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6.27 11:22

빈 병 가득했던 시절

조회 수 5972 추천 수 2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빈 병 가득했던 시절








 연극배우가 늘 배고픈 건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 배고픈 날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십수 년 전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자리는 삼겹살에 소주 또는 통닭에 생맥주가 있는 술자리였다. 몇 끼를 굶었건 얼마나 오래 연습을 했건 그런 술자리가 있으면 나는 흥분했고 어느새 행복해졌다. 지금까지도 몇몇 그때의 술자리들은 가슴 구석에 아련히 모셔져 있다. 제법 유명해진 요즘은 원 없이 그때처럼 먹을 수 있지만, 그때의 맛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인지 어떤 자리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날은 ‘따따블의 날’이었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가 이어지는 술자리였으니 말이다. 흥분된 만취 상태로 밤을 찢어 새벽을 맞이했고 첫차 뒷좌석에 실려 자취방에 들어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술은 못 깨고 겨우 잠만 깨 냄새나는 자취방을 나와 연습실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차비가 없음을 확인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삼십 여 분 후 손아귀에 들어온 돈은 오십 원. 그때 물가로 백 원이 부족했다. 걸어서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연습실, 작은 절망이 몰려왔다. 염치없이 옆집에서 빌릴 수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사정하기도 쪽팔리고…. 평소 잔머리 잘 굴린다 소리 듣던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공연도 아니고 연습인데 뭘…. 원래 성실한 놈도 아니구, 에잇, 양말이나 빨자.’
 신발장 옆에는 스무 짝이 넘는 양말이 쌓여 있었다. 대야를 가져와 양말을 담으려는 순간 신발장 옆에 수북이 쌓인 빈 병들에 시선이 꽂혔다. ‘가만, 저게 얼마야?’ 삼십 병도 거뜬히 넘는 빈 병들을 세어 보니 거의 천 원에 육박했다. 차비가 문젠가,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 하하. 갑자기 천하를 얻은 기분. 정류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아주 건방지게 태우고 보무당당히 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절은 그렇게 늘 아슬아슬했고 오늘 벌어 내일을 버텨야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일치했으니, 한 끼 굶어 술이었고 동가식서가숙이었지만 늘 행복했고 신났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 한번 원 없이 먹어 본 적 없던 그 시절의 술자리. 그 잊을 수 없는 맛을 또다시 좋은 벗들과 느껴보고 싶다.


박철민 님 | 배우
-《행복한동행》2008년 6월호 중에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6394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5427
2877 심리치유 과정에서 조심할 일 風文 2023.02.15 403
2876 나만의 고독한 장소 風文 2023.04.16 403
2875 꽃이 핀 자리 風文 2023.05.22 403
2874 명상 등불 風文 2023.01.07 405
2873 영웅의 탄생 風文 2023.05.26 405
2872 밀가루 반죽 風文 2023.08.03 405
2871 아빠가 되면 風文 2023.02.01 406
2870 불안할 때는 어떻게 하죠? 風文 2022.12.17 408
2869 51. 용기 風文 2021.10.09 409
2868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9.1. 오르페우 風文 2023.11.21 409
2867 지혜의 눈 風文 2022.12.31 411
2866 좋은 부모가 되려면 風文 2023.06.26 411
2865 '억울하다'라는 말 風文 2023.01.17 412
2864 아르테미스, 칼리스토, 니오베 風文 2023.06.28 413
2863 무엇이 행복일까? 風文 2023.09.20 413
2862 역사의 흥망성쇠, 종이 한 장 차이 風文 2023.05.12 414
2861 끈질긴 요청이 가져온 성공 - 패티 오브리 風文 2022.08.22 416
2860 제가 그 희망이 되어드릴게요 風文 2023.02.04 416
2859 사는 게 힘들죠? 風文 2021.10.30 417
2858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습관 風文 2022.01.30 417
2857 두근두근 내 인생 中 風文 2023.05.26 417
2856 갱년기 찬가 風文 2022.12.28 418
2855 아이에게 '최고의 의사'는 누구일까 風文 2023.11.13 418
2854 변명은 독초다 風文 2021.09.05 419
2853 아이들의 잠재력 風文 2022.01.12 41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