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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야기 - 임순만


      3. 고전적 글쓰기와 그 지평

   요설의 마력 - 이문구의 문장

  초겨울의 산하, 쇠잔한 것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황갈색 막막한 대지가 고즈넉해지는 계절. 그러나 언 땅 위로 동백화 피어오르고 죽음의 땅 속 깊은 곳에 칡뿌리가 알을 배는 때.  이 계절의 놀라운 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작가로는 단연 이문구씨를 꼽을 수 있다.  한국어의 심층을 꿰뚫듯 웅장하면서도 능청맞고, 너절하면서도 굽이굽이 감돌아 가는 요설문체. 서릿발 같은 사회비판 의식속에 충청도 양반의 정신을 도도하게 감싸안은 그의 소설은 한국문단의 독보적인 개성이다. 그의 대표적 귀향소설인 '관촌수필'을 눈물과 웃음없이 읽어낸 사람이 있을까.

  십삼 년 만에 맡아보는 굴뚝냄새에 나는 불현듯 콩깍지와 메밀대를 군불 아궁이에 때어볼 수 있는 옛날이 그리웠다. 그 무렵은 내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야 했던 고생스런 청소년 시절이었음에도, 호의호식하며 허리를 굽신대는 수염 허연 늙은이한테도 도련님 도련님 하는 소리를 들었던 철부지적의 애앵한 기억보다 훨씬 씨알이 여문 그리움이었다.

  92년 초여름 나온 장편 '매월당 김시습'은 역사 소설의 범람 속에서 제대로 지은 역사소설의 본보기라는 평단의 후한 점수를 받았다. 단 하나,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된 문체가 그의 문장의 마력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다소간 서운하게는 했다.  그것이 조선조의 최초의 저항시인 김시습에 대한 예우였는지, 92년 '작가세계' 겨울호에 발표한 '인생은 즐겁게'에서는 다시금 이씨다운 문장의 특집을 한층 질펀하게 보여준다.  '작가세계'의 특집기획에 따라 장편의 일부를 먼저 내놓은 '인생은 즐겁게'는 주인공 '무전'이 동네아낙들의 청을 받아 기우제를 주관하는 내용. 아내와 각방을 쓰고 있어 동네서 기중 깨끗하다는 부녀회의 청을 거절 못한 무전과 고작 한 달에 한 번 꼴로 갖는 부부관계에 안달이 난데다 부녀회의 놀림까지 받은 그 아낙.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입씨름은 요설의 축제요, 살아 있는 말들의 피돌기다.  동아밧줄같이 질긴 그의 문체는 참담한 몰락과 방황을 거치며 가라앉힌 한국의 정신에서 나온다.  보령향교와 화암서원에 관여할 만큼 세력이 있던 조부, 초년에 관직에 있었으나 빨치산에 가담했다 살해된 부친, 주위의 피비린내나는 복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가 순식간에 가장이 되는 운명의 무서움.  고향 대천에서 중학을 졸업한 이씨는 저주스런 고향을 버리고 서울 신촌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거나 떠돌이 행상을 했다.  훗날 그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을 때 오늘날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된 학우들은 전국 백일장을 휩쓴 세련된 문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씨 자신의 그것은 '노가다판 문장'이었다.

  그러나 스승 김동리로부터 그 문장의 특이함을 인정받았고 두 사람은 7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의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부자의 정을 넘는 사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졸업 후에도 생계를 위해 공동묘지 3천기를 옮겨야 했다는 '노가다판'의 나날들... 그의 문장은 조부로부터 훈육된 조선사대부의 정신과 삶의 늪으로부터 솟아오른 남성의 생명력이다.  그런 내력이 있기에 요즘의 어떤 가벼운 문장도 이문구 앞에서는 가벼움을 자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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