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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0724084347&Section=04
무지한 스승, '지적 평등'을 두려워하는 그들을 비웃다!
[철학자의 서재]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무지해서 무시당하는 세상과 태일이

가끔 딸아이가 읽는 책을 함께 보면 뜻밖의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1년간 딸아이를 위해 정기구독 했던 <고래가 그랬어>라는 잡지에서 전태일 평전이 만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일이>(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가 그것이다. 아이들이 보기에 친숙한 제목도 그렇지만, 평소 좋아하는 최호철 씨의 그림이라 더 정이 갔다. 또 마침 동네 도서관에도 구비되어 있기에 딸아이를 핑계 삼아 함께 읽었다.

딸아이와 한 권씩 번갈아 읽다 보니 예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분노 역시 내 안에서 들끓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지막에 태일이가 세상이라는 큰 벽 앞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모두에게 그 벽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딸아이를 피해 옆방에서 몰래 혼자 급하게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태일이는 정부의 탄압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삼동회' 동료들과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산처럼 거대한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입증했고 또 역사적으로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결국 태일이는 자신을 막아서는 세상의 벽을 온몸으로 뚫고 나간 투사였다. 그렇지만 생전에 태일이를 막아선 또 다른 벽도 있었다.

태일이의 눈을 뜨게 해준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그 중 근로기준법 책도 큰 역할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부러 노동자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한자로 가득한 근로기준법 책.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태일이는 이 책을 혼자 읽으면서 대학생 친구라도 한명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한다.

당시 태일에게 함께 공부해 주는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 아니면 태일이 자신이 대학생이 되어 원하던 지적 능력을 성취할 수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신문기자를 찾아가고, 방송사와 노동청에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을 알리려 했을 때 좀 덜 무시당했을까?

재단사가 되긴 했지만 결국에는 평화시장의 수많은 노동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태일이는 좀 더 공부를 했더라도 이미 노동자라는 그 신분 때문에 충분히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난하기에 공부를 할 수 없고, 배우지 못했기에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무시당하는 세상. 이러한 현실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무지한 스승>과 해방의 길







▲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지음, 궁리 펴냄). ⓒ궁리
사실 태일이는 무지해서 무시당하는 세상의 벽을 온몸으로 깨부수며 스스로 무지와 노예의 삶에서 벗어났다. 그에겐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더 이상 무지를 의미하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배워서, 또 어떤 교육 과정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이 처한 삶의 상황을 자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지의 벽을 넘어섰다.

이러한 태일이의 삶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양창렬 옮김, 궁리 펴냄)에서 말하고자 했던 "자신의 힘으로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을 본 해방된 노동자들"(15쪽)의 한 사례일 것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이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29쪽)

누구나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우고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지한 스승>이 보여주고 싶은 태일이의 해방의 길과는 또 다른 지적 해방의 길이다.

랑시에르는 우선 조제프 자코토(1770~1840)라는 인물의 지적 모험을 추적한다. 우연히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네덜란드 학생에게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하는 강제된 상황에 처하면서, 자코토는 새로운 지적 모험에 빠져든다. 학생에게 우연히 네덜란드-프랑스어 대역본으로 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던져주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스스로 프랑스어 문법을 깨우치고 거의 작가 수준으로 프랑스어 작문까지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자코토는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할 수 있었다면, 다른 무지한 자들도 언제나 이것을 할 수 있다"(70쪽)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지한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실제로 스스로를 해방하면 된다.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지적 능력)을 갖고 있기에, 해방되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무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 자코토가 발견한 '보편적 가르침'이다. 스승이란 학생이 이러한 의지를 발휘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자의적인 고리' 안에 학생의 지능을 가두어 두는 자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정말 무식하게도 학생들이 자발적인 의지를 발동하도록 계속해서 재촉하는 스승의 모습이 바로 '무지한 스승'이다. 자코토 역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스승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학생들의 의지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고리 안에 묶어 두고, 학생들 스스로 그 고리에서 빠져나오도록 명령하고 강제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무지한 스승'은 또 다른 스타(?) 선생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스파르타식으로 의지를 강제하는 선생을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지적 능력에 있어서 평등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자, 유식한 자와 무식자가 원래부터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다.

어떤 면에선 누구나 이 '무지한 스승'이 될 수 있다. 심지글씨를 깨우치지 못한 우리들의 무지한 어머니도 '무지한 스승'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무지한 수많은 어머니들이 이미 '무지한 스승'의 역할을 해왔다. 또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도 우리에게 해방을 위한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강제해 줄 수 있다면, 그들도 이미 '무지한 스승'이다.

지적 해방의 장애물

랑시에르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지적 능력에 있어서 평등하다. 그리고 그 누구든 지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곳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들끓는다. 인간이 평등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원래 각 개인들은 성향과 소질이 모두 다르다. 좀 더 재주가 많은 사람도 있고 좀 뒤쳐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고 어느 정도 불평등하다. 이러한 불평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가능한 한 현실의 불평등을 축소해 나가는 것이 평등을 향한 길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공교육 체제를 개발하고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축소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암묵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지적 해방의 장애물이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입을 빌어, 이러한 입장을 반박한다.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 줄 뿐 결코 지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지적 능력은 평등하지만, 단 그 평등한 지적 능력의 발현에 차이가 생길 뿐이다.

더구나 현실적인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평등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결국 다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길은 지적 능력의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할 수는 있으되, 결코 평등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랑시에르는 평등에서 출발해야 하며 지적 능력의 평등은 하나의 공리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 이래 계속되어 온 명령, 즉 "네 고유한 일 말고 다른 것은 하지 마라"(73쪽)도 또 다른 심각한 장애물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한우물만 파야 한다. 재주가 많고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다보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게 된다. 사실 그렇다.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직종에만 '올인'해도 성공하기 힘들 뿐 아니라 먹고 살기도 힘들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한 직종에서 1등이 될 수도 없는 일이고(물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긴 하지만), 또 모두가 최고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자신의 능력을 나누는 세상을 바란다면 다른 길도 가능할지 모른다.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나보다 성공한 녀석과 나보다 실패한 녀석으로 끊임없이 서열화하는 나눔과 구분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서로의 지적 평등을 인정하고 서로의 지적 해방을 자극하는 사회.

자기 무시의 늪

여러 장애물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아마도 자기 무시의 늪일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194쪽)에서. 지식인도 무지한 자가 자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믿지 않듯이, 무지한 자도 역시 혼자 힘으로 익힐 수 있다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암암리에 우리는 유식한 자와 무지한 자로 구분된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선 무지한 자는 '나는 못하오.'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나는 목수요, 평생 목수일 외에는 모르고 살았소.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오.', '나는 요리사요. 요리사가 무슨 철학책을 본단 말이오.' 이것은 결국 자신이 지닌 평등한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이 전문가의 미덕이라는 오래된 플라톤 식의 사회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유식한 자에 속한다고 여기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유식한 자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 지식인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 그 잘난 유식한 지식인들의 위계에 주눅 들어 제대로 된 질문도 제대로 된 폭로도 할 수 없었던 나의 자화상.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좀 더 배워야 한다.' 대체 뭘 못한다는 걸까? 결국 나의 이런 생각 역시 자기 무시의 늪에 불과하다.

특히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 이중적인 깨우침을 준다. 우선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면서 우월한 지식인 앞에서 스스로를 열등한 지식인으로 구분할 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이라는 오만 속에서 다른 지적 능력들과 자신의 지적능력을 구분하려 할 때 중요한 깨우침을 준다.

"노동자의 손 그리고 (사회를) 먹여 살리는 인민이 빚어낸 작품을 수사의 구름들과 맞세우는 자는 바보로 남는다. 구름 제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신발자물쇠 제조만큼의 일과 지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인간 기술의 작품이다." (79쪽)

다시 말해 지식인이 보여주는 지적 능력도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지적 능력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지적 능력은 평등하지만…

아침 7시부터 저녁 6까지 혹은 그 이상의 더 많은 노동으로, 생활고로 지쳐가는 동료에게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지적 해방의 길을 알려줄 수는 있을 것이다. 버스 기사가 편집장이 된 사례, 노동자들의 글쓰기 모임을 통해 필자로 거듭나는 사례, 지금도 계속되는 여러 코뮌 형태의 공부 모임.

그리고 이러한 만남과 공부의 의지를 위해서는 '나는 못하오', '나는 그냥 운전기사일 뿐이오, 나는 그냥 늙어가는 어머니일 뿐이오, 나는 그저 지식인 사회에 이제 막 발 들여 놓으려는 초보 지식인일 뿐이오!'라는 식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줄 사회적 조건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런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이것은 지적 해방뿐 아니라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추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랑시에르가 그토록 비판했던 계몽과 지도를 꿈꾸던 프랑스 혁명 이후의 노력들이 부딪혔던 장애물들. 즉 "보통 사람들은 이 지도를 획득하는 데 할애할 시간도 별로 없고, 그럴 만한 돈은 더군다나 없다."(38쪽) 어쩌면 우리는 다시 이 장애물에 맞닥뜨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자본이 조직하고 강제해내는 시간의 흐름, 소비의 흐름, 여가의 흐름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랑시에르의 지적 해방은 말 그대로 무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이다. 개인들을 통해서만 해방이 가능하다는 랑시에르의 입장은 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결국에는 과연 태일이가 보여준 해방의 길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지적으로 평등한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해방되었을 때, 그 해방된 우리들이 만나 터뜨리게 될 우발적인 사건을 기대할 수밖에….




/조은평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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