖에라도 그런 곳을 하나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려고 하였다. 그렇게 안되면 그 밤을 역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말이지, 그 말을 하려니 몸이 움츠려져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또 수모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승객은 가버리고 역이 텅 비었다. 나는 차표를 집찰 역원에게 준 다음 말을 꺼냈다. 그는 내게 공손히 대답을 해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이 뵈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미국 흑인 한사람이 옆에 섰다가 그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여기 도무지 친구도 하나 없어 낯선 분이시로군요. 만일 나를 따라오신다면 내가 조그만 호텔에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이 경영하는 곳인데 나는 그 사람을 잘 압니다. 아마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 말이 좀 믿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는 고맙다고 한 다음 그의 제의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는 나를 존스턴의 가족 호텔로 데리고 갔다. 그가 존스턴 씨를 옆으로 불러 말을 하니까 존스턴 씨는 나를 받아 그날밤을 재워 주겠다고 승낙했는데 다만 조건이 붙었다. 식사를 내 방안에서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로 인종차별은 안합니다." 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유럽 풍속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만일 당신을 식당에서 식사하도록 한다면 손님들이 아마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심하면 나가게까지 할지 모릅니다."
 "오늘밤은 재워 주기만 해도 고맙습니다. 나도 이제는 이곳 형편에 좀 익숙해져서 당신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주시는 것은 조금도 관계치 않습니다. 내일이면 어떻게 길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내 방으로 안내되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저녁밥을 기다리며 나는 명상에 잠겼다. 손님은 많지 않았고, 오래지 않아 사환이 식사를 가지고 오려니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존스턴 씨가 나타났다. "여기서 저녁을 드시라 하고 보니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손님들에게 당신 말씀을 드리고 당신도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다들 반대하지 않는다고들 하셨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얼마 동안을 계셔도 관계 없으시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원하신다면 어서 식당으로 오시고 며칠이라도 계시기 바랍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가서 마음껏 식사를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법률 고문 베이커 씨를 찾아갔다. 압둘라 셰드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해준 것이 있기 때문에 그가 극진히 대해 주는 대접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나를 아주 따뜻히 대해 주었고 친절한 질문들을 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 변호사로서 하실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유능한 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건은 아주 오래되고 복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실 일은 오직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정을 당신께 물을 터이니까 당신께서는 내 의뢰인과 자유로이 통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확실히 유익합니다. 나는 아직 계실 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일단 만나고 나서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무서울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 같으신 분을 위해 유숙하실 곳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가난한 부인이 한 분 있는데 그녀는 어떤 빵 굽는 사람의 부인입니다. 그 부인이 아마 받아줄 것이고 또 그러면 자기의 수입에도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럼 그리로 갑시다."
  그는 나를 데리고 그 부인 집으로 갔다. 그는 부인과 내 일에 관해 조용히 이야기를 한 다음, 그 부인은 나를 식사까지 해서 한주에 35실링을 받기로 하고 나를 받아 주었다.  베이커씨는 변호사인 동시에 또 열렬한 평신도 전도사였다. 그는 지금도 생존해 있으면서 이제는 변호사업은 그만두고 순전히 선교 사업만 하고 있다. 그는 상당히 부유하게 생활하고 있고 지금도 나와 서로 통신을 하고 있다. 그의 편지는 늘 한가지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믿고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요 인류의 구세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영원한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번 회견을 하는 동안 베이커 씨는 나의 종교관을 벌써 타진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힌두교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힌두교리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다른 종교는 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내가 어디 있으며, 내 신앙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나는 내 종교를 자세히 연구하고 싶고, 가능한 한 다른 종교도 연구하고 싶습니다."
  베이커 씨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기뻐하며,
 "나는 남아프리카 선교 총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입니다. 나는 자비로 교회를 세웠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합니다. 나는 인종차별은 안합니다. 나는 몇 사람의 동조자를 갖고 있으면서 매일 오후 한시에 모여 몇 분동안 평화와 광명을 위해 같이 기도합니다. 거기에 오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 나는 내 동조자들에게 당신을 소개할 터인데, 그러면 그들도 좋아할 것이고, 감히 말씀합니다마는 당신도 그들과 같이 계시는 것을 좋아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종교서적을 몇 권 드릴 터이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책 중의 책은 성서이지요. 그것을 특별히 권합니다."
  나는 베이커 씨에게 감사를 드리고, 될 수 있으면 한시 기도 모임에도 꼭꼭 나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럼 내일 한시에 여기에서 만나서 기도회에 같이 가기로 합시다."
 베이커씨는 다시 그렇게 말한 다음 서로 헤어졌다. 이때까지 나는 별로 반성해 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존스턴 씨에게로 가서 숙박료를 지불하고, 새 하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주인 여자는 착한 부인이었다. 그는 나를 위해 채식 요리를 만들었다. 나는 오래지 않아 그 가족들과 아주 친숙해졌다. 그 다음 나는 다다 압둘라가 편지를 써 보냈던 그 친구를 찾아보러 갔다. 그에게서 나는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서 더 배우는 것이 있었다. 그는 나더러 자기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이미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필요한 것은 뭐든지 서슴지 말고 말해 달라고 말했다.

  캄캄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내 방으로 가 드러누워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당장에 해야 될 일은 별로 없다. 나는 압둘라 셰드에게 그 말을 해 보냈다. 나는 생각했다. 베이커 씨가 내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나는 그의 종교적 동조자들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그리스도교 연구를 해 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힌두교에 대한 문헌을 구할 수 있을까? 내 종교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대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한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앞에 닥쳐오는 모든 것에 대해 냉철하게 연구하여야 하고, 베이커 씨의 친구들과는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대해야 한다. 내가 내 종교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의 종교를 파악하려 해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9장 도래종교

     3. 미트라

  미트라(Mithras)는 페르시아의 아베스타 경전에 연유된 신으로 그리스에서는 빛의 신, 로마에서는 광명과 진실의 신, 죽음의 구세주, 최고의 행복을 내리는 주, 승리와 역전의 용사라는 존칭으로 예찬되어 널리 숭배되었다. 미트라교는 원래 아후라마즈다를 최고신으로 모셨는데, 기원전 7~6세기에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오르마즈다(아후라마즈다)를 선과 빛의 지고신, 아흐리만은 악마의 신으로 대칭시키고 인류역사는 선과 악 두 원리에 대립과 항쟁의 역사라고 가르쳤다. 그 내용을 담은 경전을 젠드 아베스타라 한다. 3세기 사산 왕조는 이를 페르시아의 국교로 삼았다. 이슬람교 이전에는 페르시아의 지배적 종교였으며 마즈다미즘이라고도 한다. 로마에서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4세기 동안 월등한 교세를 자랑하며 크게 성행하였고, 미트라를 황제의 보호신으로 모셨다.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페르시아 모자를 쓴 젊은 신으로 표현되고, 쓰러뜨린 황소 위에 무릎을 대고 한 손으로는 뿔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단도로 목을 찌르는 상으로 묘사되었다. 이 숭배는 서기 2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원으로 막강해져 로마 병사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미트라 숭배에서는 독신 남자만이 사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여자는 신전 출입도 금지당하였다. 대신 여성은 데메테르, 이시스, 헤라 또는 디오뉴소스 신전에 모여 의식과 축제를 참여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미트라 비교를 모방하였다. 이 유사성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예의 득의 논법으로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악마가 진실된 신앙을 선취해서 흉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교는 여러 점에서 매우 흡사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도 미트라 사제는 자신과 같은 신을 숭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복할 수 없는 태양 미트라'의 탄생일로 정한 12월 25일은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교도에 의하여 그리스도 탄생일로 계승되었다. 일설에 미트라는 태양신과 그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와 흡사하다. 다른 설에서는 미트라의 어미는 인간 처녀라 하고, 또 다른 설에서는 미트라에게는 모친이 없고 '천계에 있는 아비'의 남근 벼락으로 수정된 여성바위 페트라 게네트릭스(탄생바위)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탄생을 양치기와 예물을 가져온 현왕이 목격하였으며 미트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보이게 하고, 다리 못 쓰는 자를 걷게 하며 또한 악마를 쫓는 등 성왕 전설에 나오는 여러 기적을 행하였다. 미트라의 승리, 승천 및 부활에의 축하는 태양이 가장 높은 지점에 오르는 춘분날 행해졌다. 승천하기 전에 미트라는 황도 12궁을 상징하는 12제자와 '최후의 만찬'을 가졌는데, 숭배자들은 이 전통적 의식에 모여 십자가를 색인한 빵을 성찬으로 들었다. 그 의식은 미트라의 7비적 중 하나로, 그리스도교의 7비적의 모델이 되었다. 미트라의 조각상을 어미의 자궁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혈묘에 묻으면 미트라가 묘에서 나와 재생한다고 믿었다.

  창조신화에는 여성적 원리를 제외시키기 위하여 태초에 독자적으로 창조된 수소를 원초의 낙원에 놓고 이 수소가 여성을 모방해서 남성의 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생물은 수소의 피에서 생겨났는데, 거세되어 희생공양된 수소의 피가 달까지 흘러서 마적인 결실을 가져왔다. 달은 여성의 매달 출현하는 마적 '생명의 피'의 근원이며 이 피로 인해서 지상에는 어린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트라의 종말론에 의하면 물에서 시작된 것은 불로 끝나는데 최후의 날에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격전으로 지상은 대변동이 일어나 파괴 소각된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지고신과 인간 사이에 조정자로 미트라 사제를 개재시켜, 사제의 교시에 따르는 덕망 있는 사람들은 빛의 정령에게 구원되나, 다른 교리에 따르는 죄 많은 자는 악의 신인 아흐리만 및 타락한 천사와 같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제개념도 페르시아의 이 종말론에서 연유한다. 미트라교의 엄한 규율과 활기찬 전투정신은 병사들에게 합당한 것으로 인정되어 로마 군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미트라는 콤모두스(161~192), 율리아누스(331~363) 황제 통치하에서 로마군의 최고 수호신이 되었다. 그리고 미트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폭적으로 유입되었다. 바티칸의 미트라 동혈신전은 376년에 그리스도 교도에 의하여 점거되고 미트라교 최고사제의 직명인 파테르 파토룸은 교황의 명칭인 파파(Papa) 혹은 포프(Pope)로 계승되었다.

 












문학자료 → 수필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2 - 류시화



   우리 집에 갑시다.

  망고 열매는 노랗게 익어 뚝뚝 떨어지는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길바닥에 떨어진 망고 열매를 아무리 걷어차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스승은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에게 가슴이 살아 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지 않은가. 그런 스승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망고나무 주인이 쫓아와 남의 망고 농사를 다 망쳐놓는다고 아우성칠 때까지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해 망고 열매를 걷어차고 또 걷어찼다. 물어주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큰소리 치자 맨발의 여주인은 돈은 고사하고, 저러다가 저 머리 긴 남자가 망고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버리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소 진정이 된 나는 그래도 남에게 손해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길가에서 얼음차 파는 여자와 속닥거리고 있는 그 망고나무 여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대여섯 개를 걷어찼으니 10루피(3백원) 정도 주면 되겠지 했는데 여주인은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돈을 꺼내 손바닥에 쥐어줘도 기어코 내 바지 주머니에 도로 찔러 넣었다. 이유를 묻자 그 여주인은 말했다.

  "당신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오. 그래서 내 망고를 걷어찬 것인데 어찌 돈을 받겠소. 그냥 가시오."

  봐라!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는 여자도 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명상을 배우러 인도까지 온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또다시 화가 치밀어 망고나무 밑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여주인이 놀라서 황급히 나를 붙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망고밭을 다 망쳐놓을 뻔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장현숙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날 찾아왔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나한테서 명상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명상을 가르칠 입장도 못 되고 세상에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으니 그들을 찾아가라고 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당시 내가 스승으로 따르고 있던 인도의 오쇼 라즈니쉬 명상센터로 보냈다. 그러면서 차츰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전직 교사였으며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딸은 남편이 데려가고 홀로 된 그녀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가게를 냈는데 그것도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수중에 돈도 없고 마음에 상처만 남은 그녀는 내 권유에 따라 전재산을 털어 인도로 떠났다. 나는 그녀가 명상센터에서 생활하며 머지않아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을 기원했다. 그런데 보름 뒤에 내가 뒤따라 인도엘 와보니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명상센터에 온 장현숙은 이틀 뒤에 곧바로 미쳐버린 것이었다. 정신이 나가 거리를 마구 쏘다니고 아무한테나 눈을 흘기며 욕을 해댄다고 했다. 명상센터에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들이 명상하는 도중에 신발을 신고 명상 홀을 마구 뛰어다니며 소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 명상센터의 관계자들은 그녀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내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임시로 얻은 아파트 골방에 틀어박혀 안으로 문을 잠그고 열흘째 단식중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무더운 아열대 기후에 물도 먹지 않고 그런 식으로 있다가는 탈수증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당시 그 명상센터에는 한국에서 온 구도자들이 열 명 정도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 친구들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먼 여행을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장현숙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을 불러모았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말하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지금 우리보다 더 진화된 길을 걷고 있는지 누가 압니까? 그녀는 깨달음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 그대로 놔둡시다."

  또다른 친구도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또한 우리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는데 다른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요."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남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가 없어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죠. 그리고 그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도 없구요."

  나는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깨달음이 아니라 물과 음식이며 인간적인 보살핌이라고 설득했지만 다들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인 중에 가장 나이 많고 스스로 열렬한 오쇼 라즈니쉬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은 보름 동안의 침묵 명상에 참가중이라며 아예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상을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런 식으로 외면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오후 명상 시간이 됐다면서 곧 자리를 떴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정이 떨어져서 명상센터 밖으로 나왔다. 이런 삭막한 곳에 있느니 차라리 북인도를 여행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고 열매들은 노랗게 익어 바닥에 떨어지는데,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망고나무 밑을 떠난 나는 릭샤를 타고 장현숙이 머물고 있는 화장터 옆의 아파트로 갔다. 그녀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옆방에 사는 프랑스 여자는 그녀가 화장실 가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방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문틈으로 이따금씩 이상한 괴성이 새어나왔다. 결국 그날 나는 내 힘으로는 그녀를 밖으로 불러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에 엉뚱한 일이 벌어져 그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아파트로 올라오면서 릭샤 운전사에게 밑에서 기다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내려오지 않자 운전사는 차비를 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다. 마침내 나를 발견한 인도인 운전사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나보다 더 애절하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어서 나오시오. 우리 다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갑시다. 슬프다고 해서 자신을 괴롭히면 안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운전사는 마치 자신의 여동생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간절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당신은 지금 마음이 아픈 것뿐입니다. 곧 나을 거예요. 어서 문을 열고 우리 집으로 가서 뭘 좀 먹읍시다."

  영어가 짧은 운전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이제는 아예 힌두어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전혀 반응이 없던 장현숙은 알아 들을 수도 없는 힌두어로 누가 마구 떠들어대자 궁금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한 인도인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이지만 진심으로 설득한 결과 그녀는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명상센터의 한국인들을 소집해 장현숙을 데리고 근처의 인도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잠시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음식값까지 자신이 냈다. 그리고 나한테 고맙다며 1백 루피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장현숙은 어려서부터의 꿈이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부르는 이태리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은 감동적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그녀의 모습이 잠시나마 우리를 기쁘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는 한국의 부모에게로 돌아갔다. 이 모두가 닫혔던 문을 열게 해준 어느 평범한 인도인 릭샤 운전사 덕분이었다. 그는 가슴이 살아 있는 진정한 구도자였다.

  수리야 다스가 편집한 티벳 이야기 "눈사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연못가의 납작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하기를 좋아한 한 티벳 노승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명상을 시작할라치면 작은 벌레들이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삐걱거리는 늙은 몸을 일으켜 그 작은 생명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 나서 다시 명상을 시작하곤 했다. 노승과 함께 그 승원에서 수행을 하는 다른 승려들은 마침내 노승이 연못에서 벌레들을 건져내느라 명상 시간 대부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든 작든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런 일에 방해받지 않고 다른 곳에서 수행을 한다면 더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은 노승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한 승려가 그에게 말했다.

  "다른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명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더 빨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실 테고, 그때가 되면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더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어떤 승려는 이렇게 제안했다.

  "연못가에서 수행을 하시더라도 아예 눈을 감고 앉아 계시면 어떨까요? 명상할 때마다 수십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 어떻게 완전한 평정과 정신집중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형제 승려들의 말을 경청한 노승은 마침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 말처럼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고 수행하면 많은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 입문할 때 어려운 중생을 돕고 구제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거늘, 이제 나이 먹어 아무 쓸모 없게 된 이 늙은이 눈앞에서 힘없는 생명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른 척하란 말인가? 눈을 감고 마음을 닫은 채, 중생을 도우라는 관세음보살의 가르침만 외우고 있으란 말인가?"

  노승의 간단하고 분명한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승려들 중 누구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 여기에 적힌 장현숙은 본명이 아니며, 그녀가 겪은 마음의 혼란은 정말로 깨달음의 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녀를 도운 한국인 구도자들도 여럿 있었음을 여기에 밝힌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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