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8737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밥 먹고 바다 보면 되지」(시인 권현형)   2009년 6월 25일_마흔두번째





 





바닷가 사람들은 일부러 바다를 보지 않는다. 바다와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 들숨 날숨처럼 한 몸통이다. 겨울 아침 여덟시 반, 여행 중인 당신은 우람한 회 센터보다도 주문진 부둣가 바로 앞 허름한 선술집 같은 납작식당에 더 끌릴 것이다. 밥 식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보글보글 끓는 국 냄비를 식히고 앉아 있다면, 출입문을 빠끔 열어 놓고 바다가 잘 보이는 쪽으로 엉성하게 걸터앉아 수저에 턱을 올려놓고 있다면, 당신은 식당 아주머니께 한 쿠사리 듣게 될 것이다.


 


“국을 떠먹으려면 앞에 바로 앉아야지요.” “바다 보면서 밥 먹으려고요.” 만약 당신이 아주머니 말씀에 토를 단다면, “밥 먹고 바다 보면 되지.” 바다에 대한, 밥에 대한 잠언 한 구를 얻어 듣게 될 것이다. 바닷가 사람들은 밥 먹느라고 바다를 보지 않는다. 혹은 밥 먹고 바다를 보느라고 잘 익은 창란젓처럼 막이 두껍고 짜고 깊은 바다를 본다.  


 


금방 출항이라도 할 듯 접시 밖으로 한 발씩 빠져나가 있는 갓김치랑 파김치랑 가자미식혜엔 감히 손을 못 대도 흐물흐물 푹 고아진 곰치국의 이상스레 시원한 맛에 간밤의 취기, 치기가 어느 정도 풀리고 부두 주변을 어슬렁거릴 당신. 야생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다가 익숙하고 세련된 커피향에 이끌려 해변의 테이크 아웃 목조계단을 올라간다면 간혹 뜻밖에도 80년대에 사라진 풍경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뺨이 발그레하고 목이 짧고 통통한 디스키 자키가 마이크 테스팅, 마이크 테스팅, 자신이 아는 유일한 영어인 듯 혀로 계속 마이크를 쳐대는 풍경. 디스크 자키의 할머니와 엄마가 그녀들의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은회색 꼭 끼는 양복을 입고 간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손자를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풍경. 맥주병 마개를 따느라, 돈까스를 칼로 써느라 경쾌하게 병 부딪는 소리,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 음악을 잠식하는 떠들썩한 평화를 잠시 만나게 될 것이다. 테이크 아웃에서 외지인인 당신은 그들만의 어떤 낯익고도 독특한 음향적 연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창백한 음악이 아닌 따뜻한 음향.


 


바다가 있는 창 쪽으로는 바닷가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그들. 아예 안쪽으로 깊이 들앉은 그들. 바다를 살지 않았으므로 바닷가 사람이 아니므로 창 쪽에 붙어 있던 당신은 어쩌면 소란과 음향을 못 견디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피해 테이크 아웃에서 달아날지도 모른다. 당신이 계단을 거의 내려올 때쯤 김광석 타계 몇 주년이라는 디스크 자키의 멘트와 함께 흘러 나오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김광석 노래의 서글픔에 갇히지 않고 바다의 심연에 함몰되지 않고 마수와(맛있어)! 마수와(맛있어)!를 연발하는 바닷가 사람들의 씩씩한 바다를 당신은 언젠가 몹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 필자 소개


 




권현형(시인)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강릉대 영문과를 거쳐,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수료받았다. 시집으로『중독성 슬픔』『밥이나 먹자, 꽃아』 등이 있다.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11154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No Image 15Jul
    by 바람의종
    2009/07/15 by 바람의종
    Views 5863 

    지적(知的) 여유

  4. No Image 14Jul
    by 바람의종
    2009/07/14 by 바람의종
    Views 8194 

    「쌍둥이로 사는 일」(시인 길상호)

  5. No Image 14Jul
    by 바람의종
    2009/07/14 by 바람의종
    Views 6954 

    작은 사치

  6. No Image 13Jul
    by 바람의종
    2009/07/13 by 바람의종
    Views 9285 

    「추어탕의 맛」(시인 조용미)

  7. No Image 13Jul
    by 바람의종
    2009/07/13 by 바람의종
    Views 5543 

    청년의 가슴은 뛰어야 한다

  8. No Image 12Jul
    by 바람의종
    2009/07/12 by 바람의종
    Views 4299 

    내가 세상에 남기는 것

  9. No Image 10Jul
    by 바람의종
    2009/07/10 by 바람의종
    Views 7894 

    「내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시인 조용미)

  10. No Image 10Jul
    by 바람의종
    2009/07/10 by 바람의종
    Views 4671 

    먹는 '식품'이 큰 문제

  11. No Image 10Jul
    by 바람의종
    2009/07/10 by 바람의종
    Views 6532 

    「만두 이야기_2」(시인 최치언)

  12. No Image 09Jul
    by 바람의종
    2009/07/09 by 바람의종
    Views 6991 

    「만두 이야기_1」(시인 최치언)

  13. No Image 09Jul
    by 바람의종
    2009/07/09 by 바람의종
    Views 4361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

  14. No Image 09Jul
    by 바람의종
    2009/07/09 by 바람의종
    Views 5533 

    그가 부러웠다

  15. No Image 08Jul
    by 바람의종
    2009/07/08 by 바람의종
    Views 7648 

    「세상에 없는 범죄학 강의」(시인 최치언)

  16. No Image 07Jul
    by 바람의종
    2009/07/07 by 바람의종
    Views 3993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은 없다

  17.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9265 

    「2호차 두 번째 입구 옆자리」(시인 차주일)

  18.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7808 

    「엉뚱스러운 문학교실」(시인 김종태)

  19.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4861 

    일상의 가치

  20.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4855 

    길 떠날 준비

  21. 찰떡궁합

  22.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7576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요"

  23.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7890 

    「광진이 형」(시인 김두안)

  24.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7761 

    「"에라이..."」(시인 장무령)

  25. No Image 06Jul
    by 바람의종
    2009/07/06 by 바람의종
    Views 5984 

    결정적 순간

  26. No Image 01Jul
    by 바람의종
    2009/07/01 by 바람의종
    Views 5282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

  27. No Image 30Jun
    by 바람의종
    2009/06/30 by 바람의종
    Views 7097 

    「화들짝」(시인 김두안)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