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0063 추천 수 1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그녀 생애 단 한 번」(소설가 정미경)   2009년 6월 5일_스물여덟번째





 





이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는데요?


K는 발권 코너 남자의 푸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가 무슨 소리야, 시방.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남자가 볼펜으로 티켓에 적힌 숫자를 톡톡 쳤다. 오늘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뒤에 0030이라고 적혀 있는 그 부분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는 오늘 새벽 0시 30분에 이미 출발한 것이었다. K가 착한 남자랑 결혼한 건 사실이다. 남편은 짧게 한숨을 쉬었을 뿐, 단 한 마디도 힐난을 하지 않았다. 뒤늦은 비탄과 자책으로 10분을 보내고서야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K가 인터넷을 뒤져 더 이상 쌀 수 없다며 의기양양하게 예약한 티켓은 싼 대신, 예약 변경이나 환불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100만 원짜리 두 장. 200만 원이 간단히 사라졌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남자가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번 비행기에 이코노미석이 하나, 일등석이 딱 한 장 남아 있네요. 이후 일주일 동안 한국행 비행기는 남은 좌석이 하나도 없어요. 일등석은 편도에 500만 원입니다.


남자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 K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름방학이 막 끝난 주였다. 남편이나 나나 늦어도 모레는 학교에 출근해야 했다. 일주일이나 휴강했다간 알량한 시간강사 자리마저 위태로웠다. 게다가 일주일치 호텔비와 식비를 합하면…. 카드를 내미는 K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탑승구 앞에서 다시 약 5분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K는 혈압이 말썽인 남편에게 일등석으로 가라 했고 남편은 신우염이 채 낫지 않은 K가 그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서야 K가 떠밀리듯 일등석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부터 K는 울기 시작했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파산이다. 5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하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던 것들의 리스트가 태평양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예쁜 여승무원이 울고 있는 K를 내내 지켜보아 주었다. 기내식이 나왔지만, 번번이 손만 내저었다. 뼈가 쏙쏙 저렸다. 내리 세 시간을 울고 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500만 나누기 12는? 시간당 41만6,666원. 벌써 4분의 1이 날아갔잖아. 눈물을 뚝 그쳤다. 앞 포켓에 꽂힌 메뉴판을 꺼내 펼쳐보았다. 트뤼플을 곁들인 프로방스산 치킨. 푸아그라가 토핑된 메로구이. 하몽으로 감싼 멜론. 와인은 그랑크뤼급 2001년 보르도산. 그렇다면 아까 울고 있을 때 눈앞을 오가던, 번쩍이는 은쟁반에 놓인 것들이 평생 소문으로만 들었던 송로버섯과 푸아그라와 기가 막힌 와인이었단 말인가. 울음 그친 걸 귀신같이 알아챈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무얼 좀 갖다 줄까 물어 보았다. 설거지까지 끝난 마당에 밥 달라고 할 수 없어 라면이나 한 그릇 갖다달라고 했다. …얘기를 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물었다.


“라면은 먹었어?”


“먹었어.”


귀여운 K. 너무 속상해하지 마. 500만 원짜리 라면 아무나 먹나.














■ 필자 소개


 




정미경(소설가)


1960년에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2006년『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6418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5485
2877 길 떠나는 상단(商團) 바람의종 2008.06.23 8986
2876 여린 가지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23 7730
2875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준 사람 바람의종 2008.06.24 7644
2874 빈 병 가득했던 시절 바람의종 2008.06.27 5972
2873 雨中에 더욱 붉게 피는 꽃을 보며 바람의종 2008.07.01 7712
2872 얼굴빛 바람의종 2008.07.03 6476
2871 이장님댁 밥통 외등 바람의종 2008.07.04 8798
2870 후배 직원을 가족같이 사랑하라 바람의종 2008.07.09 6859
2869 왕이시여,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바람의종 2008.07.09 8058
2868 생각의 집부터 지어라 바람의종 2008.07.12 6298
2867 벌주기 바람의종 2008.07.16 6267
2866 사과 바람의종 2008.07.18 6412
2865 용서 바람의종 2008.07.19 6518
2864 물음표와 느낌표 바람의종 2008.07.21 7656
2863 온화한 힘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6548
2862 권력의 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10921
2861 창의적인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315
2860 개울과 바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9157
2859 평화의 촛불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7017
2858 임숙영의 책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6952
2857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10191
2856 유쾌한 시 몇 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342
2855 좋은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7827
2854 모기 이야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250
2853 독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685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