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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다발의 시린 사랑얘기 1/2  : 이외수 수필집 '내잠속에 비내리는데' 중에서


  춘천시 효자동 언덕배기에 월세 1천 원짜리의 방 같지도 않은 방 하나를 얻어 놓고 자취생활을 할 때였다. 살림도구라곤 냄비 한 개와 젓가락 한 개 뿐인 부엌. 연탄이라곤 하얗게 사위어 버린 잿덩어리 여섯 개만 나뒹굴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면 담요 한 장과 몇 권의 책, 그리고 파리들만 가득했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다만 못 죽고 있는 상태라고만 생각했었다. 요행히 <강원일보>에 나가 삽화 나부랭이를 끄적거리며 가까스로 외상술을 마실 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긴 하였다. 날마다 술을 마셨다. 밤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비참한 생각뿐이었다. 여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봄이었다. 왜 그리 날마다 햇빛이 눈물겹게 아름답기만 했었는지. 차라리 막돼먹은 술집 여자라도 하나 꼬셔 가지고 들놀이를 간다 해도 남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사람을 완전히 실성케 만드는 법이어서, 그즈음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미친놈 흉내나 내며 살았다. 더러는 다리밑에서 거지들하고 소주를 까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또 더러는 파출소 보호실에서 숙취의 새우잠을 자기도 했었다.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워서 하루에도 몇십 통씩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친구들에게, 또는 통속잡지 펜팔란에서 고른 그렇고 그런 여자들에게. 그러나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젊음을 죽이고 생활의 멍에 속에 갇혀 있었고, 그렇고 그런 여자들은 그렇고 그런 여자들대로 한 장에 몇십 자씩이나 맞춤법이 틀리는 답장들을 보내와서 나를 실망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다. 그러한 생활의 모든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남모르게 눈물로 가슴 속에 괴어서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 눈물의 무게를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즈음 아무 여자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가 있어 함께 살자고 말해 왔다면, 나는 비록 그 여자가 저 노틀담의 곱추인 콰지모도처럼 생겼다고 해도 쾌히 동거를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그러한 여자조차도 나타나 주지 않았었다. 나는 우연히 구한 외국잡지에서 이쁘게 생긴 한 여자의 사진을 오려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그것이나 바라보며 살았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폼나는 작품을 하나 써야지. 꿈 속에서도 문학을 고향처럼 마음 안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 속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나도 하나님을 조금씩 미워하기 시작했었다. 교회를 나가고 싶었다. 하나님을 만나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쁘게 생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도 한 마리 훔쳐오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날도 나는 그 의자에서 개떡 같은 내 청춘, 개떡 같은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떡은 영원한 개떡이었다. 나는 어디 가서 술 건이나 잡아서 다시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살으리. 여자도 없이 맨정신으로 어떻게 그 아름다운 햇빛 속을 걸어다닐 수 있으리. 나는 어디 가서 또 곧 갚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한잔 꺾자고 결심했다.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다실 안이 확 밝아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막 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여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기막힌 미인이었다. 첫눈에 황홀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다실 안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의심하려 했었다. 대개 여자들이란 다실의 침침한 조명 아래서는 본래의 얼굴보다 한결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먼데서 보면 주근깨나 여드름 따위도 보이지 않기 마련이니까. '아닐 것이다. 저 여자는 가까이 가서 보면 형편없는 얼굴일 것이다. 거리와 조명 탓일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가 내 전용 의자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나는 유심히 그녀를 관찰해 보았다. 지적이고 기품 있고 늘씬하고 뭐 하여간 끝내 주게 미인인 여자였다. 애인이 있을까. 춘천 사는 여자일까. 몇살이나 되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그리하여 가슴은 두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슨가 말크라테슨가 하느 어느 공처가 철학자의 '네 꼬라지를 알라'는 충언이 생각났다. 나는 내 꼬라지를 한 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거지 꼬라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도 남자라는 점이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 다음 허락도 없이 그녀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참 이쁜데요. 아니 아름다운데요. 앞으로 이 다방에 자주 좀 나와 주쇼. 내가 한 번 아가씨를 꼬셔 볼 작정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곧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거나말거나 나는 건방지게 그녀의 어깨까지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그럼 또 봅시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그 다실을 나와 버렸다. 한잔 꺾기 위해서였다. 다실을 나오니 비로소 세상이 온통 밝아 보였다. 왠지 무슨 일인가가 앞으로 일어나 주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이 가고 있었다. 좀처럼 그녀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나는 마치 한 줌의 아름다운 연기를 잡았다가 놓치고 만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다시금 그 다실에서 그녀를 만날 수가 있게되었다. 신문사에 나가 삽화를 그려 주고 다실로 오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여전히 오만하고 아름다운 자세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는 감격해서 숨이 딱 멎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섰다. 그리고 침착하고 느린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예언컨대 분명히 아가씨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겁니다. 이왕 좋아할 거면 미리 좀 좋아해 주쇼."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두고보라지. 나는 마음속으로 빙글거리며 내 전용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다시 앉아 있다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곧장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강원일보에 중편소설 하나를 연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의 서재, 나의 응접실, 나의 사무실, 나의 침대, 나의 집필실인 의자에 죽치고 앉아 되지도 않는 소설을 비비느라고 한참을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로 말을 던졌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거 보세요."  

보시라는 데를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녀가 친구와 함께 내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글을 쓸 때만은 마치 무슨 종교 의식을 행할 때처럼 엄숙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당시의 내 뚝멋이었다. 이때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녀는 즉시 약이 올라 버린 모양이었다.  

"괜히 예술가인 척하지 말아요. 혐오감을 주니까. 이봐요, 그만 이 다방을 나가 주실 수 없으세요."  

깔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괘씸했다. 그러나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루치 연재소설의 분량은 2백자 원고지로 8매였다. '다 쓰거든 두고 보자'하고 벼르면서 나는 골똘히 원고지에 낱말들을 박아넣고 있었다.  

"이봐요. 엉터리 소설님. 배고픈데 저녁 좀 사실래요."  

다 쓰고 나자 그녀가 다시 내게로 말을 던졌다. 놀리는 듯한 어투였다. 그 꼴에 네까짓 게 저녁을 살 수 있겠느냐는 듯한 조롱까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몰랐지. 내가 외상의 천재라는 것은 전혀 몰랐지.  나는 일부러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저녁을 사달라고 채근해 왔다. 남자가 뭐 그리 시시하냐는 거였다.  
"정말 사드려요?"  
나는 자신 없는 듯한 어투로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서 보았다.  
"사 달라니까요."  
그녀는 결코 내가 저녁을 살 수 없으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드리면 먹을 자신 있어요?"  
"있지요."  
"따라오쇼."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다실을 나섰다.  

나는 단골 분식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켜주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가난에 어떤 감동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녀는 묵묵히 가락국수 한 그릇을 모두 건져먹었다. 나는 기분 좋게 분식집 주인 아줌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외상!"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이 녀석은 재미있는 놈이다. 그녀는 그저 그 정도를 나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당시 그녀는 약간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간호원이었고, 그 동안의 병원 근무를 집어치운 채 일본을 갈까 독일을 갈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그녀는 전원 다실에 나타나서 영화구경 좀 시켜 주실래요. 짜장면 좀 사주실래요. 불쑥불쑥 내 텅 빈 호주머니를 넘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충성을 다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한갓 그녀의 심심풀이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신문사로 전화가 왔다. 마침 집에서 모를 심는데  모밥을 먹으러 오라는 거였다. 기분 삼삼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가겠노라고 이야기했고, 그녀는 그녀의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그 전화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거리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나는 그 일거리들을 해넘겼지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만 모밥을 포기하고 말았다. 홧김에  외상술을 마셨다. 그리고 약간 취했다. 취해서 생각하니 밑지는 셈치고 한 번 가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탔다. 이미 두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었다. 그러나 감격스러워라. 내가 약속한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그녀는 어느 건물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풀죽은 모습으로 그때까지 뙤약볕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늦어 버린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녀는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묵묵히 내 변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반짝 희게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시골집이었다. 집 안은 무슨 까닭인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사랑방에다 나를 앉혀 놓고 새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내게로 왔다. 그리고 불쑥 내게 말했다.  

"옷을 벗으세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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