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9 03:08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조회 수 6545 추천 수 10 댓글 0
가을 오후 상당산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단풍이 참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을 지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황홀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줄 지어 선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오며 나무들에게 거수경례 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 風文 | 2023.02.04 | 7276 |
공지 | 친구야 너는 아니 1 | 風文 | 2015.08.20 | 96334 |
2127 | 사랑의 공간, 자유의 공간 | 風文 | 2014.12.30 | 6541 |
2126 | 철이 들었다 | 바람의종 | 2011.06.28 | 6537 |
2125 | 용서 | 바람의종 | 2008.07.19 | 6535 |
2124 | 닥터 지바고 중 | 바람의종 | 2008.02.18 | 6530 |
2123 | 용서 | 風文 | 2014.12.02 | 6529 |
2122 | 겨울 준비 - 도종환 (104) | 바람의종 | 2008.12.08 | 6528 |
2121 | 문학대중화란 - 안도현 | 바람의종 | 2008.03.15 | 6524 |
2120 | 아배 생각 - 안상학 | 바람의종 | 2008.04.17 | 6522 |
2119 |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관계 | 風文 | 2014.12.17 | 6521 |
2118 |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세계 | 바람의종 | 2008.02.16 | 6520 |
2117 | 쉬어갈 곳 | 바람의종 | 2012.11.02 | 6520 |
2116 | 포옹 | 風文 | 2015.01.18 | 6520 |
2115 | 벼랑 끝에 섰을 때 잠재력은 살아난다 | 바람의종 | 2012.07.23 | 6519 |
2114 | 숫사자의 3천번 짝짓기 | 바람의종 | 2009.04.30 | 6514 |
2113 | 노인과 여인 | 바람의종 | 2008.03.16 | 6512 |
2112 | 못생긴 얼굴 | 바람의종 | 2009.04.13 | 6512 |
2111 | 스스로 자기를 아프게 하지 말라 | 바람의종 | 2007.06.07 | 6511 |
2110 |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 바람의종 | 2008.10.10 | 6510 |
2109 | 고비마다 나를 살린 책 | 윤안젤로 | 2013.03.18 | 6508 |
2108 |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 | 風文 | 2015.02.23 | 6507 |
2107 | 「만두 이야기_2」(시인 최치언) | 바람의종 | 2009.07.10 | 6506 |
2106 | 나는 너를 한눈에 찾을 수 있다 | 바람의종 | 2012.09.28 | 6503 |
2105 | 사랑 | 바람의종 | 2008.03.04 | 6500 |
2104 | 행복의 양(量) | 바람의종 | 2008.10.20 | 6498 |
2103 | 벌새가 날아드는 이유 | 바람의종 | 2012.05.21 | 6498 |