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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06:56

온몸으로 득(得)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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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득(得)하라!
[철학자의 서재] 김훈의 <개>


생살의 기록

내 책꽂이 한 구석에는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몸을 맞대고 있다. 한 권은 소설가 김훈이 쓴 비교적 짤막한 장편소설로 지금부터 내가 시답잖은 몇 문장으로 사족을 붙이려는 책이요, 다른 한 권은 <4천 원 인생>이란 큼지막한 제목 아래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 일기"라는 부제가 딸린 책이다.

우선 김훈의 소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애피타이저로 저 <4천 원 인생>이란 책을 조금 맛보자. 제목과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비정규직 노동 현장들 중 몇 군데의 실태를 아무개 잡지사 소속 4명의 기자가 실제 그 곳에 '위장 취업'하여 직접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이 책이 내게 값진 것으로 다가온 까닭은 문장 하나하나가 책 머리말의 제목처럼 "가장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생살 그대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함께 수록된 추천의 글들도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직접 겪은 것을 통해 얻은 깨달음",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등 입맛에 맞는 수사동원하여 한결같이 그 체험의 직접성과 기록의 생생함에 경의를 표할 정도이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로 정리하면, <4천 원 인생>(안수찬·전종휘·임인택·임지선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이란 책의 기록적 가치는 기록하려는 세계를 결코 추상적 개념들로 구성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배운 자의 고약한 습성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습득한 몇몇 제한적인 개념들로 세상을 재단하고 이렇게 인위적으로 산출한 세계를 진짜로 우기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삶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저 통한과 치욕의 생생한 삶도 과연 그러한 '말라빠진' 몇 가지 개념들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 가치설의 '노동' 개념만으로 구성될 수 없는 선(先)이론적 세계의 생생한 노동이 있고, 정치경제학의 '잉여가치' 개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전(前)과학적 세계의 고통스러운 노동이 있는 법이다.

삶의 세계는 '날 것 그대로'의 세계







▲ <4천 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 일기>(안수찬·전종휘·임인택·임지선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 ⓒ한겨레출판
가공되지 않은 싱싱한 날 것의 세계, 다시 말해 이론화되고 과학화되기 이전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는 머리로 궁구하기에 앞서 먼저 몸으로 체득하는 세계이다. 소설가 김훈의 작품 가운데 <개>(푸른숲 펴냄)라는 제목이 붙은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 있는데, 이 책의 부제가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부제만 보고도 필자가 앞에서 애피타이저로 맛보기한 것이 결국 <개>의 기록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발바닥'의 기록임을 자처하는 <개>와 '생살 그대로'의 기록으로 평가받는 <4천 원 인생>은 둘 다 생활세계에 대한 화자 자신의 체험을 묘사한 글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굳이 둘의 차이점을 밝히라면, <4천 원 인생>은 세상 체험을 한 자가 그 체험을 스스로 기록한 것인 반면, <개>는 소설가가 소설의 주인공인 개의 세상 체험을 픽션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개>에서 소설가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개>의 일인칭 주인공은 작가가 아니라 '보리'라는 이름을 지닌 개이기 때문이다. 즉 '발바닥의 기록'이라 할 때 그 발바닥은 대지와 직접 교감하는 개의 생살의 일부이다. 그래서 <개>의 기록은 어쨌든 <4천 원 인생>과 마찬가지로 주체가 자신의 삶의 세계를 몸소 겪은 체험에 입각하여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는 비록 소설이지만 한 권의 훌륭한 현상학 교과서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내가 <4천 원 인생>을 놔두고 굳이 <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는 세상 그 자체, 즉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직접 다가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비록 개의 것이기는 하지만 몸과 세상의 상호 교감이라는 형식으로 아주 훌륭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는 개라는 동물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자신의 몸 바깥의 세상에 대해 비교적 예민한 감각적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도 한몫했으리라.

<개>의 줄거리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일련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시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를 어느 궁벽한 시골의 한 가난한 가족의 삶의 이력을 그렸다. 여기에는 수몰로 인한 고향의 상실과 가족의 해체, 고달픈 육체노동과 비극적인 사고사 등 세상살이의 신고풍경들이 모두 들어 있다.

물론 이 풍경들은 사람의 것이나 정작 그것들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개다. 사람살이를 개의 관점에서 그려낸다는 것은 사람의 생활세계가 개의 생활세계에 흡수되어 개의 체험 속에 보존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왜 사람이 아니라 개가 주인공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체험의 주체가 온몸으로 체득한 세상살이의 경험이 과연 '날 것 그대로'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어느 날 주인은 고기잡이를 나가 바다에 빠져 죽는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식구들은 커다란 슬픔에 빠진다. 물론 그 슬픔을 한갓 '미물'인 개가 어찌 '감히' 알랴마는, 그러나 개는 개의 방식대로 그 사태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주인님은 그 정치망어장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묻혔다. (…) 주인님의 관이 땅 속으로 내려갈 때 나는 우우우우 울었지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나는 울었다. 사람의 몸을 나무 상자에 넣고 뚜껑에 못질을 해서 땅에 파묻는 것이 죽음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주인님의 몸에서 풍기던 그 경유 냄새와 밤바다에서 주인님이 나누어준 그 미역국 맛과 가을에 마당에서 도끼장작을 쪼개던 주인님의 그 아름다운 근육과 땀방울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192~193쪽)

주인을 잃은 개의 슬픔은 인간의 그것처럼 결코 심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늘 옆에 존재하던 물질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사태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슬픔은 반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구체적이다. 개에게 죽음은 결코 개념이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개념이라면 그 누구의 죽음이든 다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개에게 주인의 죽음은 단 하나의 죽음, 바로 그 주인의 죽음이다. 그것은 주인과 자신 사이에 존재했던, 즉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었던 몸과 몸의 교감이 상실된 사태이다. 이처럼 아주 분명한 물질적 실체를 갖는, 그래서 매우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의 사태들이 어찌 '피와 살'이 빠진 추상적 개념들로 온전히 파악될 수 있겠는가.

알기 전에 먼저 느껴야 한다







▲ <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김훈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이론과 과학으로 재단되기 이전의 그 무한한 원형질의 생활세계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념과 방법의 옷을 입기 이전의 그 풍부한 질감의 생활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가장 단순한 체험의 원리는 삶의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연관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추상해내기 때문이다. 개념과 이름으로 세상과 삶을 사유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느끼는 것이 체험의 본령인 것이다. 본질에 앞서는 이러한 실존적 삶의 중요성을 <개>의 화자인 '보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개로 태어났으므로 나는 내 고향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 사람에게나 대단하고, 나는 내 몸뚱이로 뒹구는 흙과 햇볕의 냄새가 중요하다. 내 이름 보리도 사람들이 붙여놓은 이름이고 개로 태어난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들은 어느 고장의 이름을 말해주어야만 겨우 어떤 땅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만, 개들은 늘 바쁘고 신나서 고향의 이름 따위는 하찮은 쓰레기일 뿐이다. 개들은, 안개냄새 나는 고장, 갯비린내 나는 고장,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 나는 고장처럼 몸속에서부터 분명하게 고향을 기억한다. (10~11쪽)

우리는 누구나 세상의 참모습을 알고 그에 따라 살고 싶어 한다. 이런 인식적 욕망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어서 철학이란 보편 학문과 이로부터 많은 개별 학문들이 생겼다. 인류의 삶이 종말을 고하지 않는 한 아마도 이러한 지적 활동은 영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 욕망과 충족의 변증법적 과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상은 불가피하게 그 생생한 원형을 보존하기가 힘들게 된다. 각축하는 진리의 격전장 속에서 온갖 이론과 학문들이 저마다 '예리한' 개념들과 방법론으로 무장하여 탐구 대상에 대해 이런 본질, 저런 이름을 갖다 붙여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령 <4천 원 인생>에서 소개된, 대형 할인점에서의 영희의 노동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임노동'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그녀의 삶은 <자본론>의 경제 법칙에 종속되고 만다. 물론 나는 특정 이론, 특정 학문, 예컨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영희의 노동이 바로 그렇게 이론화되고 과학화되는 순간 영희의 노동과 연관된 많은 생생한 삶의 세계는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로 불리는 영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거창한 붉은 혁명이 아니라 기껏 정규직으로의 신분 상승이라는 아주 소박한 꿈이라는 것을.

비단 영희의 노동만이 아니라 세상살이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저마다 자신의 협소한 관점으로 파악한 현실을 세상의 참 모습이라 우긴다면,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세상살이의 이해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의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노을 진 저녁들은 모두 입을 벌려서 쉴 새 없이 무어라 지껄이면서 말을 걸어온다. 말은 온 세상에 넘친다. 개는 그 말을 알아듣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 그러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프다. 그 고통과 슬픔을 모두 각오하고서, 나는 우선 개로 태어나는 일의 기쁨과 자랑을 말하려 한다. 말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침내 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아……구두 신고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아, 구두 밑에 바퀴 달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내 입을 틀어막지는 말아다오. (11~12쪽)

구두 신고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즉 맨살의 발바닥으로 이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촉촉하거나 푸석거리는 대지의 질감을 느낄 수 있으랴. 세상에 대해 오만한 분석과 종합을 일삼기 전에 먼저 온 몸으로 그것을 체득함이 순서이리라. 내가 대상에 대해 나의 언어로 말하기 전에 먼저 대상이 나에게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먼저이리라.

몸소 겪은 비정규직 노동의 체험을 기록하는 이유를 <4천 원 인생>의 기록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문제점을 제대로 충실히 아는 것이 모든 문제를 푸는 시작이다.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참으로 현상학적이다.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우리 모두의 것이든 발바닥으로 뛰고 코로 냄새 맡으며 피부로 부딪히는 세상살이의 체험을 기술하는 것이 그것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 우리가 매순간 느끼는 세상살이의 고통과 환희는 결코 보편화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머리로 분석하고 종합하기 전에 먼저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점이 김훈의 소설 <개>가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교훈이라 하겠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그렇게 접근하라.




/서도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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