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8360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나는 차별, 가난, 착취, 식민주의에 줄기차게 반대했다. 불황, 전쟁, 파시즘을 겪으며 분노했다. 그런 일들은 아무리 곱게 봐도 문젯거리였고, 나쁘게 말하면 사회 전체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스스로 파멸해 가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대안을 마련하고 실현하려는 노력 없이 사회에 반대만 하는 것은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가까이에서 보았던 부정의와 불평등을 뿌리뽑을 수 있다고 믿으며 제도의 틀에서 일어났던 여러 변화에 반대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분명히 이 문명은 결코 조화로운 삶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 이 사회는 생산성을 높여 가난과 실업, 착취, 차별, 식민주의를 몰아내기는커녕 이 부도덕한 것들을 일부러 퍼뜨려 거기에서 이윤까지 냈다. 나는 반대하고 저항하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회는 내 밥벌이를 빼앗고 내 영향력과 신분까지 빼앗으며 나를 비웃었다.
  이제 투쟁을 포기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인가? 힘센 이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런 사회 불의에 반대하기를 그만두고 눈앞에 버티고 있는 권력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뒤, 앞으로는 내가 반대했던 사회 체제에 이바지하고 그를 찬양하겠노라고 약속할 것인가?
  
  선뜻 결정 내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넓게는 모든 사회 관계의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원칙의 문제였다. 그대로 갈 것인가. 비켜날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나만이 이런 갈림길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었다. 사회 의식이 있는 같은 시대 사람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듯 의문과 실망투성이인 난관은 역사를 돌이켜볼 때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내 갈림길, 우리 세대의 갈림길, 서구인의 갈림길, 역사에 나타난 인류의 갈림길은 이상, 꿈, 희망, 목표, 계획으로 나아가는 길과 현실의 제약에 머무는 길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이면서 또 인류 공동체의 일부로서, 한 사람은 모순, 양자택일, 갈림길, 선택의 순간에 맞닥뜨린다.
  
  하나를 고르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제때에 분명히 행동하면 하나는 고를 수 있다. 머뭇거리거나 옆걸음질치거나 미적거린다면 둘 다 놓치고 만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이런 명제를 앞에 놓고 스콧니어링이 던진 이 말이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리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질문처럼 가슴을 때리며 다가오는지요?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2835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1680
2844 역설의 진리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7392
2843 세계 최초의 아나키스트 정당을 세운 한국의 아나키스트 바람의종 2008.07.24 15060
2842 소인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4 7874
2841 우기 - 도종환 (48) 바람의종 2008.07.26 8793
» 이상주의자의 길 - 도종환 (49) 바람의종 2008.07.28 8360
2839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면 바람의종 2008.07.31 10882
2838 행복한 사람 - 도종환 (50) 바람의종 2008.08.01 8395
2837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 도종화 (51) 바람의종 2008.08.01 6081
2836 히틀러는 라디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바람의종 2008.08.05 16496
2835 다른 길로 가보자 바람의종 2008.08.08 7020
2834 병은 스승이다 - 도종환 (52) 바람의종 2008.08.09 7141
2833 권정생 선생의 불온서적 - 도종환 (53) 바람의종 2008.08.09 7235
2832 이해인 수녀님께 - 도종환 (54) 바람의종 2008.08.09 8453
2831 매미 - 도종환 (55) 바람의종 2008.08.13 7257
2830 멧돼지와 집돼지 - 도종환 (56) 바람의종 2008.08.13 8336
2829 싸이코패스(Psychopath) 인간괴물, 사법권의 테두리에서의 탄생 바람의종 2008.08.13 10062
2828 다다이스트가 되어 보자! 바람의종 2008.08.19 8776
2827 8.15와 '병든 서울' - 도종환 (57) 바람의종 2008.08.19 8747
2826 산 - 도종환 (58) 바람의종 2008.08.19 6980
2825 카프카의 이해: 먹기 질서와 의미 질서의 거부 바람의종 2008.08.19 8588
2824 쑥갓꽃 - 도종환 (59) 바람의종 2008.08.21 6176
2823 하기 싫은 일을 위해 하루 5분을 투자해 보자 바람의종 2008.08.21 9375
2822 목자 - 도종환 (60) 바람의종 2008.08.27 4795
2821 오솔길 - 도종환 (61) 바람의종 2008.08.27 7035
2820 오늘 하루 - 도종환 (62) 바람의종 2008.08.27 762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