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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범죄학 강의」(시인 최치언)   2009년 7월 7일





 





횡설이와 수설이가 그 집을 털려고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집은 털려 있었습니다. 집은 오래 전부터 주인 없이 버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다 죽어 갈 판인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강아지가 불쌍하다면서 횡설이가 가져다 키우겠다고 합니다. 수설이는 안 된다고 합니다. 횡설은 쉽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수설은 만에 하나 잡히면 그 강아지가 증거물이 될 수 있다고, 모든 걸 다 덤터기쓸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횡설을 아래와 같이 설득합니다.


 


“잘 들어. 니가 아직 이 세계를 잘 몰라서 그래. 범죄의 현장에서 증거는 매우 중요한 단서야. 너도 잘 알 거야. 강간범을 잡는 데는 여자의 질에서 나온 정액이나 옷이나 팬티에 묻어 있는 타액 등이 확실한 증거물이 돼. 또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음모가 증거물이 되든지. 그럼 왜 범인들은 항상 증거물을 남기고 떠나느냐. 잘 생각해 봐, 범죄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도 같은 거야. 사람이 두 발로 서서 도끼를 만들어 쓸 때부터 인류의 범죄는 시작된 거야.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도구를 발명한 것은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아주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거지. 당장 저 새끼를 죽이고 싶은데 도구 없이 맞짱으로 안 된단 말이야. 그래서 돌을 집어 들었지. 돌을 집어 든 순간 팽하니 맛이 간 거야. 돌을 다른 돌에 마구 찧어 댄 거야.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우리들도 그러잖아, 싸움 전에 제 성질에 먼저 돌아버려서 자기 옷을 찢어발기고 집기들을 마구 부수잖아. 그 정도로 이해하면 돼. 그리고 돌을 쳐다보니까 부서져 나간 돌이 날카롭게 벼려 있지 않겠어.


 


그런데 말이야, 이쪽에서 돌을 들고 설치는데 저쪽에서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진 않아. 저쪽도 돌을 집어 들지. 서로 돌로 대가리를 마구 찧어 대는 거야.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냐? 날카롭게 벼른 돌이 당연히 녀석의 대가리를 한번에 뽀개 놓을 수가 있는 거야. 위대한 도구의 발명이지.


 


그 다음으로 나온 것들의 도구를 잘 봐. 철붙이라고 어떻게 철을 만들었겠어? 그 돌대가리들이. 단지 하나 간절하게 죽이고 싶은 새끼 배때기를 푹 찔러 주고픈 마음 때문이었다고. 돌은 이미 평준화가 되었기 때문에 별 쪼다 같은 놈들도 다 싸우기 전에 돌을 부수어서 날카롭게 벼른단 말이지. 이젠 벼른 돌로도 대가리를 부술 수 없게 되어 버린 거지.


 


또 이해가 안 가지? 모기들이 모기약에 면역성을 키운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사람들은 더 강한 모기약을 만들어 내고 모기는 다시 그 모기약을 견뎌 내기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변화시키는 거지. 이것이 바로 투쟁의 역사라는 거야. 하여간 더 이상 돌로 안 되니까 실의에 빠진 원시인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자신들이 만든 돌을 불 속에 집어던지고 더 강하고 더 날카로운 그 무엇이 없나 고민하며 새벽을 맞이했을 때, 하나 둘 원시인들이 쓰러져 잠든 뒤에도 홀로 잠들지 않는 원시인이 있었단 말이지. 그 원시인은 돌이 녹아서 철이 만들어지는 것을 모닥불 속에서 환영처럼 본 거야. 잠 못 자고 맛 간 상태에서 본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광기의 역사라고도 하지. 이윽고 철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칼이 되었지. 칼은 총이 되었고 또 그것은 미사일이 된 거야.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느냐면 곧 인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야. 그럼 범죄의 역사가 이처럼 깊고도 넓은데 왜 범죄자들은 그 자리에 증거를 남기느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주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너도 한번 생각해 봐라.


 


우리 인간은 남의 잘못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동물이라고. 그놈의 증거 때문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많은 범죄자가 붙잡히고 사형에 처해졌는데 어느 덜떨어진 놈이 증거를 남기겠니? 그런데도 증거를 남기잖아. 왜 그럴까? 그건 범죄자들이 부주의하기 때문이 아니야. 그렇게 쉽게 말해선 안 돼. 그건 마치 3월 봄이면 기어이 눈물을 쏟게 하는 까진 양파 같은 목련이 피고, 4월이면 라일락이 담장 가득 말오줌 같은 향기를 게워 내고, 5월이면 혁명가의 붉은 주먹처럼 장미가 온 세상을 향해 힘차게 피고, 6월이면 미루나무 위에 벼락이 떨어지고, 7월이면 청포도가 시금털털하게 익어가고, 8월이면 보름달이 무거워서 화투장에 떨어지고, 9월이면 때늦은 태풍이 때늦은 더위를 몰고 북쪽으로 사라지고, 10월이면 잔서리가 내려 기어이 사람이 얼어 죽고, 11월이면 자작나무숲을 걸어 고향으로 가는 나타샤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날린다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때에 전 팬티뿐이지만, 12월이면 크리스마스 카드가 교도소 식구통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지. 다시 말하자면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란 거야. 그 숙명에 굴하지 않고 비껴서지 않으면 대부분이 12월의 교도소 안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 거라고. 그러니까 숙명을 비껴서야 해.


 


자, 정리해 보자. 범죄자가 증거를 남기는 것은 숙명이다. 인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였다. 무수히 많은 선조 범죄자들이 그 숙명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고로 우리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우리 범죄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숙명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그럼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히 강아지를 버리는 거지. 니가 강아지를 가지고 가겠다는 것은 니가 강아지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아지가 너를 붙잡아서도 아니야. 그냥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숙명이라고. 알겠어? 너는 숙명에 걸린 거라고. 그러니까 어서 강아지를 버려.”


 


여러분이 횡설이면 수설이가 이렇게 말하는데도 강아지를 가져가시겠습니까?






















■ 필자 소개


 




최치언(시인)


1970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과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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