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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 총평 : 하응백

  여러 각도로 세상 보기

  1. 소설 속의 소설 쓰기

  역사가 진보에 대한 약속을 버리지 않았고, 세계는 이성의 기획에 온몸을 드러내고 있었을 때, 작가의 자의식은 소설의 배후에 숨어 조정자 역할에 만족할 수 있었다. 세계는 모순 덩어리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소설 쓰기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때 작가는 사회의 감시자였고, 교사였으며, 때로는 선지자가 되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의 파트롱에게 버려져 스스로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 저주받은 자는 자신의 파트롱을 지배계급에서 보편성(인류애)으로 대체했다고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인류의 황금빛 미래가 찬란히 올 것이라는 황홀한 믿음은 슬금슬금 혹은 갑작스럽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자의식은 그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을 떠나 세계로 향했던 그의 의식은 참혹하게 꺾여진 자신의 의식 자체를 내부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무엇이 보였을까. 벌레가 보였고, 기억 속에서만 끊임없이 부침하는 어린 날의 자폐아적인 <나>가 보였고, 창녀의 기둥서방이 된 박제도 보였다. 세계는 환멸스러웠기에, 세계로 향해야 할 <나>의 에너지가 <나>의 의식에 집중되었다.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의식의 과잉 상태는 피할 수 없었다. 90년대 들어 한국소설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작가들의 레이더에 무수한 발광체로 존재했던 통일, 진보, 노동, 민중 등의 점들이 스크린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많은 작가들은 허둥대기 시작한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소설가 소설이 새로운 목표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소설가 소설이 어째서 새로운 목표물인가. 이미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8)을 비롯한 많은 소설가 소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케케묵은 방식의 답습이 아닌가. 그러나 최근의 소설가 소설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명 새롭다. 과거의 소설가 소설이 소설가가 주로 관찰자가 되었다면-시점의 문제, 즉 기법상의 문제였다면-최근의 소설가 소설은 소설  장르 혹은 소설 쓰기 자체에 대한 의식 과잉을 주요한 문제로 다룬다. <소설 쓰기가 어렵다> <소설 쓸 소재가 없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주제는 이래야 한다> 등의 창작 이전 구상 단계에 작가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과거의 작가라면 누설하지 않아야 할 동업자끼리의 비밀을, 소설 작법에 해당하는 사항을, 요즘 작가들은 소설 속에서 당당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작가 정신의 빈곤이나 소재 발굴에 대한 게으름으로 작가를 몰아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작가들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려 세울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소설(문학)의 위기감에 대한 작가들의 무의식적 반영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성큼 다가온 소설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는 창작 방법론을 소설 속에 내재화하기에 이르렀다. 작가는 무엇이 소설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이 소설인가를 소설화한다. 이것은 소설과 소설가의 불화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만옥의 "회칼"은 그 범주의 소설. 작가는 어떻게 써야 좋은 소설인가를 묻고 있다. 그 답이 <회칼>이다. 슬픔이나 아름다움으로 소설을 치장하지 말고 잘 갈아진 회칼로 생선을 저며내듯이, 정확하게 인생의 살점을 도려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요리사가 회칼을 갈아놓듯이 평소에 작가 정신을 벼려놓아야 한다. 작가 정신의 다짐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수직으로 회칼을 내리쳐 아름다움, 슬픔, 달콤함, 착함, 부드러움과 분노, 추함, 악함, 고통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 놓는다. 이 견여금석(堅如金石)한 작가의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감성적인 것에 대한 김만옥의 분노 뒤에는 소설에 대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박범신의 "골방"의  주제는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고 밤에 몽유병자처럼 떠도는 막내아들과 작가인 아버지의 화해이다. 작가는 그 화해를 위해 밤과 어둠과 달을 동원한다. 밤은 어둠이며, 달을 잉태한다. 신화적 사고 혹은 윤회적 사고에 의하면 사람은 죽어 달로 간다. <달에서 비를 통해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땅으로 내려와 곡식과 채소의 뿌리를 통해 음식물이 되며, 음식물은 정자(精子)를 통해 최후의 모태로 들어가 마침내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 작가가 이런 사고를 도입하는 이유는 자신과 아들과의 연속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여성성(자궁)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아들을 확인할 수 없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 여성성은 달과 어둠으로 표상된다. 아들이 어둠 속을 떠도는 것은 뱃속에 든 자신을 <없애버렷>이라고 외쳤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자,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증표를 찾아 헤메는 행위이다. 결국 아들과 아버지를 화해시키고 그들의 존재를 공고히  하는 것은 달과 어둠이며,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방이다.  이러한 소설의 주제에 대응하는 작가의 더 내밀한 축은 지나간 자신의 창작 행위에 대한 회오(悔悟)의 감정이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신념 체계가 조금씩, 그리고 급격히 흔들리면서  부터, 내가  쓴 소설들의 햇빛 밝은  명징한 구조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될 때부터 나는 자주 몸서리를  쳤다. (...중략...) 감각의 안테나는 언제나 기름칠이 반지르르했고 감수성의 칼날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중략...) 내가 가진 겉구조의 사유 체계엔 가짜 대답들이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 가짜라는 걸 나는 이제 너무 확고하게 알고  있었다. 대답은 나의 내장 어느 은밀한, 습하고  어두운 골방에 겨울 뱀처럼 똬리 틀고 있을 터였다. 이놈아, 햇빛 아래 너도 나오거라. 나는 소리쳤다. 방마다 창을 내려는 것은 원심력의 상징이며, 그것은 결국 골방 안으로 들려는, 운명적 구심력에 대한 공포감의 반작용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봄이었다.

  그동안의 소설들이 감각과 감수성에 기댄 겉구조의 사유  체계였다는 것, 밖으로만 돌아다닌 부랑의 문학이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속에 있는 자신의 본질을 찾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자체가  박범신의 새로운 창작 방법론에 해당한다. 위기 의식을 통한 자기 갱신인 것이다.  곡괭이 하나 찾아들고 나는 다시 전사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강렬한 살의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비장한 출사표인 것이다.  김만옥의 "회칼"이 <소설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이며, 박범신의 "골방"이 <앞으로 소설은 이렇게 쓰겠다>라면, 정찬의 "깊은 강"은 어떨까.  화자이자 작가인 <나>는 우연히 하진우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그의 행적을 본의  아니게 추적하게 된다. 정체불명의 비현실적 사나이 하진우는 무엇이었던가. 정찬이 생각하기에 하진우야말로 진장한 작가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주막에서의 대화를 되새겨보건대 하진우에게 작가란 시중에서 흔히 사용되는 작가라는 말과 다른 말임을 나는 느꼈다. 그에게 작가란 궁극의 존재였을까. 그래서 나는 가금 자문해보곤 한다. 내가 작가인가,라고 추상적인 하진우에게 진정한 작가의 임무를 부여하고, 그 추상성에 정찬은 자신을 복무시키려함이 아닌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하진우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강원도 영월 어라연에 겨울이면 나타나 동면했던 하진우는 <더 많은 업적,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직선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틈의 공간과 틈의 시간을 찾으려 했다. 그 틈이란 <둥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융화의 세계>이다. 역시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그 둥근 시간과 융화의 세계를 산문적으로 재해석하면 욕망의 완충지대, 이완의 공간이 아닐까. 경쟁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질주하는 현대인들에게 도시 속의 섬과  같은 위안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바로 그런 위안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깊은 강"은 <소설은 이런 것이다>에 해당한다.


  2. 희극적 소설 쓰기 혹은 서사의 다양화

  식민지시대 이후 우리 소설은 대개 침중하고 무거웠다. 식민지시대, 6.25전쟁, 4.19, 광주민주항쟁 등, 비극적인 우리의 현대사는 울 수밖에 없는 배경을 작가들에게 강요했다. 김유정이나 이문구과 같은 탁월한  해학 작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  해학의 배경에는 아이러니적 상황이 늘 깔려 있게 마련이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정황으로 웃기든, 문체로써 웃기든, 독자들을 웃기는 소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이윤기의 "갈매기"에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독신 남자의 외로움, 현대인의 의사소통 부재, 가족의 붕괴 등등을 읽어내는 것은 이미 진부하다. 한 독신 남자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스튜어디스와 연애하는 이야기 역시 진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진부하지 않다. 그것은 갈매기를 등장시켜 항심(恒心)이니 기심(機心)이니 해서 독자를 현혹시켰기 때문이며, 현재-과거-현재로 오는  구성의 묘미 때문이며, 대화의 생동감 때문이다. 주인공이야 어찌 기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기심이야말로 이 소설의 창작 동인(動因)이다. 기심은 기심이되 기심이 아닌 척하기. 그 시치미 떼기가 이 소설의 갈등 구조인 셈이며, 작가의 그러한 기심을 항심으로 포장하기가 바로 이 소설의 재미에 해당할 것이다.  은희경의 "서정시대"는 작가의 자전소설에  해당한다. 대개의 자전소설은 <나>의 성장기는 얼마나 어둡고 고독했고 힘들었던가, <나>는 왜 글쓰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내가 산 시대는  얼마나 처참, 황당했으며 <나>는 그것을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등등이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은희경의 "서정시대"에는 그런 이야기가 싹 빠져 있고 원형탈모증 증세인 <땜통>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미팅으로 점철되었던 대학 시절을 거쳐 불쑥 현재로 온다. 그러는 중간중간 작가는 독특한 상황과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웃긴다. 심지어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아아, 너무 웃긴다 웃겨. 내가 농담을 좀 안다는 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이다. 은희경의 다른 소설들("타인에게 말 걸기", "그녀의 세 번째 남자")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웃긴다. 이 웃김을 통해서 작가는 진지했던 지난 시절을 카타르시스한다. 너무 웃고 나면 눈물이 맺히는 법이며, 은희경의 경우 그 눈물은 밝게 빛난다. 성석제의 "유랑"은 한 일본인 여자의 일대기를 의고문체의 서간문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의 의도는 일부종사한 한 여인에게 열녀문을 세워줌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일본 여자의 간절한 태도와 장씨 문중의 종손의 시시껄렁한 태도의 대비를 통해 코미디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 코미디는 그녀의 술집이 <며칠 공사를 벌이는 것 같더니 그 집은 안이 훤히 비치는 유리문에 하루 종일 쿵따닥거리는 요란한 음악을 틀어대는 속옷가게로 바뀌었다. 제기랄, 모든 게 너무 빠르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스피디한 세상에 대한 푸념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의 본줄기나 화자의 푸념이나 모두 코미디적으로 읽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성석제의 이 코미디적 소설 쓰기는 90년대적 상황에서 산문 쓰기의 한 전략으로 보인다(이 작가의 최근의 다른 소설 "통속", "조동관  약전", "비밀스럽고도 화려한 쌍곡선의 세계" 등을 보면, 이 작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전(傳), 야담 등의 재래 서사 양식의 변형적 차용, 패러디, 골계 등의 다양한 서사 양식을 작가는 실험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서사의  다양화, 혹은 서사 전략의 확장으로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상 보기의 몇가지 방법

  김소진의 "신풍근 배커리 약사"는 전형적인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다. 손자(재덕),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각각 연세대 한총련 사태, 월남전, 6.25전쟁, 동학란으로 연결되어 이 소설은 우리 근,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을 접목시킨 가족사 소설의 소품에 해당한다. 중편 양식으로는 무리한 설정이지만, 이 소설에서 김소진이 공을 들인 부분은 민중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찐빵 할아버지 신풍근의 건강성과 해학성 부분이다. 80년대 이데올로기의 광휘가 빛을 잃어가고 있는 즈음에도 김소진은 체질적인 친연성으로 민중 의식의 본질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소진의 세상 보기가 긍정적 세계관에 입각한 전통적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김소진의  소설에 대해서는 졸고  "민중 속의 민중주의", 포에티카, 1997년 여름호를 참고할 것). 신인 김현영의 세상 보기는 어떨까. 김소진의 "신풍근  배커리 약사"의 소품이 찐빵이라면 김현영 작품의 소품은 바게트빵이다. 당연히 찐빵과 바게트빵의 거리만큼 이 두 소설의 세상 보기는 차이가 있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유행가 가사가 다 했다고  독백하며 귀에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김현영 소설의 주인공 <나>도,  김소진의 찐빵과 엄밀하게 일치되는 어머니의 고구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냉장고"에서 <나>의 어머니는 고구마를 먹다가 체하여 죽었다. 계모로 들어온 여자는 냉장고에 생크림 케이크, 멜론, 햄, 치즈, 베이컨 등의 서양풍의 음식을 가득 채워놓지만, <나>는 그 음식물을 거부하고 꽁치 통조림 음식만을 고집한다. 이 소설의 갈등의 주축은 계모(아버지)와 <나>가 아니라, 꽁치와 고구마 대 서양풍의 음식인 것이다.  김소진과 김현영이 둘 다 찐빵류의 음식(꽁치, 고구마)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김소진이 찐빵 맛에 길들여져 찐빵에 접근하는 것과는 달리 김현영은 고구마에 관념적으로 접근한다. 찐빵 체질인 김소진과 의식으로 고구마에 접근하려는 김현영의 근본은 다르게 마련이다. 다른 말로 김소진은 찐빵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김현영은 고구마를 먹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김소진은 리얼리즘을, 김현영은 풍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풍자란 풍자하는 자와 풍자당하는 자의 경계선이 확실하지 않으면 그 위치가 불안해진다.  "냉장고"에서 <나>의 몸은 풍자당하는 쪽에 있고 <나>의 의식은 풍자하는 쪽에 있다. 이 어중간함이 <나>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바로 90년대생 작가들이 처한 공통적 입지점이기도 하다. 고구마와 찐빵과 꽁치를 먹는 세대를 부모로 둔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세대. 이 입맛(전통)의 단절로 인해 그들은 세계를 불연속적으로 바라보며, 그것이 그들의 시각을 비뚤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 비뚤어진 시각이 우리 문학사에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 단절을 통한 전통의 계승일 것이다.  이미 중견의 반열을 넘어선 이동하의 "그는 화가  났던가?"는 어떠할까. 심야에 우등고속버스가 빗길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영화 "스피드"처럼 버스는 고속으로 달리고 아무도 그 버스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운전사는 묵묵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버스는 급기야 급제동을 하게 되고 승객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사고의 위험을 가까스로 벗어난 뒤에도 버스는 여전히 고속 질주를 한다. 승객들은 아우성을 치지만 운전사는 요지부동이다.  이 소설은 폐쇄된 특정의 공간에서 벌어진 상황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알레고리 기법의 전형인 셈이다. 이 소설이 어떤 의도로 씌었는가를 정확히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한 공동체의 행보를 잠시 위임받고 난 뒤부터, 독선적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위정자에 대한 비꼼일 수도 있다. 아니 그것보다도 한 공동체가 욕망의 무한 질주를 향해 나아갈 때, 그것의 제동은 불가능한 것이며, 그 속도는 폭력으로 변하여 모든 구성원들에게 불가항력의 운명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때 공동체의 주체이어야 할 구성원 하나하나는 초라한 몰골의 탑승자로 변해 폭력의 상징인 운전사에게 관용을 빌거나, 더 위에 있는 운명의 신에게 가호를 빌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광란으로 질주하는 버스에 타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만약 이 시대가 그렇다면? 술 취해서 자는 것, 폭력에 대해  마취로 저항하는 방식이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아니면 등산모의 사내와 같이, 피해를 줄일 최소한의 방법을 선택하고,  군중들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권력을 가진 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식인의 역할일 것인데, 그 역할의 결과가 광란의 버스 질주를 과연 멈추게 할 수는 있을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누구도 그 버스를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운명의 불가항력성을 이야기한 것일까. 연속적 세계관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승객들에게 있다. 버스에서 하차한 뒤 승객들은 버스에 탄 것도 운명이었고, 괴물 같은 운전사를 만난 것도 운명이었기에 그들이 살아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제도라고 생각한다면? 혹 작가는 쉽게 잊어버리는, 그래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우리 시대의 습속을 비판한 것은 아닐까. 알레고리란 멀리서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 그 거리가 멀수록 보편성에는 가까워지지만  개별적 특수성과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보조관념을 통한 원관념 찾기에 익숙한 우리의 문학적 습관이  이 작품을 미심쩍게 한다.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변신 모티브를 사용한 환상적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 결혼하여 아파트에 살던 여자는 서서히 식물로 변해간다. 대개 변신 모티브의 도입이란 어떤 한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적 선택이다. 그리이스 신화의 월계수 이야기도 그 한 예이다.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의 짝사랑을 성가셔 하던 하신(河神)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는 아폴론에게 쫓기자 급박한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간청해 나무(월계수)로 변한다. 다프네의 유일한 즐거움은 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것이었으나 아폴론의 폭력적인 구애는 그녀의 자유를 짓밟는다. 이 신화와 "내  여자의 열매"를 비교해 봄은 어떨까. 여자는 결혼 전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는 것이 어릴 적부터의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연의 끈은 끈질긴 것. 여자는 결혼해서 70만이 모여 사는 서울의 한 아파트촌에 살고 있다.  여자는 그런 도시적 환경에 절망한다. 인구 칠십만이 모여 산다는 거기서 천천히 말라죽을 것 같아. 수백 수천동 똑같은 건물에, 칸마다 똑같은 주방에, 똑같은 천장에, 똑같은 변기, 욕조, 베란다,  엘리베이터도 싫고 공원도,  놀이터도, 상가도, 횡단보도도 다 싫어. 아폴론의 구애에 해당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적 상황이며, 그 상황은 그녀를 서서히 질식시킨다. 그녀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다프네의 선택처럼 식물이 되는 것. 식물이 되어가면서 그녀는 과거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가 한갖 허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뒤집으면 자유라는 환각이 헛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한곳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 된다. 이 식물로의 변신은 결국 바닷가 빈촌에서 자라 결혼하고 일하고 아이을 낳고 죽어 선산 남편의 곁에 묻힐 어머니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녀의 식물 변신은 여성으로서의 연속성의 확인이며, 도시적 환경에의 적응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봄이면 붉은 꽃을 피울 재생과 부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환상적인 변신 모티브를 통해 한강은 여성으로서의 현실과 화해하는 것이다.  이동하의 버스를 이용해 김소진, 김현영, 이동하, 한강의 세상 보기 방식을 비교해 보자.
  김소진은 고물  버스를 타고 있다. 하지만 그 버스 속에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만이 타고 있어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한다. 이 버스의 행로를 방해하는 적은 외부에 있다. 그 적은 경찰관인지도 모른다. 버스가 고장나도 그들은 수리를 해서 갈 길을 계속 갈 것이다. 김현영은 비까번쩍한  신형 버스를 타고 있다. 승객들도 호사스런 차림을 한 사람들 뿐이다. 김현영 역시 호사스런 차림을 하고 있지만 눈길은  앞서 떠난 고물 버스의 행방을 찾고 있다. 결국 김현영도 이 버스에서 안전 벨트를 매겠지만  처음부터 호화 버스에 길들여진 치들보다는  훨씰 희망적이다. 이동하의 버스는  "그는 화가 났던가?"의 그 버스. 이동하는 이 버스에 타고 있지 않다. 멀리서 그 버스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관찰한다. 멀찍이서 세태를 훈계한다. 관록의 탓이다. 한강은 타기 싫었지만 버스를 탔다. 타서 버스의 위 환기구를 통해 슬쩍 하늘로 올라가 다시 버스를 내려다본다. 탈 만하게 보인다. 내려와 좌석에 앉고 차분히 안전 벨트를 맨다. 밖에서, 안에서, 위에서 작가들은 세상을 본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란 그들의 시각을 따라 세상을 같이 보는 것이다. 밖에서, 안에서, 위에서, 또는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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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06.12.20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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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정결한 앨범 - 김용성 장편 '도둑일기'

    Date2006.11.29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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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리얼리즘의 유연함 - 신상웅 장편 '일어서는 빛'

    Date2006.11.29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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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한 껴안기, 넘어서기 - 이청준 연작 '서편제'

    Date2006.11.29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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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말과 시대의 스펙트럼 - 최일남 작품집 '히틀러나 진달래'

    Date2006.11.29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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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천진난만한 진리의 모습 - 고은 장편 '화엄경'

    Date2006.11.26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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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용수산 자부심 - 박완서 장편 '미망'

    Date2006.11.26 By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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