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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63호

2022.5.9. (음 4.9)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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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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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불로소득은 외상, 언젠가는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 ― F.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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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호언장담

호기롭고 자신 있게 하는 말을 호언장담이라고 한다. 매사에 호언장담을 잘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볼 때 부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직자들이 그런 말을 쏟아내면 오히려 불안감이 들 때가 더 많다. 특히 정보를 독점한 사람들의 호언장담은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심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장 유명한 호언장담은 6·25 전쟁 직전에 당시 우리의 군 수뇌부 인사의 발언이었다. “(남과 북이 전쟁을 벌이게 되면)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엄청난 ‘뻥’을 터뜨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터진 전쟁에서는 도대체 어떤 판이 벌어졌는가? 전선의 붕괴는 이렇게 무능한 지휘부의 망상과 허위의식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의 핵무장이나 미사일 실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충돌의 가능성이나 우리 측 무장의 열세가 아니라 안보 관계자들의 지나친 호언장담일 때가 더 많다. 몇 해 전부터 북에서 도발적인 일을 벌일 때마다 무슨 ‘참수’ 작전이니 지하 벙커를 박살낼 수 있는 무기니 하는 호언장담을 얼마나 자주 했는가?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나서 진짜로 괌섬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받으니 이제 와서야 그게 가능하겠냐는 둥, 그럴 리가 없다는 둥 하며 은근히 꽁무니를 빼고 있다.

자고로 믿음직한 장수는 입을 그리 가볍게 놀리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말을 아끼며 적이 외통수에 걸려들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다. 가볍게 입을 놀리는 짓은 사실 잔뜩 겁먹은 졸장부들의 불안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 진용을 갖춘 안보 관계자들은 부디 호들갑스럽지 않게 안보 체계를 다듬어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안보에 대한 보도 역시 좀 더 진중했으면 좋겠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인종 구분

‘인종’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종류를 구분해 보려고 만든 단어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어휘’이다. 사람을 제대로 분류해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숱한 혐오감과 고정관념을 만들어내어 많은 갈등과 분쟁의 씨앗만 뿌렸다. 그 판단 기준도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어떤 한국 여성이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다. 어머니 쪽 친척들은 그 아기의 눈이 푸른색인 것을 보고는 꼭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반면에 아빠 쪽 친척들은 아기의 광대뼈가 살짝 올라온 것을 보고는 엄마를 고대로 닮았다고들 했다. 서로 다른 부분을 결정적인 요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겨울올림픽도 열린다고 하니 미리부터 걱정되는 바가 있다. 아마 훌륭한 기량을 보여서 메달을 딴 선수가 유럽계 여성일 경우에는 틀림없이 ‘푸른 눈의 미녀 선수’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다. 종종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유럽계 수녀들한테도 ‘푸른 눈의 천사’라는 표현이 나타나곤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푸른 눈’이 ‘미인’이나 ‘천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번 겨울올림픽에는 유난히도 한국 대표팀에 귀화 선수들이 많다. 따라서 언론 보도나 중계방송에서 예민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황당한 표현이 나올 가능성이 퍽 많다. 또 일부는 해외로 이주했던 이들의 자녀가 다시 고국에 귀화해서 출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너무 뜨거운 국수주의적 표현이 난무하는 곳이 경기장인데 무슨 말실수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피부색과 눈의 빛깔은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데 아무런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의 편견과 무지만 드러낼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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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더러운 향로(香爐) - 김수영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우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아까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보는
이 더러운 길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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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남상(濫觴) / 사물의 처음. 시작.   《出典》筍子 孔子家語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 : 長江)은 사천(泗川)땅 깊숙히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 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모든 일은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子路)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고 한다.

《筍子》'孔子家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子路가 옷을 잘 차려입고 孔子님을 뵈었다. 그러자 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由야,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岷山)으로부터 흘러나왔다.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써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오직 下流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의복을 이미 盛하게 차려 입고 얼굴빛이 충만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


           子路盛服見孔子 孔子曰 由 是??何也 昔者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
            乃其至江津 不放舟不避風 則不可涉也 非唯下流水多邪 令女衣服旣盛 顔色充盈
            天下且孰肯諫女矣.                 

           【유사어】효시(嚆矢), 권여(權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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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분장실 청소를 잘해야 명배우 된다 - 김지숙

  원래 소심한 성격 탓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별다른 취업 준비도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던 내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학교 때부터 외톨이인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신 유일한 분, 교양 학부의 이반 선생님이셨다. 나의 근황을 들으신 선생님은 "지숙이는 세상을 좀 다르게 살아 볼 필요가 있어. 연극 한 번 해보지 않을래"하시며 (현대극단)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누구나 사회 초년 생활이 힘들지만 나의 극단 생활은 여러 모로 더욱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분장실 청소는 정말로 힘들었다. 내가 연극을 배우러 왔는지 청소부로 고용되었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허탈해 하는 내게 이반 선생님은 날카롭고도 넉넉한 위로를 곁들여 주셨다.

  "한술 밥에 배부르겠니. 붙장실 청소를 잘해야 좋은 배우가 된다."

  4년 전 극단 (전설)을 창단하고 대표직을 맡게 된 나는 요즘 단원들과 함께 연극인이 몸으로 느껴야 하는 현실적 난제 속에서도 무대에 올릴 작품 준비로 밤낮이 없다. '분장실 청소를 잘해야 좋은 배우가 된다'는 이반 선생님의 한마디는 20년 전, 출발선에 서 있던 내게 많이 움츠리는 개구리가 멀리 뛸 수 있음을 일깨워 준 일침이었다. 인생은 결국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이다.

(연극인)


    소금 같은 사람 - 임웅균

  음식 문화, 특히나 우리의 식습관에서 소금을 빼고 요리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심심한 설렁탕, 심그운 김치 등 군침은커녕 생침도 돌지 않을 것이다. 소금이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먹는 즐거움 중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듯이 나의 음악 인생을 뒤돌아보면 순간순간 고마웠던 분들도 많고 힘들었던 기억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초등학교 졸업식 날 육성회장님이 하신 한 마디였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음식에서처럼 인생의 맛을 조절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하며 어린 마음에 뭔가를 심어 주려던 그분의 눈빛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옆 친구와 장난을 치며 그때는 솔직히 그냥 흘려 보냈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인생의 참맛을 알기 시작할 즈음, 홀연 30년 전의 그 말씀이 새로이 내 삶의 화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뚝섬에서 풍년라면을 경영하던 최덕남 사장은 배고픈 이들과 목 배운 이들에게 그가 가진 소금을 적절히 나누어 준 분이셨다. 성수고등공민학교를 통해 수많은 청년들이 내일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나는 요리사가 아니라 성악가이기에 노래로 삶의 소금이 되려한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 나의 노래가 밝은 햇살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은 나의 제자들에게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준다.

  "여러분들은 삶을 감칠맛 나게 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악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인생은 미리톤이다  - 오세훈

  나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영감을 준 극적인 한 마디나 거창한 좌우명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기쁠 때나 슬플 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 한두 마디 있다. 아마도 중학교 때 고사성어 사전에서 본 것이 첫 대면인 듯하다. 청계천의 헌 책방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고사성어집)을 손에 넣었다. 당시 내 용돈에 비추어 상당히 출혈을 했음직한 그 책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는데, 여러 가지 좋은 말들이 사춘기 소년에게는 적지 않은 재미를 주었다. 살면서 이런 저런 곡절을 겪다 보니 어느새 그 책의 한 구절을 주문처럼 되뇌게 되었다. 참으로 나를 기쁘게 했던 일이 얼마 후 참담한 실패의 계기가 되는가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의 체험이 결국 따지고 보면 도움이 되었을 때 그 장엄한 인생의 파노라마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한 마디로 '새옹지마'였다. 언제부터인가 넘어졌을 때는 이 말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고, 몹시 기쁠 때는 이 말을 떠올리며 차분히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환희와 좌절의 순간에 되뇌는 말이 또 하나 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평범한 말이다. 인생은 100미터 경주가 아니기에 더욱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단칼에 승부가 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이 말은 또, 게을러지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나 스스로를 다잡는 데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  마라톤 같은 인생! 새옹지마 같은 인생! 순간마다 일희일비할 필요 있을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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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이글저글

   


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마마! 이 나라는 망했사옵니다

  조선조 중엽에 오윤겸이라고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선조 15년(1582년)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다 겪고, 왕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에까지 오른 분으로, 인조 14년(163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조선에선 드물게 78세까지 장수한 분이다. 그분이 인조반정을 겪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을때의 일화다. 이조는 문관직의 인사발령을 맡은 관청인데 그 책임자를 자칫 잘못 뽑아 앉히다 보면, 어떤 지저분한 짓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대에 가장 강직하고 덕망있는 사람이라야 그 자리에 앉고 또 그래야 해낼 수 있는 중대한 자리였다. 더구나 주인공이 이조판서가 된 것은, 광해군 때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여 나랏일이 썩을대로 썩어 개탄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 신흥세력이 일어나 구 왕권을 둘러엎은 이른바 인조반정의 직후라, 청신한 공기를  불어넣어야겠다는 의욕이 팽배하였던 때라 그에 대한 기대도 자못 컸다. 이리하여 제1차로  인사를 맡은 병조의 도묵과  함께 상감의 어전에서 합석해 고수하는 정사를 치르니, 이것을 친임도정이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있은 일이다. 그해 과거에 합격해서, 처음으로 직장을 배정할 인원을 열거한 가운데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위에서 물으시었다.

  “응? 오가 성 가진 이가 있네, 경하고는 어떻게 되오?
  “신의 집 조상 제사 받드는 사람이옵니다.”
  “그래?”

  그러고는 상감께서 그 사람 이름에다 낙점을 찍으셨다. 몇 사람 후보자 가운데 가장 적합하니 이 사람으로 발령내리는 마지막 결정이다. 전국에 배치되는 문무관의 고수를 마치자, 우에서는 그동안 이것 꾸미느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어찬을 내리셨다.

  “수고들 했으니 저녁들 자시고 나가도록 하오.”

  물론 군신 관계가 엄한 터니, 같은 방 안에서가 아니라, 아마도 상감은 온돌에 계시고, 이조와 병조 양  판서는 대청에서 각각 상을 받았겠는데, 다담상이니 반주로 술도 몇 잔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오 판서는 술이 약했든지 아니면 너무나 감격해 그랬든지,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쾌해지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으흐흐흐, 마마! 이 나라는 망했사옵니다.

  신은 도목을 꾸미는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망에 오른 사람 중에 특정인물을 신의 종손이라고 지적하였삽고, 우에서는 또 신의 낯을 보아 그 사람으로 낙점을 내리셨으니, 이렇게 상하가 모두 사정에 얽매어 내린대서야, 이 나라 꼴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어허허엉...”

  그냥 통곡으로 이어졌으니 이런 변이 있나? 그래도 젊으신 상감은 그의 무례를 꾸짖지 않고 좋은 낯으로 대하셨더라고 기록에는 나와 있다. 사사로운 연줄로 사람 잘못 써서 일을 그릇친 예는, 오 판서와  같은 때 같은 동지인 김류보다 더한 이가 없다.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피난처로 잡은 강화도의  방위책임을 뉘게 맡기면 되겠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자기 아들 경징을 친거하였고, 젊은 녀석이 웬 술은 그리 먹었든지, 강화 함락의 실책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 생전에 형받아  죽었으니 집안 꼴은 무엇이고, 온 나라안이  치러야 했던 고난은 또 어떠했던가?

  사사로운 연줄로 사람을 잘못 써서 일을 그르친 예는 역사에 수없이 나오지만 반면 흥선대원군의 이런 일화도 있다. 아들을 임금으로 들여앉혀 국정의 실권을 거머쥐자, 이경하에게 훈련대장과 좌우 포도대장을 겸해서 내어맡겼는데, 이경하는 발령을  받는 자리에서 잘라 말했다.

  “소인이 그 자리를 맡은 이상, 대감의 청탁이라도 받지 않겠소이다.”

  그랬더니 대원군은 그 가스름한 눈에서 빛을 뿜으며 호통을 쳤다.

  “이 사람 좀 보게? 그러라고 자네에게 맡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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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3장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예순네번째 이야기 - 바라나왕자

  아주 먼 옛날 바라나를 국호로 하는 큰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국왕의 이름은 바라마달이었다. 그에게는 왕자가 두 명 있었는데, 모두 신체가 건장하고 얼굴 또한 무척 잘생겨서 국왕은 그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런데 왕자들 중 작은 왕자는 항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마땅히 형이 왕위를 계승하리라. 세상에 태어나 왕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도를 닦는 것이 더 나으리라.'  이에 작은 왕자는 부왕에게 가서 말했다.

  "저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신선의 도를 구하려 하오니, 원컨대 허락해 주십시오."

  바라마달왕은 처음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다가 작은 왕자의 뜻을 절대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승낙했다. 몇 년 후, 국왕이 서거하자 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형은 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몹쓸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형에게는 왕위를 이어받을 자식도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그때 한 나이 든 대신이 말했다.

  "작은 왕자님이 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 분을 모셔와 왕위를 이어야 하오."

  그러자 모두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신하들을 대표한 대신이 산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작은 왕자를 찾아가 왕위를 계승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작은 왕자가 말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오. 나는 이곳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조용하게  살고 있는데, 세상은 흉악하여 서로 죽이고 해치기를 좋아하오. 내가 왕이 되면 역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소.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그러자 대신이 말했다.

  "국왕이 서거하시고 그 뒤를 이을 적자가 없나이다. 오직 왕자님만이 선왕의 혈통을 잇고 계실 따름입니다. 지금 이 나라 백성은 주인을 잃고 헤매는 소떼와 같습니다. 원컨대  그들을 가엾게 여기사 왕위를 계승해주십시오."

  작은 왕자는 대신이 간곡히 부탁하자 어쩔 수없이 궁궐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작은 왕자는 어려서 입산했기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궁궐에 있는 수많은 궁녀들을 보자 자제할 줄 몰랐다. 급기야 작은 왕자는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심지어 작은 왕자는 이런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제부터 처녀가 시집을 가고자 하면, 먼저 짐의 숙소에서 하룻밤  지내고, 남편 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시집가는 처녀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첫날밤을 작은 왕자와 함께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처녀가 대로변에서 옷을 몽땅 벗고 서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처녀에게 말했다.

  "너는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떻게 여자가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자 그 처녀가 대답했다.

  "모두가 여자인데 그 앞에서 옷을 벗고 소변을 본 게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입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여기에는 남자들도 많은데..."
  "아닙니다. 이 나라에 남자는 왕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여자들은 왕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남자라면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만 있단 말입니까?"

  처녀의 말을 듣고 부끄럽다 못 해 얼굴이 빨개진 남자들은 그 말이 백번  옳다고 생각해서 몰래 백성들의 뜻을 모아 왕을 없애고자 했다. 왕이 성밖에 있는 맑고 깨끗한 연못에 자주 목욕하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신하와 백성들은 미리 그곳에 잠복해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왕이 연못에 이르자 뭇 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나타나 왕을 죽이려고 했다. 깜짝 놀란 왕이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그러자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당신은 정사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여색에만 탐닉하여 풍습을 망치고 온 백성들을 욕보였소. 이제 우리들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을 없애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오."

  이리하여 바라나왕자는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현우경>


    예순다섯번째 이야기 - 사람보다 옷이 먼저

  먼 옛날의 일이다. 계빈국에 홀로 열심히 수행하여 경전에 통달한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스님이 커다란 사원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성대한 제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옷이 무척 남루한 모습을 본 사원의  문지기가 문을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스님의 행색을 보고 업신여긴 문지기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그 스님은 사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스님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친구 집에 가서 좋은 옷 한 벌을 빌어 행색을 그럴듯하게 꾸미고서 다시 사원으로 간 것이다. 이번에는 문지기가 스님을 막아서기는커녕 굽신거리며 안으로 안내했다. 사원안에 있던 사람들은 스님에게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권했다. 그런데 스님은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먼저 자신의 옷에 바르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물었다.

  "맛있는 음식을 드렸더니, 어찌 옷에 바르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조용히 미소지은 뒤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예전에 이곳을 찾았으나, 문지기가 제 옷이 무척 남루한 걸 보고 문조차 열어주지  않습디다그려. 그래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나서야 이 자리에 앉아 여러 가지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옷 때문에 생긴 복이라, 먼저 옷에게 음식 맛을 보게 하려는 것이오."

  <대지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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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내소설

   


혼불2 - 최명희


   15. 가슴애피(1/7)

  "올다래가 피었는가."

하면서 오류골댁이 면화밭으로 나간다. 그네의 삼베 적삼 잔등이가 후줄근히 들러붙는 것이, 보는 사람도 덥게 한다. 하늘은 아직도 쨍쨍하여 도무지 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강실이는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훑어 낸다. 그래도 금시 또 땀이 배어난다. 동여 묶은 가슴의 말기는 아예 젖어 있다. 그런데도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네의 정신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인가. 소쿠리에 수북히 담겨 잇는 애호박과 가지를 한 덩이씩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납작납작하게 썰던 그네는, 감시 칼손을 놓고 허리를 젖힌다. 젖힌 그네의 허리 쪽으로 뒤안에서 건듯 부는 실바람 한 가닥이 스치듯 지나간다. 채반 위에 널어 놓은 호박이 벌써 땡볕에 익어 허옇게 빛을 뒤집고 있다. 그 옆의  채반에서도 가지 썰어 말리는 것이 오그라든다. 아무래도 습기 없는 뙤약볕이라 저런 고지나물이 손쉽게 마르는 것 같다. 강실이의 입술도 볕을  받아 말라 있다. 오늘, 날 새고는 아직 한번도 입을 떼지 않은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절이 좋았더라면 청풍에 취포할 낙이라도 있겄다마는."

아까 참에 오류골양반 기응은 낫을 들고 집터의 울밑에우북한 잡초를 베어내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의 얼굴도 이 여름 들어 많이 축나 있었다. 거멓게 죽은 낯빛에다가 초로의 흰 머리털까지 얼핏  비치는 모습은 그의 나이를 몇 살은 더 들어 보이게 하였다.

"저것을 어서 시집보내야 할텐데."

기응의 흰 머리털을 재촉하는 것은 바로 이 근심이었다.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는 오류골댁 내외는 요즘 들어 농사일말고는 오직 강실이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강실이조차 저 지난 해 여름부터는  부쩍 말수가 줄어 부녀 모녀지간에도 기껏 한다는 말이 "진지 잡수시지요." 라든지 "너 안 덥냐?"같은 것이 고작이었다.

"저것이 제깐에도 속으로 걱정이 되어 저러는 것일까요?"

오류골댁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강실이의 입이,  웬만한 일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응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라고 왜 걱정이 안될 것인가. 농사도 때가 있고 사람 일도 때가 있는 법인데. 그나저나 큰어머님이라도  예전만 같으시면 지금같이  속수무책은 아니겠구마는, 집안에 우환이 있고 날씨도 가물어서, 어디 혼사 걱정을 내놓고 허겠는가."
"이러다가 때 놓치면 어쩔 것이요?"
"나이 아직 이십 안팎이니 뭐 그리 늦어 처진 것은 아니라도."
"이 양반 태평허신 것 좀 봐. 그 나이가 적어서 그러시요?"
"누가 적대? 형편이 이렇고 때가 이러니 난들 어쩌는고. 모두들 여기 저기서 부황으로 죽어 나가는데, 제 목숨 가리기들 바뻐서 어디 남 일에 발벗고 나서 주는 사람이나 있어야지."
"수천 서방님이나 좀 알어봐 주시면 안 좋겄소...?"

그 말에 기응은 대답이 없다. 기표라고 강실이 나이를 모를 리 없겠건만, 이상하게도 이 일에 그는 별반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지 않았다. 기표는 기표대로 무엇엔가 골똘히 몰입되어 있는 성싶었다. 사사로운  집안일이나, 주변 없는 기응을 나무라는 일 외에는  가깝게 속을 털어놓지도 않는 기표였고, 기응 또한 기표가 하는 일을 일일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형님이 그렇게 한가로워야지."
"아무리 바쁘다고 큰집 작은집 새에 달랑 질녀 하나 있는 것을."

기응은 담뱃대에  담배가루를 재면서 하늘을 보았다. 푸른 빛이  부옇게 보이는 것이 답답한 가슴을 더욱 막히게 했다.

"짚신도 다 짝이 있다는데, 아무러면 어디 딸자식 여울 데 없을까봐 수선은..."
"옛말에도 있습디다. 자식 가진 사람은, 부모가 반 중매쟁이 노릇 한다고 말이요."
"그러면 어디 임자가 나서 봐. 부모는 무어 나만 부몬가?"

이번에는 오류골댁이 입을 다물고 만다. 공연히 우욱 눈물이 솟구친다.  (가진 것이 변변한가, 학식이 남다른가. 됫박만한 초가집 한 채에 싸리 울타리나 겨우 두르고 사는 처지에, 어디서 맞춤맞은 맞자리 낭재를 구해 오노. 강실이가 어떤 자식이라고. 세상에 내가 저것을 어떻게 키웠다고... 이제는 창씬가 무언가를 다 해 버려서 예전같이 양반 가문 내세우는  세상도 못되는 것을.) 기응은 담뱃대를 마루끝에 딱 따악, 두들겨 털고는 오류골댁을 등지고 헛간 쪽으로 가 버린다. (한 뱃속의 형제로 나서, 누구는 대종가의 종손이 되어 남노여비를 마음대로 부리고, 누구는 기량이 뛰어나 신식 사람이 되고, 그런데 저 양반은 ... 딸자식 하나 있는 것, 제 때 제 나이에 마음 맞는 신랑감 하나를 못 대서...)  오류골댁은 생전에 안 품던 생각을 울컥 삼킨다."분복대로 살지요."

사심없이 안존한 낯빛으로 말해 오던 그네였다. 그  말은 곧 기응의 말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강실이의  혼인이 스물이 꽉 차서 늦어지는 요즘에는  그렇지 않았다. 까닭없이 초조하고 마음 한 자락이  밟혀 있는데다가 누군가가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군가'에는 동복 형제 이기채와 기표, 그리고 남편인 기응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고르지 못한 분복을 나누어 주신 하늘님까지도 들어 있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었던고.) 오류골댁은, 말없이 콩을 까고 있는 강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 지었다. (지난번에 탑동댁이 말한 자리라도 그냥 괜찮은 걸 그랬는가.) 그렇지만 그 집은, 고생이 눈앞에 손금 보듯 보이는 집이었다. 성씨는 반듯하다 하나 기동을 못하는 편모 슬하에 칠남매인가 하는 형제자매의 맏이였다. 논밭 뙈기도 유명무실, 없다는 편이 더 옳은 곳이었다. 낭자는 그런대도 야무지다 했었는데.
"아니, 키울 적에 고생만으로는 모자라서 그런 자리로 여워 놓고 누구 애를 태울라고."

혼담 말을 들은 기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간단하게 퇴짜를 놓았다. 기응은 그때도 담배만을 피우고 있었다.

"자식 농사도, 추수까지만이 일이 아닙니다. 잘 여물었으면 제 값을 받고 팔아야지 그렇게 입도선매 모냥으로 넘길 것이며,  무얼 바라고 공을 들입니까? 강실이만 하면, 딸 덕에 원님 사위도 볼 만한데 짱짱하게 골라야지. 어디 두고 봅시다."
"참 서방님도. 답답한 심정에 그렇게라도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오류골댁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 마디 대답했다.  그네의 속에서 아니꼬움과 원망스러움이 치받쳐 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한 말이었다. (말만 그렇게 하지 어디 서둘러 주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지금 조선천지에 배불리 먹고 호강하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너나없이 풀뿌리 캐먹고 소나무 껍데기 벳겨 먹는  판국에.) 그러나 그네라고  생각이 없을까. 탑동댁이 말한 정도의 자리에는 강실이를 줄 생각이 없었다.

"구슬이 서 말이면 뭐 하는가. 실에다 꿰어야 보배 아니야? 누가 강실이 용모 범절을 몰라서 이런 말 건네는 거 아니네. 조선에는 낭재가 안 남었다네. 쓸 만한 사람은 다 징용 가고, 학도병 가고, 다 남의 땅에서 죽어 나가는데 어디 가서 신랑감을 잡어 올라는가? 내 딸자식 귀한 것만 생각허다가는 앉은 채로 할망구 만들고 말 테니 두고 보아."

탑동댁은 오류골댁의 시원치 않은 태도가 서운했는지 눈까지 흘겨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도무지 마땅한 자리가 나서지 않는 것이다. 몇군데 말이 없지는 않았는데 모두가 내키지 않는 곳들뿐이었다. (하나같이 이쪽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풍문에라도 좀 괜찮다 싶은 자리에서는 또 우리가 마뜩찮을  것이고. 저쪽에서 하자는 곳은  우리가 아깝고...) 오류골댁은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강실이가 안쓰럽고 서글펐다. 되든 안되든 처자가 당혼하면 매파가 문간이 닳도록 드나드는 법인데, 그것도 시절과 세상 탓인지  발길이 끄막하여 심사만 울울하였다.

"본디 시집갈 큰애기 있는 집에는 총각 있는 집 사람이 모이기 마련 아니요? 그런 말도 있습디다. 대감마님댁 따님이 당혼하면 부리던 종놈도 넘본다고. 그러니 좀 처진 자리라고 해서 매파 박대허지는 마시오."하면서 내놓은 신랑감이라는 것은 들어보나마나 서운한 자리였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가릴 것은 다 가리느라고.) 하는 빈정거림이 금방이라도 상대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아 몹시도 조심하면서 응대하는 오류골댁은 어쩌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번은 숲말댁이 그런 말을 했었다.

"형님, 청암아짐 좀  보시요. 혈혈단신 한 몸으로 빈  집에 와서도 몇천 석을 안 이루십디까? 시집을 갈 때야 이쪽이 좀 밑진다 싶게 가더라도, 가서 이루고 살면 될 일, 너무 까스럽게 고르다가 아예 더 늦어서  그도 저도 다 놓치면, 그때 가서는 어쩔라고요?"
"이 사람아, 아무나 첨암아짐인가? 다 타고난 능력 따라 사는 것이네. 그 백모님이 어디  예사 어른이신가 말일세. 그러고  그 양반 살아오신 세월이  아무나 살 수 있는 세월이 아니네."
"다 당허면 살지요. 아, 그야 물론 처음부텀 갖춘 데라면 오죽이나 좋겠소? 그게 어려우니 할 수 있는 껏 해 보자는 것이지요."
(왜 우리 강실이가  어디가 어때서 접어 두고 숙이고 혼인을 해야 한단 말인가. 흠도 티도 없이 키워낸 자식을 왜 그렇게 보내야 되느냐고. 무슨 죄라도 지었다든가?) 오류골댁은  답답하여 가슴을 치고 싶었다.  그때마다 어수룩하고 사람만 좋은 기응이  원망스러웠다.

그 무렵 거멍굴에는 은밀한 소문이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죽인 말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한번 들으면 귀에 묻은 말이 지워지지 않는 소문이었다.

"이노무 여펜네야. 니 눈꾸녁으로 봤어?"
"본 거이나 진배 없당게 그러네."
"본 것허고 본 거이나  진배 없는 것허고는 천앵지판인디 어쩔라고 그렇게 겁도 없이 주뎅이를 나불거린당가?"

평순네는, 개떡이 된 묵은 솜을 손끝으로 피워낸다. 옹구네의 말을 뭉개 버리며 딴청을 부리지만 귀는 어느 결에 옹구네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내가 무신 말 허면 꼭 그렇게 심직를 박는디 말이여. 머 누구만 얌전허고, 누구는 죄로 갈라고 작정을 했간디? 내가, 없는 말 잣어내든 안했응게. 하이고오, 이노무 몸지. 목구녕이 다 쌔애허네 기양. 저만치 궁뎅이를 돌리 고 앉어서 좀 허그라아."

풀풀 날리는 솜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옹구네가 한 손으로는 거것을 허트리며 한 손으로는 코를 막는다.

"그렁게,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해쌓지 말고 저리 가. 무단히 주둥팽이 까딱 잘못 놀리먼 맞어 죽을 텡게."
"그렁게 누가 내놓고 말허간디? 속으다 담어 놓고 있을랑게 나도 못 전디겄길래 자개한테만 말허능고만."
"후여어. 아이구 저 호랭이 물어갈 노무 달구새끼야. 놉으로  댕김서 얻은 보리, 누가 너 줄라고 뻬 빠지게 일헌 중 아냐아."

평순네가 솜을 피우다 말고 옆에 놓인 간짓대를 들어 마당을 친다.  그 바람에 꼬꼬댁 꼬꼬꼬 멍석의 보리를 찍어 먹던 주둥이를 털며 암탉이 종종걸음으로 달아난다.

"날 궂을라먼 바람이 먼저 불고, 비 온 담에는 나뭇가지 풀 잎사구가 젖는 것을, 머 누가 갈쳐 줘서 안당가? 땅이 젖었으먼,  낮잠 자다 나와서 보드라도 아하 비 왔능갑다 허제잉."
"하앗따아, 여시가 따로 없네. 옹구네는 백여시가 아니라 천여시는 되겄네, 천여시. 암만 그리도 말은 함부로 허능 거  아니여. 거그다가, 소문나먼 사람 죽는 일이고만 그려..."

아무래도 큰일은 큰일이었다. 설령 옹구네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그렇게 말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차피 헛소문이라도 한 바퀴 돌 모양 아닌가. 공연히 평순네의 가슴이 무겁게 두근거렸다.

"얌전헌 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드라고, 옛말 그른 디 하나도 없당게.  하이고매 원 시상으나. 법도 찾고, 도리 찾고, 효자.열녀 다발로 엮어 나는 집안에 무신 망신살이여. 이런 년은 아조 내놓고 사는  노무 인생잉게 추접시럴 것도  없고 머 넘부끄럴 것도 없다마느은."

패앵. 코를 풀어 마당에 던지고 치마귀에 손가락을 문지른 옹구네는, 물 건너 열녀비 쪽으로 길게 눈을 흘긴다. 그러더니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면서 입맛을 다시고는, 평순네의 귀바퀴 가까이에 말을 불어 넣는다.

"내가 오짐 누러 다무락 밑으로 안 갔능가아. 칙간에는 누가 들었는 것 같고 급허기는 허고. 거그다가 굿도 한참 신이 나서 아깝드란 말이여. 동녘굴덕 울어쌓고, 죽은 총각 혼신은 또 자개 어머이를 부름서 애간장이 녹게 울어쌓고. 아 참, 굿도 굿도 그런 굿이 없제잉. 그리서, 옳지, 저그 다무락 허물어진 디 있드라, 살째기 넘어가서 누고 오자, 그러먼 굿도 안 놓치고 오짐도 누고..."

그러면서 웅구네는 담을  넘었다. 담이라야 어른의 허리 조금 넘는 낮은 토담이었는데 그나마 무너진 자리는 흙더미가 패어나가, 안팎이 한마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네는 캄캄한 텃밭 쪽으로 엉덩이를 두르고, 곱게 꾸민 신랑 신부 녹의홍상 사모관대 허수아비가  소리 없이 맞절을 하는 마당 풍경을 놓칠세라, 모가지를 길게 뽑아 물고는 쪼그리고  앉았다. 괭굉 괘괭 굉굉 괘괭 괭 괭굉굉  (하앗따아, 굿판 한번 서럽다. 무신  노무 인생살이 살어서도 눈물바람, 죽어서 귀신이 되야도 눈물바람. 오나 가나 울고 우는 굿이구나.  기양 울어 부러라 울어 부러. 애껴 뒀다 가뭄에 쓸라고  참겄냐? 오짐도 누고 나먼 씨언허고, 눈물도  쏟고 나면 개법지. 울고 자픈 거 못 울먼 울음에도  체헝게. 헤기사 먼, 울라고 굿허제 웃을라고 굿헌디냐? 에이고오, 시언하다. 한참을 참었네 기양.) 옹구네는 몸을 일으키며 치맛자락을 여미었다. 잘 입을래야 입을 것도 없는 동강산이 두루치 자락을 겅어 올리던 그네는 무심코 뒤를 돌아 보았다. 누가 보았으면 어쩌나 싶은 무망간의 몸짓이었다. (아이고매.) 순간 옹구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명아주 여뀌가 우거진 담 밑 저만큼에 무슨 희끄무레한 형국을 본 것이었다.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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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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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법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가 법무부 밖에 모인 흑인과 백인 군중들에게 확성기로 연설하는 모습. 위에 인종평등회의]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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